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립무용단 기획공연 ‘P.A.D.O’

지난 26일 제주도문예회관에서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제주도립무용단의 기획공연 ‘P.A.D.O(파도)’는 안무자가 아닌 일반 단원들이 만든 작품을 선보였다. 1990년 도립무용단 창단공연 ‘생불화’ 부터 지난해 53회 정기공연 ‘이어도사나’까지 도립무용단의 주된 활동은, 대표 격인 예술감독 혹은 안무자가 공연의 밑그림을 그리고 나머지 단원들이 출연진으로서 완성하는 방식으로 이어져왔다. 단원들이 각자 안무자로서 제작하는 기회는 31년 무용단 역사에서 사실상 처음이다.

6월과 8월, 두 번으로 계획한 파도의 첫 번째는 김혜령, 이승현, 김제인, 현혜연 단원이 준비했다. 네 사람 모두 입단 5년 이하인 ‘젊은 피’ 답게 다양성이란 매력을 한껏 품고 관객들에게 다가섰다. 그 다양성은 작품 내용부터 구성, 나아가 무용단의 잠재력까지 포함한다.

ⓒ제주의소리
제주도립무용단은 26일 기획 공연 'P.A.D.O'를 열었다. ⓒ제주의소리

# 김혜령 ‘HUNGER’

HUNGER는 굶주림, 갈망 등을 상징하는 용어다. 김혜령은 이번 작품에서 색의 변화를 주된 장치로 활용하며 “서로 다른 우리가 마주했을 때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기는 관계에 주목했다.

가로 긴 탁자 양쪽 끝에 앉은 남녀. 작품은 조명, 탁자, 의자, 남녀 무용수 두 사람의 복장까지 흰색으로 설정돼 있다. 다가가는 남자, 밀치는 여자, 튕기듯 멀어지는 남녀. 그리고 앞뒤를 다르게 보여주는 동작은 두 사람이 갈등과 긴장감 속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다 손에 든 술병에서 무언가가 쏟아지며 서로의 흰 옷이 붉게 물들자 남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정중하게 마주보며 인사하고 격렬한 춤사위와 함께 서로를 강하게 껴안는다. 그러다 붉은 조명은 다시 하얗게 돌아오고 처음과 달리 갈라진 탁자에서 남자는 또 다른 남자와 마주 앉고, 외톨이가 된 여자는 한자리를 맴도는 동작으로 작품은 끝난다.

HUNGER는 서로를 갈망하며 동시에 상처 주는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남녀 두 사람이라는 설정은 감정을 더욱 짙게 만든다. 과감하게 탁자 위아래를 오가는 동선, 거친 숨소리를 연상케 하는 효과음 등은 무대를 보다 집중시킨다. 마지막 새로운 남자 무용수가 차분히 걸어와 남자와 마주앉는 설정은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다. 

지난해 3월 무용단에 들어온 신입 단원 김혜령은 “상처의 흔적은 냄새와 같다”며 “불특정한 냄새가 가득 차 있는 이곳에서, 나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에게 사죄와 위로를 표하며, 또 다른 이들에게는 자신을 바라볼 기회의 시간이 됐으면 한다”고 안무 의도를 남겼다. 예술가들의 첫 창작 소재는 자기 이야기라고 흔히들 말한다. 김혜령 역시 이번 작품을 통해 “나에게선 지금 무슨 냄새가 나고 있는지, 사람들은 나에게서 어떤 냄새를 맡는지” 관객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이승현 ‘인간연습’

‘인간연습’은 공통된 동작과 자유분방함이 대비되는 안무, 마이크와 복장이라는 상징적인 장치 등으로 흥미로운 서사 구조를 빚어낸다. 공연은 시작과 함께 무대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사과를 베어 무는 도발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내 강렬한 비트와 베이스가 조합된 음악을 배경으로 무용수들이 군무를 펼친다. 허리를 숙인 낮은 자세와 팔을 안팎으로 흔드는 동작, 그리고 작업복 같은 복장은 자연스레 집단적 사고·행태로 연결된다. 그런 구조 안에서 유일하게 다른 모습으로 다르게 행동하는 존재는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집단 중의 하나가 마이크를 들고 ‘그 존재’와 조우한다. 그는 무언가를 간절하게 말하고 싶지만, 상대는 손에 쥔 마이크로 행동을 좌지우지한다.

작품은 집단과 개인을 선명하게 대비시키면서, 집단적 행태의 부작용까지 뻗어간다. 양쪽 끝에서 흥겹게 춤을 추고 있지만, 동시에 뒤쪽에서는 사람들이 끌리고 들려서 시체처럼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어느새 춤추는 사람까지 잡아서 더미에 던진다. 

홀로 동떨어진 주인공이 마이크를 들고 퇴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무용수들과 동일한 복장을 갖추고 등장한다. 긴 마이크 거치대는 눈에 띌 만큼 짧아졌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누군가를 의존해야만 했던 존재는, 한결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마이크를 내민다. 

작품을 만든 이승현은 안무 의도에서 “내가 지금 하는 이 행동의 전부는 타의인가? 자의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인간연습’은 타의와 자의 사이에서 판단을 내리는 과정으로 해석되는 동시에, 개인과 자유 대신 집단과 통제를 우선시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적인 세계관도 연상케 한다. 집단의 일원으로 변한 개인에 대한 해석도 여러가지로 가능해보인다.

한쪽은 군무, 한쪽은 팝핀을 비롯해 자유분방한 춤을 선보이는 상반된 안무 연출, ‘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마이크 소품과 목소리, 보다 많은 의도를 담은 조명 등은 안무자의 구상을 뒷받침한다.

# 김제인 ‘웡이자랑’

김제인의 ‘웡이자랑’은 “굴곡진 제주의 근·현대사를 모티브로 작품을 창작해 역사의 망각을 경계하고 작품을 통한 치유의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상복 차림의 두 사람이 등장하고 청아한 듯 고독한 경쇠 소리가 공연장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4.3 생존자들의 증언이 관객들에게 전달되고, 머리를 민 상복 차림의 다른 한 남성이 홀로 남아 망자를 위한 춤사위를 펼친다. 

작품은 무용수의 안무와 함께 한승석·정재일이 2017년 발표한 노래 ‘情으로 지은 세상’을 비중 있게 사용한다. 안무는 노래가 품은 메시지를 충실히 반영한다. 

탐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 어리석은 마음 자라나지 아니하고 / 천하느니 귀하느니 / 차별함이 전혀 없이 / 선하고 고운 말만 오가고 / 서로 보게 됨에 즐거워하는 세상 

권세 없는 평등 세상 / 눈물처럼 순수한 세상 / 내가 그리는 어떤 세상이 있어 / 우리들 마음속에 늘 품고 사는 세상 / 이 나라 이 땅 머물다 간 / 다정했던 이들 지으려 애쓰던 세상

- ‘情으로 지은 세상’ 가운데

무대 곳곳을 누비며 온몸으로 감정을 분출하고, 때로는 가만히 우뚝 서서 합장한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는 정적인 동작을 통해, 제주 섬이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권세 없는 평등 세상, 눈물처럼 순수한 세상”으로 나아가길 몸의 언어로 고한다.  

작품에서는 물허벅을 여럿 등장시키는데 과거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무용수가 물허벅을 등에 지고 가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 나라 이 땅 머물다 간 다정했던 이들 지으려 애쓰던 세상”을 후세들이 이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도 함께 전달한다. 안무를 만들고 직접 출연한 김제인은 무대 위에서 물허벅을 굴렸는데,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절묘하게 돌아 안착하는 솜씨로 눈길을 끌었다.

‘웡이자랑’은 전체 구성으로 볼 때 고난과 아픔보다는 기대와 희망에 방점을 찍었다. 앞서 언급했듯 노래를 안무로 구현하는 데 공을 들였기에 희망찬 노래 성격에 맞게 구성하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다만, 김제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독으로 누비며 뿜어내는 기운은 작품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이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과거의 이야기를 마주보며, 지워진 세월의 흔적들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 우리가 절대로 잊어선 안될 과거를 기억하고자 한다”는 그의 바람은 혼신을 다한 몸짓과 온몸에 흐른 땀방울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 현혜연 ‘심혼's’

제목 ‘심혼(心魂)’에 대해 현혜연은 스위스 심리학자 칼 융의 말을 빌려 “우리는 심혼을 포용할 줄 알아야 인간으로서 성숙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작품은 “내면 깊숙한 곳의 나”를 표현하기 위해 부채라는 소품을 들고 왔다. 무용수 7명은 모두 여자로 검은색 상의, 베이지색 긴 치마를 갖췄다. 접었다 펼치는 부채와 치마 디자인을 맞추고, 출연진 몸집도 엇비슷해 통일성을 부각한다.

초반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한 쌍처럼 움직이는 2인 안무는 내 안의 다른 ‘나’를 상징하는 듯하다. 중반부터는 역동적인 안무들이 쉴 틈 없이 몰아친다. 부채는 무기가 되고 짐승의 얼굴과 꼬리로 변한다. 여기에 한국무용과 서양무용을 오가며 부채는 가지각색 장르에 쓰인다. 국악과 재즈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 개성 충만한 음악, 뮤지션 ‘Korean Gipsy 상자루’의 대표곡 ‘경북 스윙’은 역동성을 배가시킨다. 

작품은 부채 하나로 다양하게 표현이 가능한 만큼, 내 안의 여러 내면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포용하자고 말하는 것일까. 굳이 복잡하게 해석하지 않아도, ‘심혼's’는 다채로운 매력으로 무용의 즐거움을 선사하며 관객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유쾌하면서 영리한 인상 깊은 무대였다.

도립무용단 파도는 이처럼 안무·음악 등 표현의 다양성, 주제의 다양성, 단원들의 예술 다양성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특히 조명 활용이 기억에 남는다.) 예술로서의 제주다움이 어느 특정한 장르나 표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볼 때, 26년차부터 대선배부터 2년차 막내까지 단원들이 골고루 보여주는 창작 무대는 개개인의 역량은 물론, 도립무용단 전체의 잠재력을 한층 키워주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 '제주도립무용단'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무대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지만, 서서히 젊은 인재들이 채워지는 만큼 무용단의 방향 역시 변화의 흐름과 무관해서는 안될 것이다.  

애초 파도는 최대한 많은 단원이 참여할 수 있게 월 1회 이상 정기 개최할 방침이었지만, 코로나19 등으로 두 차례로 계획한 상태다. 직위에 관계없이 단원 개개인이 창작자로 나서는 기회는 장기적으로 무용단뿐만 아니라 교향악단, 합창단, 관악단 등 다른 도립예술단에게도 적지 않은 자극이 될 것이다.

다만, 이런 창작 열의를 예술 행정이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제주도 문화예술진흥원은 공연 3일 전인 23일에야 홍보용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자료 내용도 부실했다. 행정 행위를 시민들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알린다는 보도자료 활용법에 비춰 봐도, 진흥원의 파도 보도자료는 간단한 6하원칙으로 정리하는 데 그친다. 행정이 주최하는 다른 공연 자료들과 비교할 필요도 없이, 간단한 진흥원 홈페이지 주소마저 틀리게 적어놓으면서 무성의한 태도로 보일까 우려되는 정도다. 통상 공연 예매는 홍보 활동 시작에 맞춰서 진행하는데, '파도'는 보도자료 배포 이전부터 예매를 열어놨다. 공연 소식이 알려진 23일에는 이미 1층 전체는 마감됐고 2층 좌석까지 대부분 차면서 기대한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도립무용단이 일찌감치 홍보를 요청했음에도 진흥원은 공연 3일 전에, 그것도 부실한 보도자료로 배포했다는 데 있다. 설상가상 무용단 운영과 관련해 진흥원 안팎으로 여러 잡음이 나온다는 걱정 어린 시선도 제기된다.

예술가는 창작에 집중하고, 예술 행정은 원활한 창작과 함께 결과물이 온전히 향유자들에게 전달되도록 지원·보조에만 신경 써야 한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라’를 김대중 대통령의 예술 정책 철학을 새삼 떠올려본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