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과 고아의 섬, 그리고 구호의 이름으로 미국이 오다 
피난민과 고아의 섬, 그리고 구호의 이름으로 미국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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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제주-평화를 긷다] ②구호물자 놓고 제주도민과 피난민 사이 분쟁도
한국전쟁 제71주년.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전쟁기의 제주도는 어떤 역사로 기록되고 있을까. 4.3과 예비검속, 그리고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의 참혹한 현장이나 희생자들이 해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1950년 6월25일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 육지에서 밀려온 수많은 피난민, 급박한 전시상황에서 설치된 육군훈련소, 중국인민지원군 전쟁포로수용소의 설치, 미군 비행장으로 조성된 알뜨르비행장(모슬포)과 정뜨르비행장(용담). 거기에다 끝나지 않은 4.3의 비극은 한라산 등지에서의 무자비한 토벌작전으로 무고한 목숨들이 주검으로 쌓여갔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지난해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에 이어 올해 71주년을 맞아 [한국전쟁과 제주-평화를 긷다] 기획을 다시 연재한다. 냉전시각에서 고착화된 한국전쟁기 제주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은 이제 평화유산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기억하는 작업이다. 제주가 ‘박제화된 평화의 섬’이 아니라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를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를 이끄는 진정한 평화의 섬이 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 편집자 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도는 피난민과 포로수용소, 군사훈련장이라는 후방의 역할을 담당했다. 전국 각지로부터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전쟁 20일 만인 7월 16일부터 제주・한림・성산・화순항을 통해 1만여 명이 들어왔다. 1951년 1‧4후퇴 직후 북한 주민들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피난민이 제주로 왔다. 피난민 수는 1951년 1월 3일까지 16,000여 명에 불과했으나, 1월 15일에는 87,000여 명, 5월 20일에는 무려 148,000여 명에 이르러 제주도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 적도 있었다. UNCACK 제주팀의 조사에 따르면 이후 1951년 중반 정전협정이 시작되고 전선이 고착화됨에 따라 피난민의 유입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3만 명 전후를 유지했다.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ited Nations Civil Assistance Command, Korea, UNCACK)는 한국전쟁기 민사업무를 담당했다. UNCACK는 전쟁 초기 유엔 보건복지파견대로부터 시작되어 북한점령 시기에 점령지 민사행정을 위한 종합기구로서 창설되었다. 사령부와 각 지역별 팀으로 이루어진 UNCACK는 1950년 11월부터 기획과 민사행정 업무를 시작했다. UNCACK 자료는 기본적으로 지역팀의 보고 형식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중앙의 지방 장악 과정과 지역 정치의 주요사항, 경찰활동, 지방행정의 특이사항, 사법, 인구 변동 같은 지역 정치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지역팀 보고서는 피난민 통계나 각 도별, 시군별 이동상황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 제주도팀 1951년 1월 19일 보고서.

UNCACK 제주팀도 1951년 초부터 제주에서 구호 체계를 세우고 감독하면서 활동했다. 전쟁 초기 UNCACK의 가장 큰 관심사는 피난민 문제였다. 육지로부터 이송된 피난민은 주로 집단 수용되었고 제주읍에 가장 많은 인원이 거주했다. 1951년 4월에는 북제주군 52,197명, 남제주군 12,209명으로 총 64,606명이 피난민이 거주했지만 그 가운데 42,409명이 제주읍에 모여 있었다. 이는 처음 하선이 제주읍에서 이루어지고 무장대의 공격에 대해 상대적으로 제주읍이 안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난민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주택난이 가중되었고 식량을 비롯한 구호물자의 부족, 식수난으로 인해 제주는 포화 상태였다. 집단 거주에 따라 각 피난민수용소에서 천연두 환자가 대대적으로 발생하여 방역대책도 절실히 요구되었다. 1951년 1월 15,007명의 섬 주민들이 구호물자의 수령자들이었고, 3만여 명의 훈련병들이 지역 경제에 완전히 의존해서 살고 있다고 UNCACK 제주팀은 파악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제주도 포로수용소의 중공군 포로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기록영화.


효율적인 피난민 구호를 위해 1951년 4월 ‘제주도 피난민 구호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위원회는 김충희 도지사, 최승만 사회부 제주도 분실장, 민간인 대표 이효빈 목사 등 6명과 UNCACK 제주팀 대표자로 구성되었다. 구호위원회의 주요 활동은 식량을 비롯한 구호물자 배급과 주택 건설, 그리고 방역과 위생이었다. 

피난민과 더불어 고아, 군인훈련병, 포로들이 제주로 이송되어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1950년 12월 27일 미군목 브라이젤과 헤스 미공군 대령이 UN군 사령부로부터 수송기 7대로 16편에 걸쳐 서울 거리에서 방황하는 전쟁고아 1천여 명을 제주로 수송했다. 이들은 제주농업학교의 천막과 교실에 연령별로 수용되었고 사무실, 의무실, 창고, 취사장 등을 임시로 마련했다. 51년 4월, 이들을 보육하기 위해 제주농업학교 운동장에 한국보육원이 설립되었다. 1951년에 한국보육원, 52년에 제주모자원, 53년에 송죽보육원 등 도내 보육원 9개소, 모자원 1개소에 수용인원은 1천4백여 명이 넘었다.

특히 피난민의 유입으로 제주사회는 구호물자를 둘러싸고 제주도민과 피난민 사이에 잦은 분쟁이 발생했다. 피난민들은 1951년 6월 피난민협회를 결성하여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했다.  교회 조직의 일원이기도 한 피난민 대표들은 피난민들을 거제도로 이동하도록 허용해주고 수송해줄 것을 UNCACK 제주팀에게 요구했다. 이유는 거제도가 구호 할당량이 더 많고 구호물자를 더 잘 입수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거제도가 육지에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구호물자를 둘러싼 과정에서 제주도민과의 갈등을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 1953년 2월 10일에 있었던 소위 ‘피난민 설화사건’이다. 1952년 2월 10일 관덕정 광장에서 개최된 피난민대회에서 구호식량대책을 등을 논의하다가 피난민 설화사건이 발생했다. 이 날 피난민 김명수는 2천여 명의 피난민 앞에서 제주도 도의회의장의 민정 시찰 보고내용은 사상이 의심되고, 행정기관은 피난민들에게 여러 가지로 차별대우를 하고 있다면서 “우리를 육지부로 실어다 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도록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에 건의하자”고 말했다. 

이 발언은 도민을 협박하는 망발이다는 요지의 성명서가 발표되고, 도민의 분노와 파문이 커지자 경찰은 13일에 발언자 김명수를 구속했다. 조사 결과 문제의 발언은 개인의 의사일 뿐 피난민 전체의 견해가 아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제주도와 외지인이라 이질적인 두 세력 간의 불신과 갈등이 있었다. 

한국전쟁기 제주에서의 구호 활동은 구호위원회를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유엔민간원조사령부 제주팀의 자문과 감독 속에서 진행되었다. 제주도에 분배된 구호물자는 UNCACK 제주팀이 참여하는 도 구호위원회의 결정을 거쳐 군으로 분배되었다. 군에서도 마찬가지로 읍-면-리로 분배되었다. 구호물자 관리와 구호 대상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은 UNCACK의 주요한 업무였다. UNCACK의 위상이 관리감독자였지만 긴급 구호문자를 거의 미국에 의존하는 전시 상황에서 UNCACK의 영향력은 클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UNCACK 전시 구호물자 배급 목표는 구호물자의 효율적인 배급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UNCACK에게 구호물자 분배는 대중과 ‘시혜와 수혜’의 관계를, 담당 공무원들과 ‘관리 감독과 수행’의 관계를 수립하는 계기였다. 이는 제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항공기가 지난 12월 공산주의자들이 서울로 오기 전에 우리를 여기로 데려다주었다. 마미는 적들을 피해 다른 14개의 조그만 고아원들도 이 섬으로 옮겨왔다. 유엔은 제주도를 ‘작은 고아의 섬(Little Orphan Island)’라고 부른다. 하루는 마미가 우리에게 유엔의 많은 나라로부터 온 사람들을, 우리와 집으로부터 쫓겨난 수백만의 한국인들을 도우려고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미는 그 사람은 유엔민간원조사령부 직원라고 했고, 함께 시 위원회를 방문했다. 유엔민간원조사령부는 정부가 우리에게 쌀과 더운 의복을 가져오는 것 도와준다. 유엔구호품에 감사한다.
마미는 Care Packages가 미국 사람들로부터 온다고 했다. 미국에서 어린 소년들과 소녀로부터 선물이 온다. 매일 저녁 우리는 기도한다.” 


“신이 유엔을 축복하기를, 신이 미국을 축복하기를 그리고 신이 특히 CARE(미국대외원조물자발송 협회)를 축복하기를.”


- 1951년 11월, 한국고아원 원아 대표로 선출된 김창운이 UNCACK 제주팀 복지 담당자인 Ellis Rickey에게-

미 육군통신대원이 촬영한 고아원에서 기도하는 아이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기록영화

1951년 8월 16과 17일 이승만대통령은 제주를 방문하고 환영식에서, “방을 전재민에게 내놓아주고 그들을 구호해 가면서 지내는데 대해서는 외국 사람들까지 칭찬을 하고 있다. 이 도에서 국군을 양성하는 일을 시작한 이후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해서 자원해서 국군장병으로 나오는 고로, 외국 사람들이 동양에서 강병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감탄하는 고로 공산군이 백만이 있다 할지라도 염려가 없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라고 치하했다. 

1951년 11월 2일 이승만의 두 번째 제주 방문은 밴 플리트 8군사령관, 크리스트 UNCACK 사령관, 린 KMAG 사령관과 함께 이루어졌다. UNCACK 제주팀은 이승만의 두 번째 방문은, “제주는 ‘더 이상 잊혀진 지역이 아니다’라는 걸 제주도민에게 확신시켜주었다”고 평가했다.

제주는 4‧3 전후 기존의 사회와 권력관계가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공동체가 파괴되면서 도민의식이 크게 변화, 왜곡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난민수용소와 군사훈련장인 육군훈련소가 설치됨에 따라 전쟁의 후방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 변화는 가속화되었다 

특히 피난민의 유입은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제주도민과의 정치적・사회적 충돌을 가져왔다. 외적으로는 구호품을 둘러싼 갈등으로 표출됐지만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보는 일부 피난민의 인식은 제주도 지방 정치를 장악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이는 육지 출신 도지사와 지방법원장 임명으로 이어졌고 제주 지역 출신 엘리트들은 몰락해갔다. 전쟁은 평범한 제주도민에게는 군 입대와 학도병 지원을 통해 4‧3의 멍에를 벗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거듭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4‧3의 한 축이기도 했던 미국은 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의 구호활동을 통해 미국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갔다. 행정을 주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지역민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매체를 통해 미국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해나갔다. UNCACK를 통한 위생・방역과 구호물자 분배는 지방 관료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한편 제주도민에게는 시혜의 형태로 다가가면서 자비로운 미국이라는 상을 쌓아나갔다.

#양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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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전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전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며 제주4‧3과 한국전쟁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4‧3항쟁-저항과 아픔의 역사』(2008), 『전장과 사람들-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일상』(공저, 2010), 『전쟁 속의 또 다른 전쟁- 미군 문서로 본 한국전쟁과 학살』(공저, 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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