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60) 리춘펑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사진=리춘펑.
홍콩 센트럴에 있는 평화기원비. 사진=웹 이미지

홍콩은 전쟁과 먼가? 이것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홍콩 사회에서는 공식, 비공식 할 것 없이 전쟁(과 평화)이 그리 주류의 화두는 아니다. 이 거리는 안전과 안정을 자랑하는 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는 듯하여, 일반인들은 전쟁이 언젠가 정말로 이 도시에 영향을 주게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으며(기껏해야 주식시장이 며칠 변동하는 정도일 것이라고), 현재의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거리를 열화시키는 전쟁 광경은 아마도 미디어의 스펙터클로서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홍콩은 정말 전쟁에서 먼가? 전쟁을 국가 규모의 군사력 싸움으로 정의하면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된 1842년 이후, 그리고 주권이 이양되고 ‘일국양제’가 실시된 1997년 이후 홍콩은 항상 지역 내 주요 주둔지가 돼 왔다.

자료에 따르면 현재 홍콩에는 인민해방군 부대가 1만명 가까이 주둔하고 있으며, 19개의 병영 및 군사 시설이 있으며, 총 면적은 2700ha로 홍콩 전역의 레저용 공간 면적 2200ha를 상회한다. 병사의 대부분은 거리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예를 들어 빅토리아 하버에 있는 와인잔 모양의 건물은 원래 영국군 구 사령부였으며 현재는 ‘인민해방군 홍콩 주둔 부대 건물’로 불린다. 그 인상적인 디자인은 심미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 즉 방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도시의 상업 중심지인 센트럴 옆에는 현재 정부와 입법 의회가 소재하고 있는 해군성(Admiralty)이 있다. 통일 전에는 영국 해군기지와 조선소가 있던 곳으로 해군성은 '해군사령관이 있는 해군기지'라는 뜻이다. 중국어로 진종(金鍾)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막사 입구에 청동종을 매달아 군인과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신호에서 유래했다. 현재는 별로 의식되지 않지만 정치의 중심지에는 사실 긴 군사적 역사가 있다.

사진=리춘펑.
센트럴의 '인민해방군 홍콩 주둔 부대 빌딩. 사진=웹 이미지

반면 홍콩은 전후 베트남이나 한국 등 동아시아 인근 국가의 분쟁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오히려 들러리만 섰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이 시작된 직후인 1950년 8월 말, 영국은 홍콩에서 부산으로 바로 여단을 파견하여 부산 방위를 지원했다. 베트남전 당시 홍콩은 미국 함선의 물자 보급과 휴가를 위한 기항지(싱가포르 30회에 대해 86회)였으며, 주둔하는 미군들로 완차이나 침사아초이 일대의 바가 북적거려 지역 경제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외교 의례 대접은 미중 관계가 긴박해진 요즘엔 중단됐다.

사진=리춘펑.
2018년 홍콩에 정박 중인 미국 항공모함 USS 레이건. 사진=웹 이미지

대만해협의 지형 상 홍콩과 금문도, 마주섬은 사실상 교전의 최전방 지역이다. 1949년 내전 이후 홍콩에는 국민당 병사와 민간인이 대거 잔류했고 그중에는 상공회의소 노동조합 심지어 폭력배를 끌어들여 국민당이 홍콩에서 전개하는 정치 세력으로 변신한 사람도 있었다. 1956년에는 국민당 지지자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고, 홍콩 정부는 영국군을 투입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 사건은 사망자 59명, 부상자 443명, 체포자 6000명 이상을 냈다. 이 폭동 이후 홍콩 정부는 면밀한 조사를 벌여 홍콩 최초의 준군사적 경찰대를 창설하고 현재의 경찰 기동부대로 재편해 폭동 진압 능력을 강화했다. 이 부대는 10년 뒤인 1966년 스타페리 인상 반대 항쟁과 1967년 반영 투쟁에도 출동했고 1980년대에는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으로 수출됐다.

사진=리춘펑.
1956년 10월 10일부터 12일에 걸쳐 구룡에서 일어난 '쌍십절 폭동' 모습. 청천백일기를 든 친국민당 피해자들이 길거리에 드러눕는다. 사진=웹 이미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홍콩은 이미 지역 및 국제 무역의 중요한 항구도시이자 서양 식민지 권력의 상징이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은 홍콩의 획득을 중시하여 태평양 전쟁 첫날 진주만을 약 6시간 공격한 후, 일본군이 총병력 5만 2천명으로 홍콩을 침공하였다. 당시 홍콩 수비대는 1만5000여 명에 불과했다. 같은 시기 발발한 말레이 해전에서는 영국군 14만 명, 일본군은 7만 명밖에 투입하지 않았다.

전쟁의 정의를 역사적 사상적 수준으로까지 확대한다면 냉전시대의 홍콩은 동아시아 제1열도선의 일부였고, 미국의 군사적 보호 하에 있었다. 과거 영미는 만약 홍콩이 해방군에 침공되면 핵무기로 반격할 것을 논의했다. (참조 : http://news.sina.com.cn/w/2006-06-30/15089340567s.shtml )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종결되었어도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사상구조는 여전히 남아 그것이 중국과 홍콩의 갈등을 이해하는 하나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현재 중국의 힘이 커지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과 중국정부가 대립하는 이른바 '신냉전' 시대로 접어들면서 홍콩은 필연적으로 양국 사이에 끼인다.

따라서 홍콩은 전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전쟁의 최전선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홍콩 주류사회가 전쟁에 대해 무관심한 것과 묘한 대비다. 이 무관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홍콩 식민지 시대의 역사나 지정학에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고, 동시에 냉전과 동아시아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과 근대화라는 아시아 간의 맥락과 관련되어 있다. 이처럼 홍콩을 통해 동아시아 문맥에서 전쟁의 공통성과 사람들이 직면한 폭력과 무력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그 상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다음 글로 미룬다.

리춘펑

리춘펑(李俊峰, LEE Chun-Fung)은 홍콩에 거주하는 예술가이자 큐레이터이다. 그의 작품들은 공간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공동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는 <Can We Live Together?>(2014) 등과 같은 큐레이터 프로젝트를 비롯해 <Cycling to the Square>(2010~), <Pitt Street Riot>(2014) 등의 프로젝트에서 참여적인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홍콩의 풀뿌리 동네인 야우마테이(Yau Ma Tei)에 기반을 둔 커뮤니티-예술 공간인 우퍼텐(Woofer Ten, 2009-2015)을 포함한 여러 예술 이니셔티브의 공동 창립자였다. 한편, 그는 동아시아 멀티미팅(Multiple Meeting, 2012-2013)과 <Art/Activist-in-Residence>(2011-2015)와 같은 프로젝트와 함께 지역 간 예술/활동가 교류에 힘쓰고 있다.


香港,與戰爭的距離 I:場景
文:李俊峰

圖1:位於中環的「和平記念碑」(網絡圖片)

香港離「戰爭」遙遠嗎?這問題並不容易回答。
無論在香港社會的官方或民間的論述,戰爭其實都不算是一個主流的話題。在情感上戰爭與
一般香港人亦談不上是一件直接關切的事情,這城市仿佛包圍著一道以安全、穩定為傲的意
識型態,一般人難以想像某天戰火真的會波及這城市(頂多只是股市短暫波動數天),而戰
火揉淪城市的場景,如今天發生在敘利亞的畫面,大概只如隔岸觀火的媒體景觀式心理存在
吧。

不過,事實上,香港離戰爭真的很遙遠嗎?若我們將戰爭定義在「國家有規模武裝力量之間
的爭鬥」,那自1842年英國開啟殖民管治,及至1997後主權移交,實行「一國兩制」以來的今天,香港從來都是區域上重要駐軍據點。

數據上,現時香港駐有近一萬人的解放軍部隊;軍營、軍事設施達19個,總面積為2700公頃,比全港休憩用地的總面積2200公頃更為多。不少軍營位處於城市中心位置,如維港上一棟外形如酒杯的建築物,其實正是前英軍總部,今天的「解放軍駐港部隊大廈」;這注目的設計亦非只為美觀,而是具有實際的防衛考量,一個便於防禦的設計。在城市的商業中心中環旁邊的是金鐘,今天政府總部與立法會的所在地。在回歸前,這裡其實是英國海軍基地及船塢所在地,英文Admiralty意思即為「有海軍司令坐鎮的海軍基地」 ;中譯意思是
golden bell,因從前在軍營大門口懸有一個金色銅鐘,定時敲打以作士兵和工人午饍及放工
訊號。儘管今天一般人已不太為意,這城市的政治中心其實有深遠的軍事歷史。

圖2:解放軍駐港部隊大廈(網絡圖片)

對照在戰後東亞鄰近地區,像越南和韓國都曾經歷大規模戰役,香港雖然沒有直接捲入衝突,
但事實上亦扮演支援角色。如韓戰爆發初時(1950年8月底),英國即迅速由香港調派一個旅的軍力到釜山支援防衛作戰;越戰時期,香港是美軍船艦補給物資與休假港口(停泊次數達86次,對比新加坡只有30次),美軍留港休假時亦影響到本地經濟活動,如今天灣仔、尖沙嘴一帶仍然熱鬧的酒吧業。美艦停泊香港補給這事過往一直發生,直至最近中美關係愈趨緊張,此一「禮遇」才被停止。

圖3:2018年,美國航空母艦列根號停泊香港(網絡圖片)
就台海格局,香港與金門、馬祖其實亦屬前沿交鋒地帶。49年內戰後,大批國軍軍民滯留香港,部分轉型為國民黨在港部署的政治力量,勢力涉及商會、工會及至黑幫。1956年便曾發生由右派支持者引發的大型騷亂, 期間港府出動英軍戒嚴, 事件最終釀成59人死亡
、443人受傷、6,000多人被警方拘捕。港府事後就暴動作深入檢討,其中一政策便為加強
警察的鎮暴能力,逐成立香港首支準軍事化的防暴警察隊伍,後改組為現今的「警察機動部
隊」。這在十年後,即1966年「天星小輪加價騷亂」和1967年持續更長的「反英抗暴」左派暴動中派上用場。到了80年代更將相關鎮暴技術「輸出」到英國本土,用以鎮壓當時的煤礦工人罷工。

圖4:1956年10月10日至12日在九龍爆發的「雙十暴動」(網絡圖片)

二戰前,香港已是區域上及至國際貿易上的重要港口城市,同時亦是西方殖民權力的象徵,
有著重大經濟及政治意義。因此在中日戰爭期間,日軍對獲取香港亦相當重視,在發動「太
平洋戰爭」的首天,偷襲珍珠港約6小時後,出動總兵力達5.2萬入侵香港,而當時香港的守軍只有約1.5萬。對比同期爆發的「馬來亞戰役」,日軍只出動7萬兵力,應付14萬英軍。若我們將戰爭的定義擴闊至歷史、意識型態層面,冷戰時代香港是東亞「第一島鏈」的佈局範圍,屬於美國的軍事防護範圍;當時英美雙方甚至討論過,若香港被解放軍侵襲,便將使用核武器還擊 〔注一〕。即便蘇聯倒台,冷戰結束後的今天,它所遺下的意識形態對峙結構仍然存在,這亦是了解中港矛盾的軌跡之一。今天,因著中國國力冒升,美國等西方陣營與中國政府之間的矛盾愈演愈裂,進入所謂「新冷戰」時代,香港位處中美兩國夾縫之間,無可避免地捲入其中;隨著社會呈現兩極化的對峙,任何社會矛盾也可敏感地引發尖銳的交鋒。

所以,香港與戰爭其實並不遙遠,某程度更可謂位處戰爭的前沿;不過,相對於香港主流社
會對戰爭的冷漠,這是一個令人疑惑的反差。究竟此一冷漠從何而來?這或許關係到香港在
其殖民歷史與地緣政治等層面的問題,而這又同時扣連亞洲各地的處境,比如冷戰佈局、東
亞的資本主義發展和現代化等問題。因此,借著香港,它或一定程度反映戰爭在東亞脈絡下
的共同性,以及民眾所面對的暴力、武力的問題。以上問題由於篇幅所限,我們下回再談。

注一: http://news.sina.com.cn/w/2006-06-30/15089340567s.shtml
香港、戦争との距離Ⅰ:情景


リー・チュンフォン

写真1:セントラルにある「和平祈念碑」(Web画像)

香港は「戦争」から遠いか? これは容易に答えられる問ではない。

もちろん香港社会では、公式・非公式を問わず、戦争(と平和)はあまり主流の話題ではない。この街は安全と安定を誇るイデオロギーに包まれているようで、一般の人々は、戦争がいつか本当にこの街に影響を与えることになるとは想像できないし(せいぜい株式市場が数日変動する程度だと)、現在の中東で起こっているような、街を劣化させる戦争の光景は、おそらくメディアのスペクタクルとしてしか存在しないと思っている。

しかし、香港は本当に戦争から遠いのか?戦争を「国家規模の軍事力の戦い」と定義すれば、イギリスの植民地支配が始まった1842年以降、そして主権が移譲され「一国二制度」が実施された1997年以降、香港は常に地域内の主要な駐屯地となってきた。

資料によると、現在、香港には人民解放軍の部隊が1万人近く駐留し、19の兵営・軍事施設があり、その総面積は2,700ヘクタールで、香港全域のレジャー用オープンスペース面積2,200ヘクタールを上回るという。兵舎の多くは街の中心部に位置する。たとえばビクトリア・ハーバーにあるワイングラスのような形をした建物は、元はイギリス軍旧司令部で、現在は「人民解放軍香港駐屯部隊ビル」と呼ばれる。その印象的なデザインは審美的な理由だけでなく実用的な目的、つまり防衛を容易にするためのものだ。街の商業中心地であるセントラルの隣には、現在、政府と立法議会が所在するアドミラルティがある。統一前はイギリス海軍基地と造船所があった場所で、アドミラルティとは「海軍司令官のいる海軍基地」という意味だ。中国語では「金鐘」と訳され、これは兵舎の入口にブロンズの鐘が吊るされ、兵士や労働者への合図として鳴らされたことに由来する。現在はあまり意識されないが、政治の中心地には、実は長い軍事的な歴史がある。

写真2:セントラルの「人民解放軍香港駐屯部隊ビル」(Web画像)

一方、香港は、戦後のベトナムや韓国など東アジア近隣諸国の紛争に直接関与せず、むしろ脇役に徹した。たとえば朝鮮戦争開始直後の1950年8月末、イギリスはすぐに香港から釜山に旅団を派遣し、釜山防衛を支援した。ベトナム戦争では、香港はアメリカ艦船の物資補給や休暇のための寄港地(シンガポールの30回に対し86回)となり、駐屯する米兵でワンチャイやチムサアチョイ一帯のバーが賑わい、地元の経済活動にも影響を与えていた。このような「外交儀礼」のおもてなしは、米中関係が緊迫してきた最近では停止している。

写真3:2018年、香港に停泊中の米空母USSレーガン(Web画像)

台湾海峡の地形上、香港と金門、馬祖は事実上、交戦の最前線地域だ。1949年の内戦後、香港には国民党の兵士や民間人が大量に取り残され、その中には、商工会議所や労働組合、さらには暴力団を巻き込んで、国民党が香港で展開する政治勢力に変身した者もいた。1956年には国民党支持者による大規模な暴動が発生し、香港政府はイギリス軍を投入して戒厳令を敷いた。この事件は、死者59人、負傷者443人、逮捕者6,000人以上を出した。この暴動の後、香港政府は綿密な調査を行い、香港初の準軍事的警察隊を創設し現在の警察機動部隊に再編し、暴動鎮圧能力を強化した。この部隊は10年後の1966年の「スターフェリー値上げ反対抗争」や1967年の反英闘争にも出動し、1980年代には炭鉱労働者のストライキを鎮圧するためにイギリスに輸出された。

図4:1956年10月10日から12日にかけて九龍で起きた「双十節暴動」(Web画像)。
晴天白日旗を掲げた親国民党の被害者が路上に横たわる。

第二次世界大戦以前の香港は、すでに地域および国際貿易の重要な港町であり、西洋の植民地権力の象徴でもあり、経済的にも政治的にも大きな意味を持っていた。日中戦争において日本軍は香港の獲得を重視し、太平洋戦争の初日、真珠湾を約6時間攻撃した後、日本軍が総兵力5万2千人で香港に侵攻した。当時の香港守備隊は約1万5千人に過ぎなかった。同時期に勃発したマレー沖海戦では、イギリス軍14万人に対し、日本軍は7万人しか投入しなかった。

戦争の定義を歴史的・思想的レベルにまで広げるなら、冷戦時代の香港は東アジアの「第一列島線」の一部であり、アメリカの軍事的保護下にあった。かつて英米は、もし香港が解放軍に侵攻された場合は核兵器で反撃することを話し合った。(参照:http://news.sina.com.cn/w/2006-06-30/15089340567s.shtml )ソ連が崩壊し冷戦が終結しても、イデオロギー的対立の思想構造は依然として残り、それが中国と香港の葛藤を 理解する一つの痕跡となっている。現在、中国の力が強まり、アメリカをはじめとする西側陣営と中国政府が対立する、いわゆる「新冷戦」の時代に入り、香港は必然的に両国の間に挟まれる。

したがって、香港は戦争から遠くにいるのではなく、ある意味では戦争の最前線にいるとも言える。しかしこれは、香港の主流社会が戦争に対して無関心であることと不可解なコントラストだ。この無関心はどこから来るのか? それはおそらく、香港の植民地時代の歴史や地政学に関係しているかもしれないし、同時に、冷戦や、東アジアにおける資本主義の発展と近代化といったアジア間の脈絡と関連している。このように、香港を通して、東アジアの文脈における戦争の共通性や、人々が直面する暴力と武力を反映させることになるだろう。その詳細な議論については次回に譲ろう。


Hong Kong, the Distance to War I: Scenes 
LEE Chun Fung

Photo 01: The Cenotaph (Peace Memorial) in Central

Is Hong Kong far from "war"? This is not an easy question to answer.

War (and Peace) is not a mainstream topic in Hong Kong society, either in official or non-official discourse. This city seems to be surrounded by an ideology that prides on its security and stability. It is difficult for the ordinary people to imagine that war will one day really affect the city (at best, the stock market will fluctuate for a few days only), and that the scenes of war degrading the city, such as the one happening in the Middle East today, will probably only exist as a media spectacle.

But, in fact, is Hong Kong really very far from war? If we define war as "a struggle between the armed forces of political power", then Hong Kong has always been a major regional garrison since 1842, when British colonial rule began, and since 1997, when sovereignty was handed over and "one country, two systems" was implemented.

Today, there are nearly 10,000 troops of the People's Liberation Army (PLA) stationed in Hong Kong, and there are 19 military camps and facilities with a total area of 2,700 hectares, which is more than the 2,200 hectares of leisure open space in Hong Kong. Many of the barracks are located in the heart of the city. For example, a building on the Victoria Harbour, shaped like a wine glass, is in fact the former headquarters of the British Army, now known as the "CPLA Garrison Building"; its striking design is not just for aesthetic reasons, but for practical defence purposes, a design that facilitates defence. Next to the city's commercial centre, Central, is Admiralty, today the seat of the Government and the Legislative Council. Before the reunification, it was actually the site of a British naval base. The Chinese translation is "金鐘", literary a golden bell, because a bronze bell was hung at the entrance of the barracks and was regularly rung to signal the soldiers and workers. Although most people don’t really aware of it today, the political centre of the city actually has a long military history.

Photo 02: The CPLA Garrison Building in Central

In contrast, Hong Kong was not directly involved in the post-war conflicts as his neighboring country, such as Vietnam and Korea, but in fact played a supporting role. For example, at the beginning of the Korean War, the British quickly sent a brigade from Hong Kong to Busan to support its defence. During the Vietnam War, Hong Kong was a port for supplies and vacation for US warships (totally 86 times, compared to 30 times in Singapore), and when US troops stayed in Hong Kong, it also affected local economic activities, such as the bar scene in Wan Chai today. This "courtesy" has been suspended since recently when the relations between the US and China became increasingly tense.

Photo03: US aircraft carrier USS Reagan berthed in Hong Kong in 2018

In terms of the confrontation between Mainland China and Taiwan, Hong Kong are also the frontier of engagement. After the China civil war in 1949, a large number of Kuomintang civilians were stranded in Hong Kong, some of them were transformed into political forces, involving chambers of commerce, trade unions and even gangs. In 1956, there was a huge riot caused by the Kuomintang supporters, which made Hong Kong government deployed British army to impose martial law. The incident resulted in 59 deaths, 443 injuries and over 6,000 arrests. In the aftermath of this riot, the Hong Kong government conducted an in-depth review and hence set up the first quasi-military riot police force in Hong Kong. This was applied a decade later in the 1966 Kowloon Riots and the 1967 Leftist Riots. 

Photo 04: A victim lies in the street draped with a Nationalist ''Republic of China'' flag - during the 1956 Riots

Before World War II, Hong Kong was already an important port for regional and international trade, as well as a symbol of Western colonial power, which had great economic and political significance. During the Sino-Japanese War, the Japanese army attached great importance to acquiring Hong Kong. On the first day of the Pacific War, after attacking Pearl Harbour for about six hours, the Japanese army invaded Hong Kong with a total force of 52,000 troops, while the Hong Kong garrison was only about 15,000 at that time. In contrast, in the Battle of Malaya, which broke out at the same time, the Japanese only deployed 70,000 troops against 140,000 British troops.

If we broaden the definition of war to the ideological level, Hong Kong was part of the “Island Chain”during the Cold War, and was under the military protection of the United States. It was even discussed that if Hong Kong was attacked by the PLA, the UK and US would use nuclear weapons to fight back.Today, even after the fall of the Soviet Union and the end of the Cold War, the ideological confrontation still somehow exists, and this is one of the traces of the conflict between China and Hong Kong today. In recent years, as China's power rises and the conflict between the United States, the so-called 'New Cold War' has lead to an era where Hong Kong is inevitably caught between the two powers.

Therefore, Hong Kong is not far away from the war, and to a certain extent, we are at the forefront of it. However, compared to the indifference of the war in Hong Kong's mainstream society, this is a puzzling contrast. Where does this indifference come from? It might relate to the historical context of Hong Kong in terms of its colonial past and geopolitics, which is at the same time linked to an inter-asian contexts, such as the Cold War,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and modernisation in East Asia, and so, through Hong Kong, it will reflect the “commonality” of war in the context of East Asia and the violence people are facing. Yet, as the length of this column is limited, for its detailed discussion, let’s leave it for nex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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