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74) 그곳에서 멈추자 / 이경임

흐르다 멈춰보니 여기. ⓒ김연미
흐르다 멈춰보니 여기. ⓒ김연미

수성에서는 좀처럼 해가 지지 않는 다지
해가 뜨고 지는 데 두 해가 걸린다는 곳
사랑도 지지 않을 수 있는 그 별에 닿기로 하자

우리는 찬란히 떠오르는 해를 보며
오로라처럼 몽유적인 사랑을 시작하고
어둡고 쓸쓸해진 골목길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폭풍우 치는 밤이 없는 별의 언덕에 서서
죽도록 사랑한 기억들만 남겨두자
마침내 어두운 밤이 무덤처럼 걸어오고, 

태양을 찾아서 잡았던 손 그만 놓치면
사랑은 해 뜨는 그곳 수성에서 멈추자
지구의 밤하늘 위에 다만 머물러 빛나게 하자

-이경임, <그곳에서 멈추자> 전문-

어느 곳에서 멈춰야 할 것인가. 한라산 중턱 계곡, 커다란 바위에 태반을 묻은 나는, 떨어져 나온 것들의 숙명, 그 흐름의 숙명을 받들어 여지껏 흘러 왔는데... 모난 구석 다 뭉글어지고 꿈의 부피도 작아져 재잘재잘 작은 발걸음만 남은 지금, 어디서 멈춰야 할 것인가. 

관성처럼 남은 발걸음 다시 옮기려다 주변을 둘러본다. 경사도 제로인 상태에서 찾아드는 평화. 현재진행형 고요가 내려앉은 하천의 끝에서 우리는 머물 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래 이쯤에서 멈춰도 되지 않을까...

밤이 내려오기 시작한 해변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하천에서 흘러온 모래가 바다를 만나 자릴 잡았다. 억지 부리지 않고 먼저 온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인 곡선이 아름답다. 흐르다 멈춘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웠던 것일까. 이만큼 흘러와 보고서야 매순간이 다 아름다웠던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고...

수평선에 걸린 집어등 불빛이 밤을 끌어당기고 있다. ‘어둡고 쓸쓸해진 골목길’이 ‘무덤처럼 걸어오고’ 그 걸음 뒤편으로 내가 흘러온 길이 보인다. ‘사랑도 지지 않을 수 있는 그 별’은 언제쯤 내려오는 것일까.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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