[한국전쟁과 제주-평화를 긷다]① 제주도, 냉전유산에서 평화유산의 길을 묻다

한국전쟁 제71주년.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전쟁기의 제주도는 어떤 역사로 기록되고 있을까. 4.3과 예비검속, 그리고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의 참혹한 현장이나 희생자들이 해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1950년 6월25일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 육지에서 밀려온 수많은 피난민, 급박한 전시상황에서 설치된 육군훈련소, 중국인민지원군 전쟁포로수용소의 설치, 미군 비행장으로 조성된 알뜨르비행장(모슬포)과 정뜨르비행장(용담). 거기에다 끝나지 않은 4.3의 비극은 한라산 등지에서의 무자비한 토벌작전으로 무고한 목숨들이 주검으로 쌓여갔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지난해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에 이어 올해 71주년을 맞아 [한국전쟁과 제주-평화를 긷다] 기획을 다시 연재한다. 냉전시각에서 고착화된 한국전쟁기 제주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은 이제 평화유산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기억하는 작업이다. 제주가 ‘박제화된 평화의 섬’이 아니라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를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를 이끄는 진정한 평화의 섬이 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 편집자 글 

 

1950년 12월 제주도에 이송된 전쟁고아들(UN ARMS).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archives 2 자료. 제공=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br>
1950년 12월 제주도에 이송된 전쟁고아들(UN ARMS).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archives 2 자료. 제공=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제주도민이 기억하는 한국전쟁

한국전쟁기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예비검속과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제주도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전국에서 5만여 명 이상의 전쟁 피난민과 전쟁고아들,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분류된 중국인민지원군 포로가 제주도에 들어왔다. 제주 4.3사건 당시 산으로 도피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한 상황이었고 군경 토벌작전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섬은 한국 해병대와 잔류한 주한미군사고문단 파견대, 제주시와 모슬포수용소를 관리하기 위해 입도한 미군, 육군훈련소에 파견된 미군과 각종 첩보기관의 정보원들까지 육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앞에서 열거한 사건과 사람들은 어느 것 하나 쉽게 풀어갈 수 없는 이야기이다. 냉전과 열전이 반복되는 동아시아에서 제주도의 역사적 위치는 다층적이고 복잡했다. 한국전쟁기 제주도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을 돌아보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는 무엇인지를 짚어본다. 이로써 냉전유산이 평화유산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제주도, 냉전에서 열전으로

(영상설명=1945년 9월 28일 321통신서비스중대 파견대의 surrender가 제주공립농업학교에서 일본군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장면. 제공=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1945년 9월 28일 옛 제주공립농업학교(지금의 제주고등학교)에서 일본군이 미군에 항복문서를 작성할 때까지만 해도, 제주도가 연속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것이라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군이 떠난 자리를 미군이 메웠지만 제주도 도민들은 새로운 국가 건설의 희망에 넘쳐 자치조직을 결성하고 활동했다. 1946년 1월 이후 미소공동위원회는 각자의 조선 정책을 놓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서 더욱 복잡한 셈법만 도출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귀환한 독립운동가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자치조직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 정당 및 단체는 신탁통치 문제와 국가건설의 방향과 체제를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은 좌우의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반소·반공 정책을 고수하면서 각종 정치적 테러 사건을 방임한 채 자치조직을 불법화하고 집회와 시위조차 금지하는 폐쇄성을 보여줬다.

제주도민은 자발적인 저항을 조직화했고 1947년 3.1운동 기념행사 때 저질러진 경찰의 폭력적 행위는 그 기폭제가 되었다. 미군정은 “공산주의자”에게 “폭동”의 책임을 전가시키고 “질서 회복”을 위한 군·경·우익단체의 극단적인 폭력을 묵인했다. 민간인에 대한 불법 감금과 살인, 방화, 계엄령 발동이 합법으로 둔갑해 행사되고 있었다. 폐쇄된 섬에서 토끼몰이 당한 도민들은 산으로, 동굴로 깊이 피신했지만 “빨갱이” 혹은 “게릴라”로 지목되어 “적”이 되었다. 

1948년 4월부터 1949년 4월까지 최소 1만6000여 명에서 최대 3만여 명 이상의 도민이 토벌대의 학살을 당했다. 깊은 산에서 하산하지 못한 사람들, 섬 밖으로 탈출하고자 밀항자가 된 사람들, 강제 이주되거나 육지의 여러 형무소에서 이슬처럼 사라진 사람과 불법 군사재판을 받은 수형자들까지, 제주도민들은 해체된 가족의 경험과 집단적 트라우마, ‘빨갱이’ 자식 혹은 집안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었다. 

1950년 남북한의 전면전이 발발하자 미군 문서에서 제주의 “공산주의자”라는 단어가 재소환되었다. 한국정부나 미군의 시선은 2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고 어김없이 도민을 ‘공산주의자’라고 지칭했다.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이 팔에 ‘반공’이라는 글자를 새겼다(RG 111-C, National Archives 2). 제공=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1.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하면서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위 문장은 1950년 12월 26일 부산의 제2병참사령부 정보참모부 소속 윌리엄 해커가 제주도에서 방첩활동 및 공산주의 활동을 파악하고 귀환한 보고서에 언급한 내용이다. 그는 제주도에 10만 명의 전쟁포로수용소를 설치하기 위해 입지조사차 출장한 팀의 한 명이었다. 주로 한라산을 비롯한 제주지역 내 “게릴라”의 활동이나 피난민들 사이의 “불순분자 단속” 정보를 수집해 보고하는 임무였다. 해커는 보고서에서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는데 방점을 찍고 있다. 그의 보고 내용만 보면 사전 정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정보장교가 제주도에 방문하기 전, 전쟁 발발 2년 전에 제주도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수많은 민간인이 얼마나 학살되었는지, 전쟁 직후 예비검속과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를 탐독하지 않았다면 앞의 문장이 나오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아래 글에서는 제2병참사령부 정보참모부가 한국전쟁 초기 4.3과 제주도를 보는 극단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1948년 후반 공산주의자들은 그 섬에서 상당한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이 곧 정부를 장악할 것으로 느껴졌다. 마을 습격, 식량 약탈, 그리고 공산주의 분자에 의한 섬 전체의 소동이 계속되었다. 이 때 한국정부는 일종의 질서를 회복하고 가능하면 공산군을 무력화하기 위해 국군을 제주도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수개월 동안(1948년 후반과 1949년 초반) 폭동과, 공산군과 한국군 사이의 전투에서 약 1만6000명이 사망했다.”(1950. 12. 30, 제2병참사령부 정보참모).

G-2에서 언급한 보고서에는 ‘공산주의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인 설명조차 없다. 그리고 1948년 후반부터 1949년 초반까지 1만6000명이 사망했다고 적고 있지만 구체적인 희생자에 대한 정보가 없다. 사건의 주동자를 ‘공산주의자’ 혹은 ‘공산군’이라고 지적하지만 그 주체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4.3에 대한 연구와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에 의하면 1만6000명은 제주도 각지에서 군경에 희생된 주민이 대다수였다. 이처럼 미군은 희생된 주민의 실체를 회피하고 명확히 적시하지 않고 있다. 최근 4.3수형자들에 대한 군사재판과 집단학살 사건이 불법적인 것으로 진실규명되었다.

1950년 12월 30일 정보(G-2)와 작전(G-3)참모부에서 작성한 제주 4.3 관련 문서(RG 554, A1 1450, Box 67, CHEJ DO, 1950, National Archives 2). 제공=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반공주의의 내재

  #2. “유엔민간원조사령부(CAC) 제주도팀의 모든 직원들은 사기가 매우 높아 보였고 뛰어난 일을 하고 있었다.”

둘째 문장은 1951년 2월 7-8일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의 인사·보급참모와 공병·병참·통신·심리전부 장교들이 총출동해 같은 조직의 제주도팀을 시찰하고 월터 헨지 주니어(Walter R. Hensey, Jr) 대령이 호즈(H.I. Hodes) 소장에게 보낸 보고서 말미에 등장하는 글이다. 1951년 3월 1일 제주도에 임시 수용된 900명의 전쟁고아와 5만5000명의 피난민은 미군과 유엔의 원조를 통해 공산주의로부터 벗어나 구원을 받는 ‘반공 인도주의 신화’의 조연이었다. 제주도팀은 피난민 구호 외에도 제주도의 행정, 치안의 유지 및 통제, 전염병 및 예방, 노동 및 사회분야까지 포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3. “제주시에 악질 중공군 포로, 서귀포 모슬포에 반공 중공포로”

셋째 문장은 한국전쟁에서 지금에 이르는 반공서사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의 수식어다. ‘악질’ 혹은 “악질분자”는 사전적 의미에서 못된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사람이거나 나쁘거나 못된 짓을 하여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사람을 일컫는다. ‘악질’과 ‘반공’은 전쟁 이후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특정 집단의 구별짓기나 사상적 판단에 즐겨 사용된 단어다. ‘악질’은 같은 공동체 내의 특정 인물을 지목해 분리 또는 격리하는데 작동되었다. 

한국전쟁 71년 동안 두 단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용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배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 것인가. 1952년 4월과 6월 제주 용담2동 제주국제공항, 모슬포 하모리 일대 중국인민지원군 송환 미송환 포로가 미군 상륙주정을 타고 와 내렸다. 포로들은 제주도에 이송되기 전까지 송환과 미송환으로 분류되어 사상 전향 차원의 재교육, 송환 유무에 따른 심리전 등 다양한 사건들을 경험한 상태였다. 두 수용소에서 생활한 포로들은 각자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조직을 갖추었고 그 과정에서 살인과 자살, 회유 및 협박 등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다.

1950년 제주도 지도. 1950년 12월 제2병참사령부 정보 참모부의 제주도 보고서에 첨부된 제주도 지도. 이 지도는 기존 일본군 지도를 바탕으로 194-45년 사이 미공군에서 촬영한 항공사진과 비교해 다시 미 육군지도창에서 제작한 것이다(RG 554, A1 1450, Box 67, CHEJ DO, 1950, National Archives 2). 제공=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제주도, 평화유산의 길

한국전쟁기 제주도에서 일어난 피난민, 중국인민지원군 포로, 1육군훈련소와 한라산 일대의 토벌대 활동을 기존에 진행되어 온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국 자료와 사진 등을 종합해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에서 제주도민들의 삶은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한국사회에서 제주도의 냉전유산이 어떤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평화유산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없는지를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CHEJ-DO, 1950, RG 554, Entry A1 1450, Box 5, National Archives 2 
Far East Pacific Branch Office of Reports and Estimates, Intelligence Higrlights No. 43, 9 March – 15 March 1949, CIA

# 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 한국현대사를 전공했고, 연구 관심 영역은 근·현대 민간인 학살과 다양한 수용소, 군의 민간인의 통제, 동아시아의 군사기지 및 스파이전,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 냉전시기 사상심리전으로 각국에서 조사·수집을 통해 아카이브 및 컨텐츠 생산에 몰두하고 있다.

주요 논문은 「한국전쟁 포로와 사진: ‘동양공산주의자’ 인종 프레임과 폭력성 재현」(이화연구, 2018)과 「수용소에 갇힌 귀환용사-‘지옥도’ 용초도의 귀환군 집결소와 사상심리전」(역사비평, 2018) 다수 있으며, 저서는 『열전 속 냉전, 냉전 속 열전 : 냉전 아시아의 사상심리전』(진인진, 2017), 『한국전쟁과 분단의 트라우마』(선인, 201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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