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04) 지그문트 바우만, ‘리퀴드 러브’ , 권태우, 조형준 역, 새물결, 2013

지그문트 바우만, ‘리퀴드 러브’ , 권태우, 조형준 역, 새물결, 2013. 출처=알라딘.

1. 불안한 삶과 사랑하기의 어려움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급기야 나라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정부의 출산장려 정책에도 불구하고 출산율은 더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출산율이 오르지 않는 이유는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소식을 들은 나같은 ‘꼰대’들은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 진다. 우리 때는 가진 것 하나 없이 연탄불 때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해도 행복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물질적인 조건을 따진다고 말이다. 이런 낭만적인 푸념은 그때는 사회적으로 부양해야 할 노년층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은 물질적인 조건을 따지지 않으면 당장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 데서 나온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지속적인 의무와 책임을 지겠다는 결심을 포함한다. 이것은 꼭 사람에 대해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일이 유행처럼 번져나가도, ‘나만 고양이 없어’를 외치는 ‘랜선 집사’들이 많아지는 이유는 나의 삶이 다른 존재의 삶을 돌볼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한 연예인이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정자은행을 통해 아이를 출산하여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그런 행위가 바람직한가의 여부를 두고 인터넷 상에서 논쟁 아닌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의 행위가 자신이 평생 사랑할 대상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그 대상에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보여주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 과정에는 많은 것이 생략되었다. 지금까지 보통의 사람들이 아이를 얻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관계가 그것이다. 연애를 하면서 치러야 하는 감정의 소모, 상대에 대한 배려와 헌신, 배우자와 연관된 식구들과 맺어지는 새로운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 등은 모두 생략된 채 자신이 원하는 아이의 피부색을 고르고 기타 유전적인 조건을 고려하여 마침내 비교적 손쉽게 원하는 대상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훈련받았다. 내가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어떤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나로서는 다른 선택을 할 이유는 없다. 잠재적인 데이트 폭력과 가부장제적인 억압의 위험성을 제거한 채, 원하는 결과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면 그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 셈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단지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데에 있다. 

불안한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과제가 된 오늘날의 ‘소비자 사회’에서 사랑이라고 해서 합리적인 선택의 예외 조항이 될 수는 없다. 삶이 불안정할수록 사람들은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자 할 것이다. 지속적인 인간관계는 불확실성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있다. 합리적인 소비자는 자신이 지불한 대가에 합당한 만큼의 것만을 원한다. ‘혼밥’, ‘혼영’이 늘어나는 이유는 불확실성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가는 식당의 주인이 사적인 질문을 던지며 친근감을 표하기 시작하면 그는 조용히 다른 식당을 찾는다.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 역시 불필요한 위험성을 배제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언제라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상대를 찾을 수 있다면, 그런 방식을 외면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데이팅 앱은 관계 맺기에 실패하더라도 그 즉시 또 다른 관계를 ‘구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한 오늘날 가장 안전한 사랑은 관계의 위험성을 최소화한 ‘인스턴트’ 사랑이다. 

이런 ‘유동하는’ 사랑의 형태를 쿨(cool)하다고 긍정하면 꼰대 소리를 듣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쿨한 것이 사태를 더 낫게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헌신, 책임과 의무 등을 사랑의 불필요한 대가로 생각하는 한 불안감이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증폭될 것이 뻔하다. 사랑은 합리적으로 선택 가능한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소비자 사회의 불안을 없앨 대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불안은 사랑을 인스턴트화하고 그런 사랑은 불안을 증폭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2. 사랑의 공동체는 가능할까?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권태우, 조형준 역, 새물결, 2013)는 고독과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삶에 대한 바우만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생산자 중심의 사회가 아닌 ‘소비자 사회’라고 규정하고, 즉각적인 소비 욕구에 의해 상품이 소비되고 없어지는 양태가 삶의 방식처럼 되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를 ‘유동하는 근대’라고 불렀다.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소비자 사회의 소비자들은 자유를 약속하는 소비 사회의 환상을 좇으며 부유하는 인간들로서 온 힘을 다해 소비자 사회의 주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소비할 자유만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늘 소비 사회의 벽 밖으로 추방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릴 뿐 결코 자유로운 삶에 도달할 수 없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소비자 사회에서 사랑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바우만은 사랑이 소비의 대상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소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 소비하고 싶어 하는 바람을 욕망이라고 부른다면, 사랑은 욕망과는 구별된다. 욕망은 대상에서 타자성을 제거하지만, 사랑은 돌봄의 대상을 보존하고 싶어 한다. 바우만은 사랑이 욕망과 달리 세상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자아는 사랑의 대상에게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확대된다”(47쪽)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사랑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비자 사회의 마케팅 기술은 소비를 위한 욕망의 속도를 가공할 정도로 단축시켰다. 오늘날 소비자들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원해서’ 산다. 예전의 소비자들이 오랫동안 월급을 모아서 명품 백을 구입함으로써 오래 가꾸어온 욕망을 실현했다면, 지금은 그런 시간을 참을 수 없는 시간으로 간주한다(혹은 간주하도록 장려한다). 원하면 즉각 지르는 것이 쿨한 소비형태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소비자 사회는 사랑의 대상도 즉각 지를 것을 요구한다: “다른 소비재와 마찬가지로 파트너 관계 또한 즉석 소비와 ‘선입견 없는’, 일회성 사용을 지향한다. 무엇보다 말끔하게 처분해버리는 것이 가능하다.”(53-54쪽)

사랑을 소비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의 결과는 사랑과 재생산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소비 대상은 소비자의 필요나 욕구, 소망을 위해 사용되며,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부모들이 아이들을 원하는 것은 “즐거움이나 기쁨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113쪽) 바우만은 오늘날 아이가 “소비자에게 평생 구입하는 것 중 최고가 구입품 중의 하나”(114쪽)이며, 측정과 계산 불가능한 비용을 감수하는 것으로서, 아이를 가짐으로써 가족을 이루는 일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바다로 무턱대고 뛰어드는 것”(115쪽)과 같다고 언급한다. 아이를 갖는 것 자체가 신중한 소비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바우만은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개체화된 오늘날 “장기간에 걸친 헌신이 드물고, 장기간 사귀는 일은 거의 기대할 수 없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든’ 서로 돕기로 하는 의무 따위는 현실적이지도 또 굳이 그럴 가치도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163쪽)고 지적한다. 인간관계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을 바우만은 “소비자주의적 시장 경제의 힘이 도덕 경제의 기지인 코뮤니타스를 침입해서 식민지화한 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사는 것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위험을 구성”(179쪽)하고 있는 데서 찾고 있다. 

바우만의 대안은 시장의 공격을 견뎌내고 인간의 연대를 지켜내는 것이다. 바우만은 인간의 연대를 지켜내야 한다는 당위적인 주장을 위해 ‘참된 인간성’이라는 다소 고루한 개념을 다시 불러낸다. 

“인간의 삶에서 가치 있는 것이란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단 한 가지 가치를 살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상이한 교환권일 뿐이다. 다른 인간 존재 속에 들어 있는 인간성을 죽이고 생존하려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인간성을 죽이고 살아남으려는 것이다.”(195쪽)

이런 주장은 물화된 세계 속에서 인간성이 소외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고전적 주장에 대한 바우만의 재서술로 보인다. 바우만은 스스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공허한 주장임을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그래도 시도해야 한다”(197쪽)고 주장한다. 

바우만의 이 책은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호모 사케르의 출현, 즉 자신의 영토에서 추방되어 이리저리 떠돌지만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난민의 문제를 다루면서 ‘유동적인 사랑’의 사태가 인류의 연대가 해체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면서 마무리되고 있다. 현 사태에 대한 바우만의 암울한 진단은 “글로벌한 문제에 대한 지역적 해법은 없다”(297쪽)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출산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이유는 아마도 소비자 사회의 유동성이 어느 사회보다 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장 경제의 식민화에 맞서서 사랑을 소비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상대의 고유한 가치를 존중하며, 지속적인 신뢰의 관계를 맺자는 주장이 현실성이 없는 말로 들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자신이 뼛속 깊이 소비자 사회의 규범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이유선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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