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호의 짧은 글, 긴 생각] 서른일곱 번째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깊은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제주시 서남쪽 해안지경 어승생악(1169m), 「아흔 아홉 골」. 크고 작은 골짜기가 마치 밭고랑처럼 뻗어 내린 기봉. 백에서 한 골이 모자란 「아흔 아홉 골」, 그래서인가, 제주에는 호랑이도 없고 왕(王)과 큰 인물도 안 나온다는 전설이 있다. 그 진실은 무엇인가? 그 한 골(谷)은 어디에 숨겨있을까? 한라의 정기가 서울과 미국에 출장(?) 중이었을까.

어승생 99골의 비밀 99+1=100, 골 하나는 ‘어디에’를 푼 세 사람이 고득종, 박충훈, 고광림 박사다. 한성부판윤(현서울특별시장) 고득종, 대통령권한대행 박충훈 박사, 미국 하버드 박사 고광림(가족이모두 하버드와 예일대 박사 13개로 박사학위의 왕 1920-1989 하귀 출신)미국코네티컷 주립대 교수. 세 명의 대인(大人)은 한양-일본-미국에서 공부했다. ‘사람은 낳으면 서울로, 말은 낳으면 제주로’란 말이 있다. 제주의 공부 환경과 사회적 인적네트워크가 열악함을 뜻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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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아흔아홉골 전경. ⓒ제주의소리

고득종高得宗: 1388(우왕14)~1460(세조6), 문신. 한성부 판윤을 역임, 효행이 뚜렷하였다. 자는 자부(子傅), 호는 영곡(靈谷), 남성 안의 오현단 바로 앞에서 살았다. 상호군 고봉지(高鳳智)의 아들로 조천읍 교래리에서 태어났다. 1412년(태종12) 2월 제주목사 윤림(尹臨)이 생원 고득종의 효행을 조정에 알리니 포상하도록 의정부가 승인하였다. 부친의 상을 만나 귀향, 1413년 효행으로 천거받아 음직(蔭職)으로 직장이 되고 이듬해에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고득종은 그는 제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정계에서 많은 견제도 받았지만 영주(英主)의 덕성 속에서 향토심을 발휘하고 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고려 말 제주는 원과 고려에 행정관할이 번갈아 교체되는가 하면 반란사건도 자주 발생, 제주민이 다소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목축 행정의 영향에서 오는 점이 많았다. 더욱 ‘제주말’이 원의 번식된 것이므로 그것이 명나라 소유가 되느냐, 이조의 소유가 되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도 야기되었다.

항상 제주말의 귀속 또는 조공문제가 중국사신의 입에 회자되어, 그 방편의 하나로 제주자제(濟州子弟) 제도를 실시하고 1428(세종10) 4월 10일까지 제주출신의 청년은 서울에 있는 ‘제주경제소(濟州京在所)’의 추천장에 의하여 문무관의 말직을 주었으며 이는 다시 목사(안무사)의 추천을 받도록 규정해 놓기도 했다. 제주자제는 말타기와 병법과 활쏘기 중 하나를 시험해서 합격하면 병조(兵曹)에서, 문장과 산술(算術)을 시험해서 합격하면 이조(吏曹)에서 채용했다. 이러한 제도는 고득종이 실시하였다.

당시 제주자제 출신으로 현관에 오른 자 중에 실록에 나오는 사람으로 예조참의 고득종, 사정司正에 고상심(高尙深), 예빈판관에 문방귀(文邦貴), 부사정 김비(金庇) 등이 있었다. 고득종은 예조참의(禮曺參議)와 한성판윤을 지내었고 종마사와 관압사(鐘馬使, 管押使)로서 명나라에 두 번, 통신사로 일본에 한번, 제주에도 수차 왕명을 받고 다녀왔으며 제주향토와 국가를 위하여 헌신했던 제주출신의 조선시대 관직에 최고 직위 인물이다. 1433(세종15) 12월 2일 첨지중추원사의 발령을 받았다. 이즈음 제주가 왜구 침입과 가뭄으로 허덕이고 있을 때 그는 세종에게 진언하여 1434(세종16) 1월 30일 양곡 7천 석을 우선 보내는데 다짐을 받았으며 이에 더욱 조정을 움직여 쌀, 콩, 잡곡 1만 석, 소금 1백 석을 제주 3읍에 분급하게 조치하였다.

1441년(세종23)에 예조참의로 다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세종 임금의 소갈증(消渴病)과 안질에 대한 약재를 얻어 왔다. 2년 뒤에 물러나와 동지중추원사·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1448년(세종30) 도전운사(都轉運使)가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쌀을 평안도로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효행이 지극하여 사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저술은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몇 편의 시가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460년(세조6) 5월 이조에서 전지하기를 “죽은 참판 고득종 등을 모두 원종(原從) 3등 공신에 기록하라”하였으니 이때 259명이 같은 공신으로 기록되었다. 한성부 판윤으로 있을 때 경사자제직과(京司子弟職科)를 특설하도록 조정에 건의, 제주에서 올라오는 관리를 우대하였다.이 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까지 존속되어 왔다. 고득종의 문장, 필법은 당시 남방의 탁관(卓冠)이라고 평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특히 홍화각(弘化閣) 석 자는 그의 글 솜씨로 남아 현재 삼성혈에 보관중이다.

박충훈朴忠勳(1919~2001,경기고 졸업,일본 교토 동지사〔同志社〕고등상업학교 졸업)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 미군 헌병사령부 통역, 본관 밀양, 호 이당(貳堂). 제주시 일도동 ‘제주-성안’에서 아버지 박종실(朴宗實)과 어머니 진주강씨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 한편, 미(美) 트루먼대통령이 서명한 훈장증서와 함께 동성훈장을 받았다. 일반참모 비서실장으로 있다가 새로 개편된 직책에 따라 공군본부 경리국장에 임명, 미군 월리엄 배브콕소령의 도움으로 경기도 관재처(管財處)로 들어갔다. 정부수립 후 초대 상공부 무역국장. 약관 29세로 최연소 이사관(理事官), 국방부 경리국장이란 중책을 맡게 되고, 5·16 사흘 전에 10년 몸담았던 공군소장에서 예편, 상공부 사무차관으로 발탁된 것은 하나의 행운이었다.

4·19 이후 태완선(太完善) 상공부장관 밑에서 차관, 태장관은 광공업 분야에 밝았지만 상역(商易) 계통이 생소했는데 박충훈은 초대 무역국장과 상역국장 지냈기에 사무차관에 앉힌 것이다. 그 덕으로 상공부나 기획원(企劃院) 재직 시에 큰 도움을 받았다. 상공장관에서 물러난지 아홉 달 만인 1964년 5월 다시 상공장관에 다시 기용됐다. 1967년 10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영전, 1년 8개월간 경제총수(經濟總帥)로 활약했다. 이후 산업개발연구소 회장, 한국무역협회장, 한국과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재야에 머물다가 신군부가 헌정(憲政) 장악을 시도하던 1980년 5월 역사의 전면으로 재등장, 신현확 국무총리 후임. 그러나 국회가 해산상태였기에 국회 동의를 받지 못해 ‘서리(署理)’라는 꼬리를 떼지 못했다. 동년 8월 16일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사임함에 따라 그는 헌법 제48조에 의거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정부를 인계받았다. 국가 원수의 공백에서 오는 혼란과 국가 기능의 정체를 막는 일이 급선무로 대통령 권한대행은 취임 12일. 제주출신으로 한국의 최고위관직에 올랐다.  

고광림 박사는1945년 서울대 법대졸업, 하바드대 박사로 고 Family의 13개 박사.  박충훈 대통령대행과 동년배 미국 연방 보건부 차관보를 지낸 고경주(영어명 하워드 고·66) 전 하버드대 교수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법률고문과 예일대 법대학장을 역임한 고홍주(헤럴드 고·64) 예일대 법대 교수 형제 일가족이 최근 코네티컷주 '2018 이민자 유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올해로 6번째인 헌액식은 플랜츠빌 소재 아쿠아 터프 클럽에서 폴란드 아메리칸 파운데이션 주최로 열렸다. 행사에는 고경주·홍주 형제와 어머니인 전혜성(89) 동암연구소 이사장, 고경은(영어명 진 피터스·60) 예일대 법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이들 4명과 작고한 아버지 고광림 박사를 포함해 5명은 코네티컷 이민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겨 이날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계 최초로 이름을 올렸다.

부친의 사진을 들고 참석한 고홍주 교수는 "우리 부모님은 모국인 한국 문화를 미국에 멋지게 소개하는 다리 역할을 훌륭히 잘 해주신 분들"이라며 "우리 가족에게 이런 영예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주미대사관 공사를 지낸 고광림 박사는 1961년 예일대 방문학자로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 가족과 함께 정착했다. 센트럴 코네티컷 주립대에서 작고한 1989년까지 정치학 종신교수로 근무했다. 부인 전혜성 박사와 함께 동암문화연구소를 설립해 한인 2세 교육과 한국 문화 및 동아시아 문화를 미국 주류 사회에 소개하고 전파했다.19살 때 미국 유학차 태평양을 건넌 전 박사는 보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예일대 로스쿨 강단에 섰다. 하귀리에 고박사 가족 헌양비가 2005년에 세워졌다.

▲에필로그: 고득종은 1429년(세종11년) 알드르에 있는 목장을 한라산 등성이 중산간으로 옮겨 담장을 쌓도록 세종에 건의했다. 오늘날 10소장 목장이다. 또 처남매부간이 문방귀와 더불어 묘의 산담, 신문을 제안했다. 한마디로 그는 제주사람을 사랑하고 간 효(孝)와 민(民)의 제주도의 왕(王). 박충훈은 약관 29세로 최연소 이사관(理事官), 행정의 달인으로 행정(行政)의 王,경기고와 일본동지사고등을 졸업한 것이 이채롭다.보통사람이면 일본에갔다면 대학에 진학했을 터. 고광림은 하귀리의 신우공립보통학교를거쳐  상경,경성사범학교 졸업후 경성제대를 1945년에 수석으로끝내면서 미국 Rutgers대학에서 박사 이어 하바드에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은 학(學)의 王,부인 전혜성 박사 (1929-경기여고,이화여대중퇴후 전액장학금으로 보스턴대학 박사)의 내조(內助,4남2녀)가 컸다.1500-2020년사이(5백년간)에 제주의 대인(大人) 고득종, 박충훈, 고광림을 조명한 이유다. 제주 발전을 할려면 훌륭한 인재 양성이다.

# 이문호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 전기통신 기술사(1980)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울릉공- RMIT대학, 독일 뮌헨,하노버-아흔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공학부 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최초 Jacket 행렬을 발견했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과학기술훈장 도약장,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선정, 2018년 한국공학교육학회 논문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제주문화의 원형(原型)과 정낭(錠木) 관련 이동통신 DNA코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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