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33) 물장사 해 나면 다른 일 못한다

* 물장시 : 물장사, 술이나 차를 파는 일(장사)을 하는 사람
* ᄒᆞ여나민 : (과거에) 해나면, 했었던 이력이 있으면

예로부터 제주사람들은 부지런 공으로 살아왔다. 

동살이 틀 무렵 어둑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산 가까이 있는 먼 밭을 향해 잰걸음을 해야 했다. 겨울 한 철 빼놓고 밭일을 하는 봄에서 가을까지 세 철은 무더운 날이 많았다. 이른 새벽에 한 시간도 더 걸어야 하는 밭에 도착해 밭 갈고 걸름(거름)하고 검질(김)을 매야 한다. 

안 그렇고 까딱 늦으면 밭에 이르러 해가 중천에 솟아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땀을 쏟아야 한다. 능률이 오르겠는가. 말이 쉽지, 이런 나날 속에서 일상을 산다는 게 얼마나 고단했겠는지 짐작이 가고 남는 일이다.

특히 제주의 여인들은 일터가 둘이었다. 

궂던 날씨가 들르면(좋아지면) 밭에 가 일하다가도 종종걸음으로 내려와 바다로 달린다. 잠녀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80세가 넘도록 뼈가 부러지게 일을 해 아이들 학교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 독립시켰다.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 눈에 도시에서 술집입네 다방입네 해서 곱게 차려입고 편한 자리에 앉아 한들거리며 살아가는 여인들이 곱게 보일 리 만무한 일이다. 지금을 커피숍이나 카페지만 60, 7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 이곳저곳에 다방이 많았다.

ⓒ오마이뉴스 변영숙
인간다운 삶인지 하는 것은 어디서 어떤 일(업)에 종사하느냐에 매인 게 아니다. 얼마나 시종일관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사느냐 하는 것이다. 사진출처=오마이뉴스. ⓒ변영숙

다방 마담들은 온종일 찾아오는 한량들을 맞이해 그 손님들이 사 주는 차나 마시면서 지냈다. 아침마다 달걀 노른자를 띄우는 모닝커피로 시작해 홍차, 찻잔부터 두껑으로 덮던 비싼 쌍화차에 이르기까지 홀짝홀짝 마시며 한가로이 보냈다. 손에 흙 한 번 만져 보지 않은 여인들이다. 삶의 이면까지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외양으로 보면 이런 늘어진 팔자가 어디 있으랴.

그러니 죽을 때까지 밭과 바다를 오가며 고생고생하며 사는 농부이면서 ᄌᆞᆷ녀(해녀)인 농촌 여성들의 눈에 술집 주모나 다방마담이 어여삐 비칠 리가 있으랴. 한마디로 밭 구경, 바당 구경 한 번 아니하고, 궂은일이라고는 손 ᄒᆞ나 ᄁᆞ딱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 아닌가. 위화감을 넘어 증오의 대상이었지도 모른다.

‘물장시 ᄒᆞ여나민 다른 일 못 ᄒᆞᆫ다’에는 이런 감정이 진득이 서려 있다. 각자도생으로 제멋에 사는 세상인데, ‘물장시 운운’할 일이랴만, 한편 너무 불공정하니 빈정거리거나 투덜댈 만도하지 않은가. 

사실이지, 물장시하는 도시 여성과 농어촌 여성의 생활은 너무 차이가 났다. 하지만 어느 쪽이 인간다운 삶인지 하는 것은 어디서 어떤 일(업)에 종사하느냐에 매인 게 아니다. 얼마나 시종일관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사느냐 하는 것이다.

결코 두 계층의 여성들의 삶이 틀리다 할 것은 아니다. 처해 있는 환경이나 사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김길웅

김길웅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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