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디 골아봅주’ 제주가치-제주의소리 공동기획] 백영경 교수·시민정치연대 제주가치 공동대표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 후 30년, 제주국제자유도시 출범 20년을 맞은 제주. 개발과 성장만을 외치며 달려온 오늘 제주의 모습은 도민이 바라던 행복과 풍요에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지난 30년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미래 100년을 향한 진단과 성찰, 그리고 근본적인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발적이고 다양한 정치참여를 통해 제주다움을 지키고 더 나은 제주를 만들어가려는 시민모임인 '제주가치'와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공동기획으로 마련한 릴레이 칼럼 ‘혼디 골아봅주’(함께 이야기해봅시다)를 매주 싣는다. 제주가 과잉관광과 난개발 위기로부터 탈출, 지속가능한 생태평화 공동체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제주가치 공동대표 8인의 참여로 도민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편집자 글]

백신 접종률이 올라가면서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위드 코로나’ 일지언정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여서 밥 먹고 어울리며, 학생들은 등교하고 가끔은 해외로 여행도 갈 수 있는 삶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지나간다고 해도 인수공통 감염병의 유례없는 확산이나 빈발하는 기후재난이 올해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 역시 늘고 있다. 지난 6일에는 세계적인 의학 학술지 251개가 기후변화 위기에 적극적 대응 움직임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기후변화에 대한 비상조치를 취해 지구 온도 상승을 막고 사람들의 건강을 보호해야 함을 전 세계의 지도자들에게 요구했고, 코로나19에 세계가 공동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국의 방역 대처가 상대적으로 우수했음은 사실일지 모르나, 문제는 성장주의나 개발의 전망을 넘어선 “다른” 미래를 모색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19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닥쳐올 위기상황에 단순히 적응하는 것을 넘어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다. 아마도 혹자는 현재 정부나 지자체가 내세우고 있는 “탄소중립 녹색성장”이 그런 길이 아닐까 기대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탄소중립의 녹색성장이 코로나19 이후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퍼져가고 있는 기존 삶의 방식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점점 심화하고 있는 불평등과 생존의 위기에 대한 해법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국판 뉴딜에 대한 거센 비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방역 성공을 발판으로 삼아 코로나19로 제기된 사회적 과제들을 풀어가겠다고 천명했음에도, 돌봄 위기에 대해서는 제대로 응답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국사회는 낮은 출생률에서 드러나듯이 코로나19 이전부터 이미 심각한 사회재생산 위기를 겪고 있었거니와 그 핵심은 돌봄의 위기였다. 감염병 확산 우려와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에 따른 사회적 돌봄의 실종은 가뜩이나 취약한 돌봄체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제주에서는 코로나19 발생 초기인 지난 3월 발달장애인 아들을 둔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기관의 폐쇄에 따른 문제를 환기시킨 바 있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문을 닫고 초·중·고등학교까지 개학이 연기되었으며, 장애인이나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시설 운영이 잇달아 중단됐다. 누군가는 코로나19로 느리고 여유 있는 삶이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당장 돌봐야 할 유아나 아동이나 환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혼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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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주에 필요한 것은 다양한 종류의 새로운 연대와 돌봄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며,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정치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여성운동에서는 돌봄의 책임이 가족 구성원, 그 가운데서도 여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돌봄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예년에 비해 아동학대나 가정폭력 신고 건수가 줄어들었지만, 이는 학대와 폭력이 줄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드러낼 기회마저 적어졌기 때문이며 현장에서 체감하기로는 위험에 처한 이들이 늘었다는 보고도 나왔다. 예컨대 아동학대 신고의무자인 교사 등이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면서 상황을 살피기 어려워진 것이다. 가정 내에서 아동을 돌보기 어려운 경우 긴급 돌봄이 제공되었다고는 하나, 정부가 취한 유연근무제 및 가족돌봄휴가 지원 정책은 기본적으로 돌봄의 책임을 가족에게만 지우는 경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온라인 수업과 등교수업의 병행 속에서 혼자 있는 초등학생의 수가 두배로 늘었고, 이러한 돌봄의 공백이 학습 격차를 비롯한 여러 문제를 발생시키는 현실 은 여성들의 경제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 

공적 돌봄의 공백이 여성들을 가정으로 소환하게 되고, 감염병 위기 상황에서 대면노동을 지속해야 하는 어려움이나 불안정한 일자리의 문제가 여성들을 위협하면서 다시 돌봄의 공백을 키우는 문제는 지난 11월 초 제주에서도 일어난 돌봄전담사 파업이 잘 보여준다. 돌봄 운영 주체를 교육청에서 지방자치단체로 넘기는 ‘온종일 돌봄체계 운영·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에 반대하는 파업의 참가자들은 특별법안이 통과되면 돌봄이 민간위탁 형태로 민영화되면서 비용 절감을 위한 민영화가 돌봄 서비스 질을 떨어뜨리고 공공성도 약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이들은 실제 근무시간을 반영하지 못하는 시간제 계약이 공짜노동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코로나19로 인한 돌봄 공백의 확대로 인한 고용 조건의 악화가 이들 여성노동자들을 파업으로 내몰았지만, 동시에 불안한 돌봄 체계 속에서 고통 받는 다른 (주로) 여성노동자들이 생겨난 셈이다. 이는 그저 하나의 사례일 뿐, 앞서 말한 사례 이후에도 발달장애인들의 어려움이 전국에서 보고되고 있고, 당장 줄어든 수업일수나 확진자 발생시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등교중단 사태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가정들의 문제가 있다. 또한 요양병원에 모신 노인들과는 면회가 중지되어서 겪는 문제, 가정에 계신 환자나 노약자의 경우 더욱 조심스러워진 돌봄의 어려움 등 코로나19에 따른 돌봄의 문제는 그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고, 돌봄이라는 것이 각 개인들의 필요에 따라 매우 다양한 양태를 띠듯이 실제로 노숙자와 장애인 등 이미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고 있던 사람들이 경험하는 문제라고 해서 어떤 특정한 하나의 지원으로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기도 한다. 

현실 세계에서 코로나19 사태를 겪는 시민들의 일상에서 돌봄의 위기는 감염의 공포만큼이나 직접적인 재난 경험이었기에 코로나19 이후의 사회를 상상하는 데 있어서도 이 문제가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언택트’가 새로운 ‘노멀’이며 디지털 기술이 감염병 위기의 해결책이기 때문에 새판 짜기에서도 이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주류적 시각은 돌봄 재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돌봄을 중심으로 하는 전환을 주장한다고 해서 돌봄노동이 공식 경제체제로 편입되어 다른 노동과 동등한 시장가치로 인정받기를 목표로 하지는 않으며, 기존의 성장지상주의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작동할 수 있도록 돌봄을 통해 보조하겠다는 뜻도 아니다. 물론 돌봄노동에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시장에서도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의 사회를 상상함에 있어서 돌봄이 중심이 된다는 것은 단지 기존 체제 내에서 돌봄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과는 다르다. 서로 의존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돌봄 중심의 시각은 그 자체로 성장과 이윤을 지상목표로 삼는 체제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따라서 돌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이란 성장 자체에서 탈피하자는 주장이며, 어떤 새판을 짤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제주에서는 어떤 새판을 짤 것인가? 단순히 코로나19에 대한 대처를 넘어서 기후위기를 비롯하여 지속적으로 닥쳐올 재난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탈성장논자들은 돌봄을 중심 원리로 하여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성장 위주의 시장 의존 경제의 비중 줄이되 그 과정에서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처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축소대상이 되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전환의 과정에서도 생계와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인류세의 상징과도 같은 화석 연료 산업, 탄광, 자동차, 항공 등의 에너지산업에 대한 공공지원을 줄이고, 지원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고용을 유지하고 해고를 어렵게 하는 조건을 걸 필요가 있다고 한다. 사회적 연대에 입각하여, 삶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는 것을 가장 중심에 놓고 돌봄의 원리를 원칙으로 하여 사회를 전환하자는 것이다.

필자는 삶의 기본적 필요 중에서 결국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사람이 나고 자라고 아프고 결국은 죽는 그 삶의 기본적인 과정이라고 본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기본적인 돌봄을 걱정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제주, 집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에서 병원비 걱정 없이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제주, 입시 압박에 시달리지 않고 각자 자신이 필요로 할 때 학비 걱정 없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제주,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면서도 평생 살던 마을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에서 적절한 돌봄을 받으며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제주. 사실 이러한 목표들은 우리가 위기 상황에서는 삶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도로나 건물이나 공항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삶의 기본을 간절히 원하기만 한다면 이룰 수 없는 목표가 아니다. 

백영경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돌봄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삶에서 중요한 것을 분별하고 이를 서로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는 곳곳이 불평등과 돌봄의 공백, 정의롭지 못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가운데 누구라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전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코로나19는 보여주고 있다. 지금 제주에 필요한 것은 다양한 종류의 새로운 연대와 돌봄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며,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정치이다. / 백영경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시민정치연대 제주가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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