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79)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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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죽었다 깨어난다.

아침에 세수할 때 사도신경을 외면서 숨을 참았다가 내쉬는 훈련(?)을 매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신체 훈련에 불과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내 나름의 수행이요, 구도다.

대다수가 죽음은 먼 훗날의 이야기고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든지 각종 사고나 질병으로 죽음과 직면할 수 있다. 사실 평소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으며 그것은 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과 절차에 대해 늘 염두에 둬야 한다. 곧, 죽음 준비이고 이것은 사는 준비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대체로 삶이 아름다우면 죽음도 아름답다. 그런데 잘 죽는 건 잘 사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아무리 고매한 성직자라도 죽는 모습이 추하다면 그의 인생은 실패다. 오복(五福) 중에 고종명(考終命)이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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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관련된 동·서양 상징기호의 공통점은 무얼까? 

강(江)이다. 죽기 위해선 강을 건너야 한다. 강은 이정표요, 플랫폼이다. 플랫폼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듯 강에서 이승을 떠난다. 

종교와 신화에서도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선으로 강이 등장한다. 제주무속신앙의 서천강, 기독교의 요단강, 불교의 제석천, 그리스신화의 하데스와 레테(망각의 강)가 그것이다. 다큐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사랑하는 남편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늙은 아내의 절규다.

왜 생사의 경계선으로 강이라는 상징체계가 필요했을까? 사자(死者)가 강을 통과하면서 죄를 씻는 속죄, 속세의 때를 씻는 정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속죄와 정화의식(意識)이 나중에 기독교 신자가 되는 관문인 세례, 곧 입교의식(入敎意識)으로 진화한다. 말하자면 ‘의식·관념의 제도화’가 이뤄진 것이다. (나는 문화란 의식이나 관념의 제도화라고 생각한다)

사진=픽사베이.
곰곰이 죽음을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아등바등 조마조마하며 사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지 깨닫게 되리라.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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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잘 사는 것), 웰 에이징(잘 늙는 것), 웰 다잉(잘 죽는 것) ― 이 세 가지가 다 중요하지만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웰 다잉이다. 웰 다잉이야 말고 인생을 정리하고 결산하는 최종보고서요, 대차대조표이다. 

A.J.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는 엔도 슈사꾸의 ‘침묵’과 함께 기독교 명작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치솜 신부는 죽음을 앞두고 “내 인생의 대차대조표는 하느님 앞으로 올리겠습니다”라고 기도한다. (나도 죽기 전에 꼭 이 말을 하고 죽겠다. 치매로 잊어버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50대에 미리 유언장을 작성했다. 거기엔 연명의료행위 금지, 시신 기증, 장례 절차, 재산  처분… 등이 들어있다. “생전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말자”는게 나의 변함없는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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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곰곰이 죽음을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아등바등 조마조마하며 사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지 깨닫게 되리라.

아주 오래 옛날, 석가모니가 제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꼴깍 한 숨 넘어가면 저승이여. 저승사자가 늘 자네 주변을 맴돌고 있응께 명심허더라고…….”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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