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꿈의 소환, 혹은 농심(農心)의 체험적 보고서

제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복서로도 활동하는 시조시인 강문신이 네 번째 시조집 ‘해동(解冬)의 들녘(문학과사람)’을 출간했다.

시인은 책을 통해 농사 현장에서 직접 체험한 감정을 드러내고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며 든 생각과 먼 옛날 군생활 이야기 등을 펼쳐낸다. 

시조집은 △낮 술 혼자 붉힌 △끝내 항서(降書) 없이 △쫓는 일 아~ 쫓기는 일 △김 일병의 첫 휴가 △석파(石播)제국 등 5부로 구성됐다. 

강문신은 시인의 말에서 “하노라고 했지만 쭉정이다. 그 쭉정일 보듬은 농심…어떠하랴. 2부는 복싱에 관한 글 모음이며 4부는 먼 군 생활을 더듬어 본 것이다”라고 소개한다.

읍참마속

농장 가면 늘 묵묵한 나무들 많아서 좋다
천천히 돌아본다 살피고 또 살핀다
색깔로 상태를 읽으니, 다듬고 북돋우는

애지중지 그 귤나무들 내 손으로 벨 때 있어
애원의 눈망울도, 일도양단! 읍참마속
먼 심려 그 품종갱신을 그들이 하마 알까

집에 오면 홀가분히 나무들 없어서 좋다
고비 고비 숨 가쁘던 그 날들이 문득 와서
“여보게, 이젠 좀 쉬면서 하게” 차 한 잔을 권하는


그런 거

자네, 어느 호칭이 제일 맘에 드나?
관장 시인 선생 사장 중에서 말이야
내겐 다 분에 넘치지…굳이 하날 꼽는다면

관장이야, 거기엔 피땀 내움 배어있어
젊은 아직도 주린 야성이 꿈틀대지
한사코 정방폭포 언저리, 뛰고 뛰며 채찍질하던 

순간을 놓칠 수 없는 긴장도 거기엔 있어
하노라 하고 있네만 한시도 쉬지 않네만
내 시(詩)에, 혹 내 사업에, 그런 거 좀 보이나?

시인은 농사꾼으로서 겪은 애환과 복싱 선수와 코치로서의 체험적 교훈, 지난날 군대 생활까지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시를 써 내렸다. 

특히 읍참마속에서는 애지중지 키워낸 나무를 베어내고 새로운 품종으로 바꿔야 하는 아픈 마음이 드러난다. 

해설을 쓴 민병도 시인은 “농부에게 자신이 심고 애지중지 키운 나무는 가족과도 같다. 그런데 주인의 기대와는 달리 기대에 못 미치는 결실로 땀의 보상을 외면하게 됐을 때 더 좋은 품종으로 교체를 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어 “노동과 경제 논리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 같지만 새로운 묘목을 심기 위해 그 나무를 잘라내는 마음은 결코 편하지 못하다”며 “그것도 세상의 실존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진단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이라면 오죽하겠나”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자잘한 잔정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생각 너머의 울림이 느껴지는 시편이다. 오죽하면 그 심사를 읍참마속에 비유했겠나”라고 덧붙인다.

읍참마속은 ‘울면서 마속을 베다’라는 뜻으로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할 무렵 전략상 결정된 전술을 지키지 않고 다른 전략을 펼쳐 전쟁에서 대패한 장수 ‘마속’의 목을 벤 일에서 비롯된 말이다.

아들처럼 여긴 마속이지만 조직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식을 죽이는 처참한 심정으로 사사로운 정을 포기하고 결단한 일을 일컫는 고사성어다. 

민 시인은 “농민들에게 어찌 그 같은 일이 한두 번이겠는가. 농민이 과원을 떠나 ‘집에 오면 홀가분히 나무들 없어서 좋다’고 말하는 의미를 곧대로 믿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며 “다분히 역설이다. 그리고 그 역설의 이면에는 나무에 대한 뭉근한 사랑이 묻어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농민 시인인 그가 만난 환경과 시대 상황이 절대 녹록치 않았음이 거의 모든 시편에 스며있다”라면서 “편 편마다 시대와 맞선 땀과 열정으로 자신의 정신을 구호한 흔적들이 역력해 독자에게 전혀 가볍지 않은 물음으로 다가선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고 말했다.

서귀포시 하효동 출생인 강문신은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199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잇달아 당선됐다. 그 후 2007년 첫 시집 <당신은 “서귀포...”라고 부르십시오>를 출간했으며 이후 제1회 서귀포 예술인상(2008년), 시조시학상(2010년), 한국시조시인협회상(2012년), 제주도 문화상(2013년)을 잇달아 수상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