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10) 홍안화수, 천젠화·리스야 저, 심규호 역, 중앙북스, 2013.

사진=알라딘.
 홍안화수, 천젠화·리스야 저, 심규호 역, 중앙북스, 2013. 사진=알라딘.

줄넘기와 말타기

나는 철수와 영희 세대이다. 철수는 항상 바지를 입고 영희는 치마를 입은 채 바둑이와 함께 놀던 바로 그 세대라는 뜻이다. 하지만 철수와 영희가 다정히 손을 잡고 학교에 다닌 것과 달리 나와 짝꿍은 서로 아웅다웅 다투기 일쑤였다. 줄넘기 놀이하는 것을 보고 끼어들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대신 무리들과 짜고 고무줄을 끊어버리러 달려가곤 했다. 짝꿍은 골을 부리거나 달려와 등짝을 쳤다. 나는 몹시 아파 울고 싶었지만 차마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사내 녀석이 계집애처럼 그깟 일로 우냐고, 사내대장부는 평생 세 번 울 뿐이라고, 누차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후로 족히 3만 번은 울었을 것이나 아무에게도, 특히 여자들에게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다. 줄넘기가 그네들의 주종목이라면 우리에게는 말타기라는 고유종목이 있었다. 흥, 치마를 입고는 못 타지!

홍일점과 청일점

철수와 영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다른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하나는 남고, 하나는 여고였다. 서로 떨어지니 그제야 그리움이 몽실몽실 피어났다. 다정해졌느냐고? 속마음은 그러했으나 겉은 아니었다. 힐끗힐끗 쳐다보는 일만 많아졌을 뿐 여전히 속내를 드러내기 힘들었다. 실체를 알 수 없지만 분명 뭔가 장애가 있었다. 철수와 영희, 여자와 남자, 그와 그녀 사이에 건너기 힘든 구별과 차이, 심지어 분리와 차별이 상호 소통을 가로막는 억압기제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 낮과 밤, 양과 음, 짝수와 홀수, 수컷과 암컷이 있는 것처럼 남녀 역시 당연히 구분되고, 때로 차별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저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면” 그 뿐이었다. 같은 노동자도 여공은 있으되 남공은 없고, 작가 중에 여자는 별도로 여류작가라고 불렀으며, 홍일점紅一點은 자주 썼지만 청일점이란 말은 잘 쓰지 않았다. 더 이상 줄넘기나 말타기는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줄넘기는 여자 것, 말타기는 남자 것이라고 믿었다. 

형님과 누이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다니던 시절이다. 이는 기정사실에 대한 회의와 ‘스터디’를 통한 의식 변화에 기인한다. 이는 하나의 사조로 ‘우리’의 삶 전체를 감싸 안았다. 오빠 대신 형이라고 부르는 여자후배가 많아졌고, 맞담배를 피우며 직면한 현실에 함께 고민했다. 여자나 남자라기보다 그냥 동지이거나 선후배였다. 예전에는 형(형님)이 여성들 간의 호칭이고, 누나(누이)는 남자들끼리 손윗사람 부르는 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 때였다. 여전히 선후배와 연애상대는 구분되고, 여자의 몫과 남자의 몫이 다르다는 관념이 지속되고 있기는 했지만 서로간의 ‘장애’의 실체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다만 정체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더 많은 학습과 실천이 지속적으로 필요했다. 

홍안화수 

그 와중에 만난 책이 바로 오늘 소개할 ‘홍안화수紅顔禍水’이다.

홍안화수는 사실 끔찍한 단어이다. 홍안은 뛰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 때로 미소년의 뜻이다. 화수는 재앙의 빌미라는 뜻에서 화수禍祟로 흔히 쓰는데, 여기서는 ‘祟’ 대신 ‘水’를 넣었다. 나름의 전고가 있다. 

‘환비연수環肥燕瘦’, 귀비 양옥환은 몸이 풍만하고, 조비연은 몸매가 가냘프다는 뜻이다. 양옥환은 당나라 현종의 며느리였다가 귀비貴妃에 오른 여인이고, 조의주趙宜主(趙飛燕)은 동생인 합덕合德과 함께 입궁하여 한나라 성제成帝의 황후가 된 여인이다. 그들 자매는 황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불행하게도 용종龍種(황제의 자손)을 생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제가 사망하고 말았다. 문제는 이후에 발생했다. 유씨 정권의 적자가 아닌 방계에서 제위에 오른 애제哀帝에게 사례교위司禮校尉(지금의 감찰관)가 상소문을 올려 조비연과 조합덕 자매가 황제의 총애를 빙자하여 허미인許美人과 궁녀가 낳은 황제의 친생 아들을 비밀리에 죽여 후사를 끊었다고 고했다. 반고班固는 ‘한서’에서 이 일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아울러 이후 신新 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이 등장하여 서한 왕조를 찬탈하는 데 일조했다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다시 말해 그녀들을 전형적인 화수禍祟, 즉 재앙의 빌미로 삼았다는 뜻이다. 여기에 결정타를 날려 확인사살을 가한 것은 소설이었다. 한나라 사람 영현伶玄이 썼다고 알려진(당송시기의 작품으로 보임) ‘조비연외전’이 바로 그것인데, 과연 소설답게 온갖 상상력을 다 발휘하여 그네들과 관련한 추문을 마치 사실인양 묘사하고, 비연과 합덕을 화수禍水로 지목했다. 굳이 ‘수’를 쓴 것은 오행학설에 따르면 한조가 화덕火德이기 때문이다. 말인 즉 재앙의 물이 불(화덕)을 껐다는 뜻이니 서한이 망한 것이 바로 그네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후 계속해서 그녀를 소재로 한 색정소설이 쏟아졌다. 선정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명대 아무개가 편찬했다는 네 권짜리 소설 ‘소양취사昭陽趣史’는 비연을 연자정燕子精(제비요정), 합덕을 구미호九尾狐로 탈바꿈시켰다. 

이렇게 “소설가의 날조된 이야기를 통해 조비연과 조합덕 자매는 또 한 번 무참하게 강간을 당한 셈이다.”(181쪽)

국부와 주인 

역사가와 소설가의 날조는 사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소설(고대소설)은 주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해야 하는 문학 장르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오랜 모계사회가 끝나고 부계사회로 진입한 이후 남자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힘센 자를 중심으로 울타리를 만들고, 나름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었다. 울타리의 근간은 가족이고, 체계의 중심은 조祖(부 중심의 조상)였다. 이러한 가족체계가 그대로 국가체계로 이어져 이른바 ‘가국동구家國同構’가 형성되었다. 이로써 충효가 사람으로서 반드시 지켜야할 윤리도덕이 되고, 민가의 사당이 국가에서는 종묘가 되고, 태묘太廟(고대 황제의 종묘, 일명 명당明堂)의 본전인 묘당廟堂이 정사를 다루는 조정朝廷이 되었다. 가족이나 국가나 남자, 그것도 적장자嫡長子에 의해 혈통이 계승되었으며, 군주가 어느새 만백성의 어버이, ‘국부國父’가 되더니, 아비도 덩달아 임금과 동렬이 되어 집안 식구의 우두머리이자 집안 곳곳을 장악한 ‘주인主人’이 되었다. 역사는 바로 그들, 국부와 주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문학)은 그 이야기를 부연하고 확대 보급한다.

삼촌금련

‘홍안화수’는 전체 5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장은 ‘남자의 소유물이 된 홍안’(녹주, 식규, 하희, 앵앵), 2장은 ‘역사의 제물이 된 홍안’(문강, 조비연과 조합덕, 장여화, 이부인), 3장은 ‘문학작품 안에 갇힌 홍안’(말희, 달기, 포사), 4장은 ‘선택권을 갖지 못한 홍안’(양귀비, 진원원), 5장은 ‘화수와 영웅 사이’(서시, 초선)이다. 전체 16명의 홍안이 등장하지만 단순히 그녀들만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까닭은 서기 10세기 남당南唐 시절부터 청대말까지 오랜 세월 ‘삼촌금련三寸金蓮’(3촌, 즉 10cm 길이의 아름다운 전족)에 시달린 여인들의 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펑치차이馮驥才의 소설 ‘전족’(양성희 옮김, 더봄출판사, 2018)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작은 발은 수재秀才에게 시집가서 흰 쌀밥에 고기반찬 먹고요, 큰 발은 장님한테 시집가서 잡곡 찌꺼기만 먹지요.”

전족을 하면 평생 호의호식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말, 전족을 해야 여자가 된다는 말에 주인공 향련은 “발싸개 헝겊을 갈면서 피 맺힌 고름과 굳은살을 뜯어낼 때마다 하늘을 올려보며 오른손으로 왼손을 세게 꼬집었다.”(26~27쪽)

발이 작아 아장아장 걸으면 엉덩이 근육이 발달하게 되고, 씰룩대는 엉덩이는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한다. 군자, 사대부든 농투성이, 비렁뱅이든 변태變態를 정태正態라고 우겼다. 고통과 설움은 여자의 몫이고, 희열과 자랑은 남자 차지였다. 더 큰 문제는 그러고도 죄의식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 날조를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록산과 사사명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위태롭게 된 것은 누구 때문인가? 현종 때문이다. 현종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양귀비 때문이다. 양귀비는 왜 그러했는가? 홍안으로 화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뭐, 이런 엉터리 논법이 있는가? 자신의 며느리인 양옥환을 낚아채 귀비로 만든 것도 현종이고, 그녀에게 홀려 정사를 등한시한 것도 현종이다. 그런데 왜 양귀비의 목을 잡아맸는가? 쩨쩨하고 옹졸하다. 아니, 못되었다.

평등과 공정으로 

이는 함께 줄넘기를 하며 놀고 싶은데, 저건 여자들 놀이라고 지들이 정해놓았기 때문에 차마 같이 하지 못하고, 대신 고무줄을 끊어버리는 심보와 동일선상에 있다. 그 내원이 오래되고, 과정이 참혹했으며, 그 후과後果가 여전히 서로의 삶을 옥조이고 있다. 전족은 사라졌다지만 여전히 남과 여를 둘러싼 헝겊(차별, 혐오, 투쟁)은 벗겨지지 않았다. 해결 방법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남녀가 아닌 인간의 문제로, 섹스(성)가 아닌 젠더의 문제로 인지하고 차별과 갈등을 풀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이를 인지하고 학습하며, 실천에 옮기면 된다. 그것이 남자와 여자가 제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이자 문명화의 길이다. 문명이란 평등과 공정으로 향할 때 비로소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엊그제 북아일랜드 출신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잭 홀런드의 유작인 ‘판도라의 딸들 – 여성혐오의 역사’(김하늘 옮김, 메디치 미디어, 2021)를 읽다가 차마 더 읽지 못하고 덮고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내 지나온 삶에 반성할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다. 역서는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문화답사기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