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28) 서옥춘 어르신의 흰찰밥과 생선구이 ① / 김진경 베지근연구소장, 제주음식연구가

밥이 보약이라 했습니다. 바람이 빚어낸 양식들로 일상의 밥상을 채워온 제주의 음식은 그야말로 보약입니다. 제주 선인들은 화산섬 뜬 땅에서, 거친 바당에서 자연이 키워 낸 곡물과 해산물을 백록이 놀던 한라산과 설문대할망이 내린 선물로 여겼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진경 님은 제주 향토음식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입니다. ‘제주댁, 정지에書’ 시즌1에서 소개된 지난 1~25회 원고는 제주의 음식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서술이었습니다. 이어 ‘제주댁, 정지에書’ 시즌2로 마련된 26회 원고부터는 제주의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매월 한 분의 삶을 풀어낸 글을 격주로 소개하면서 그 속에 DNA처럼 배어있는 제주음식 이야기를 함께 교감하려 합니다. 인터뷰에는 일러스트 작가 '色色님'도 동행해 현장에서 영감을 찾아낸 아름다운 삽화도 매회 선사합니다. 할망 하르방이 들려주는 제주인의 삶과 제주음식에 깃든 지혜를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글]

서귀포시 월평마을 서옥춘 어르신의 제주음식이야기 ①

“네? 돗통시가 네 개나 있었다고요?”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돗통시는, 그러니까 제주 전통 가옥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이자 제주토종돼지를 기르는 곳은 한 집 당 하나였다. 성읍민속마을이나 나의 외가인 가파도에서도 한 집에 돗통시가 두 개 이상인 집을 보지 못했다. 제주 문화를 공부하기 위해 읽었던 책이나 기록에서도 한 집에 돗통시가 여러 개 있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의 머릿속에는 ‘민가 하나 당 한 개의 돗통시’가 공식처럼 각인되어 있었나보다.

그런데 2021년 7월의 어느 날, 서귀포시 월평동에서 만난 서옥춘 어르신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우리 친정은 도순인데, 돗통시가 네 개가 있었지요.”
“네 개나 있었다고요?”
“나 시집왔을 때 시집에는 돗통시가 세 개였고요.”

어르신의 부모님 댁과 할아버지 댁이 바로 붙어 있었는데 그 집들에 각각 두 개의 통시가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처음에 돗통시가 네 개나 있었던 이유가 식구 수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시기의 다른 평범한 가정처럼 서옥춘 어르신도 4남 2녀 중 차녀로 가족원 숫자는 다른 집과 대동소이 했다. 정답을 먼저 말하자면, 어르신 친정에 그렇게 많은 돗통시가 있었던 이유는 돗통시가 화장실의 용도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첫째, 잔치에 쓸 돼지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모두 알다시피, 제주에서는 중요한 의례 관혼상제에 필요한 고기를 얻기 위해 돼지를 키웠다. 가문잔치나 집에 상이 났을 때, 명절 전 돼지고기를 장만해야 할 때 통시의 돼지를 잡는데 이때 소용되는 돼지의 숫자는 가정에 따라 보통 한 마리에서 서너 마리까지 다양했다. 서옥춘 어르신의 가문잔치 때에도 집에 있는 돗통시의 돼지를 잡았는데 총 세 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보통 집에 오는 손님 수를 생각해서 돼지를 잡고 보통은 한 마리, 대접해야 할 손님들이 많으면 두 마리를 잡는다고 한다. 잡는 돼지 수에 따라 그 댁의 가문잔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둘째, 돗통시의 돼지는 농사에 꼭 필요한 거름을 만드는 역할을 했다. 서옥춘 어르신은 농사를 하기 위해서 좋은 거름이 필요했는데 그 거름을 내 주는 훌륭한 동물이 바로 돗통시에 있는 돼지라고 하셨다. 물론 소의 배변을 받아서 만드는 쇠거름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제주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돗거름을 낸다고 하셨다. 돗통시에 짚을 깔아주면 돼지들이 그 위에 배변활동을 하는데 그 짚과 돼지 배설물이 섞여 훌륭한 천연 비료가 되었다. 이렇게 만든 돗거름은 그 댁 소유의 밭에 쓰기도 했고 돗거름이 부족한 다른 농가에 주기도 했다.

셋째, 돗통시의 돼지들이 새끼를 낳으면 이를 장에 팔아 소득을 얻었다. 어르신은 부모님께서 돗통시에 있는 돼지들을 교미시켜 새끼를 만들어 시장에 가져가 팔아 돈으로 바꿔 오시는 것을 보며 자랐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새끼돼지들을 제주에서는 자릿도새기라고 하는데 가계 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돗통시를 그저 사람의 인분이나 먹고 식재료인 고기만 제공해 주는, 냄새나고 더러운 재래식 화장실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마 어르신의 말씀이 아니었더라면 돗통시가 제주인의 삶에 이렇게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돗통시는 제주 사람들에게 가장 가깝고 깨끗한 거름공장이었으며, 살림에 보탬이 되는 돈벌이 수단이었고 남은 음식물을 가장 친환경적으로 처리하는 처리장인 동시에 가정의 대소사에서 중요한 식재료를 생산했던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런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는 돗통시는 과연 제주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추억과 이야기를 생산해냈을까? 우리 세대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 시절 다른 집에 비해서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사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어르신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명확해졌다. 1936년생 그러니까 올해로 86세인 어르신은 소위 유학을 다녀오신 분이시기도 했다. 

요즘 시대의 유학의 의미와 어르신 시대의 유학의 의미는 조금 달랐다. 요즘 청년들은 ‘유학’하면 해외유학만 떠올리겠지만 어르신이 학생이었던 시절, 그러니까 1940-50년대 유학은 큰 도시로 나아가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을 의미했다. 서귀포시 도순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르신의 유학지는 ‘시내’, 즉 제주시였다. 나는 당연히 서귀포 지역 어르신들이 말하는 시내는 서귀포시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어르신이 태어난 1936년 당시 서귀포는 서귀면과 중문면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1956년 서귀면이 읍으로 승격된 후 1981년에야 서귀읍과 중문면이 서귀포시로 승격됐다. 서옥춘 어르신 세대의 유학은 ‘제주시내 학교 진학’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래서 제주의 어르신들, 특히 산남지방의 어르신들이 ‘시내 가야한다’ 혹은 ‘시내 시장 간다’라고 하신다면 이는 서귀포시가 아닌 제주시일 경우도 있으니 한 번 더 확인을 해 봐야 한다.

서옥춘 어르신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마치고 바로 제주시내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셨는데, 제주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초등교사가 되기 위해 제주시 광양에 위치한 도립제주도초등교원양성소에 입학하셨다. 교원양성소가 1953년에 도립사범학교로 승격되면서 어르신은 사범학교 2회 졸업생이 되었다고 한다. 사범학교를 마친 후 어르신은 바로 도순국민학교로 발령이 나서 긴 유학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셨다고 한다. 어르신은 80세 이상의 제주 어르신들 중 내가 제주에서 처음 만난 전문직 워킹맘이었다.

도순초등학교 근무 시절의 서옥춘 어르신(사진 오른쪽).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어르신은 시내 사촌 집에서 살며 학교를 다니셨다고 하는데, 아무리 사촌들이 살뜰히 챙겨준다고 해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컸을 것이다. 그래서 주말마다 도순 고향집으로 향하셨는데, 그 때마다 가장 고대했던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가 해 준 음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어르신께 물어보았다. 

“어르신, 학창시절 어머니가 해 준 음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엄마가 뽀얗고 하얀 찰밥에 촘지름을 넣어 비벼서 생선구이이랑 같이 주셨지요. 저는 그 음식이 가장 기억에 나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처럼 서옥춘 어르신의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타지 생활을 하는 딸이 제대로 먹지 못할까 걱정을 하셨나 보다. 그래서 그 마음을 담아 고소한 참기름을 넣어 비빈 찹쌀밥 한 숟가락 위에 가시를 잘 발라낸 옥돔구이를 얹어주신 것 같다. 그 따뜻한 밥상에는 딸을 위한 사랑과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 집에 오면 뜨끈한 찹쌀밥에 촘지름을 비벼 생선구이와 함께 내어주시던 우리엄마는 나에겐 든든한 지원군이셨습니다.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흰 쌀밥 위에 옥돔.

과거 제주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주 접할 수 없었던 음식이다. 대부분의 제주 어른들이 어린 시절, 곤밥과 생선을 만날 수 있는 드문 날 중의 하루는 아마 멩질(명절)날일 것이다. 서옥춘 어르신께 멩질날 만드시는 음식이 무엇인지 여쭤보았다. 어르신은 쌀밥과 옥돔, 돗궤기적은 기본이고 메밀쌀을 이용해 투명한 청묵을 쑤고 두부도 만들어 적을 만들었다고 하셨다. 생선으로 끓인 맑은 국과 고사리-콩나물-미나리로 만드는 탕쉬도 정성으로 만든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멩질날 마련하는 제물 중 가장 으뜸은 떡이라고 한다. 평소에 흰 쌀을 밥으로 지어 먹는 것도 어려웠던 시절 그 쌀을 가루 내 떡으로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사치였다. 하지만 쌀로 만든 떡이 허락되는 날이 있으니, 바로 멩질날이었다. 

방앗간도 없었던 시절 집에서 고레(맷돌)를 이용해 쌀을 갈았다. 이후 틀방도 생기고 방앗간도 생겨 집에서 쌀가루를 장만하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 왔고 지금은 떡집에서 떡을 맞춰 올리는 시대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집집마다 직접 가루를 장만하여 떡을 만들었단다. 어르신 댁에서는 곱고 흰 쌀가루로 만든 솔벤과 절벤, 인절미와 침떡(시루떡)을 만들었다고 한다. 

제주의 멧돌에는 풀고레와 정고레가 있다. 풀고레는 두부를 만들 때, 정고레는 곡식의 가루를 낼 때 사용한다. 사진의 고레는 풀고레. 사진=강만보, 제주학연구센터.

요즘 우리는 인절미라고 하면 찹쌀을 빻아 만든 인절미를 생각하지만 제주에서의 인절미는 멥쌀이나 메밀가루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납작하게 빚어 만든 떡이다. ‘은절미’라고도 부른다. 서옥춘 어르신은 침떡 위에 인절미를 올리고 그 위에 솔벤과 절벤 순서로 올렸다고 한다. 월평으로 시집 온 후에는 우리가 아는 이른바 제주송편도 빚어 올렸는데 그 당시에는 어르신 댁에는 완두콩은 없었고 집에서 농사 지은 적두(팥)이나 녹두를 소로 넣고 빚었다. 별을 상징하는 기름떡도 친정에서부터 배워 온 것이 아니고 시집 온 후 세월이 조금 흐른 다음 어느 날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회고하셨다. 

멥쌀가루를 익반죽하여 정사각형으로 썰어 시루에 솔잎과 켜켜이 안쳐 찐 떡이다. 찐 떡은 솔잎을 떼고 찬물에 헹구어 건져 참기름을 바른다. 사진=전통향토음식용어사전, 농촌진흥청.
멥쌀가루를 익반죽하여 정사각형으로 썰어 시루에 솔잎과 켜켜이 안쳐 찐 떡이다. 찐 떡은 솔잎을 떼고 찬물에 헹구어 건져 참기름을 바른다. 사진=전통향토음식용어사전, 농촌진흥청.

제주에서는 대추와 밤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조율이시(대추, 밤, 배, 감)를 차려 상에 올리지는 않았고 과일은 오로지 미깡낭에서 벤줄이나 댕유지를 따서 올렸다고 한다. 벤줄은 병귤의 제주말로 제주의 재래감귤의 일종인데 흡사 한라봉과 그 모양이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제주는 집집마다 우영팟에 미깡낭, 즉 감귤나무 하나씩은 있었는데 그 쓰임이 제주의 명절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서옥춘 어르신은 웃으며 팔월 멩질인 추석에 올리는 귤은 익지 않은 시퍼런 귤이라고 하셨다. 생각해보니 정말 추석은 아직 귤을 수확하기에는 이른 시기이다. 그러니까 약 40-50년 전의 추석 멩질의 상차림은 1980년대생인 나의 머릿속에 있는, 사과, 배, 귤 등이 올라간 화려한 색감의 명절 상차림과는 다른 모양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제주의 명절상도 시대의 흐름에 의해 계속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의 병귤은 오늘날 제주 만감류를 대표하고 있는 한라봉 모양과 흡사하다. 제주사람들은 병귤을 벤줄이라 부른다. 사진=나무위키

어르신 댁 멩질상에 올리는 술로는 차조로 빚어 윗국만 뜬 청주인 오메기술이나 발효한 술을 고소리로 증류시킨 고소리술을 올렸다. 또 차조에 엿기름을 넣어 당화시킨 후 끓인 골감주도 꼭 함께 내었다고 한다. 멩질날은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기 때문에 늘 음식과 술을 넉넉히 만들어 두셨는데 특히 골감주를 폴폴하게 끓여 약간 걸쭉한 느낌이 되도록 만드셨다고 한다. 멩질날 친척들이 집에 오면 꼭 그 골감주에 음식을 똑같이 나눠 반(접시)에 담아 함께 대접했다고 한다. 이 골감주를 오래 끓이면 제주식 떠먹는 엿이 되는데 그 엿에 멩질떡을 찍어먹으면 그 맛이 가히 일품이라고 한다. 

추석 후 음복을 위해 반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이토 아비토, 제주학연구센터.

가만히 앉아 어르신의 멩질음식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는 제주의 전통음식들이 마치 백과사전을 보는 것처럼 펼쳐진다. 제주의 멩질상에 올라간 음식들이야 말로 진정한 제주문화를 설명해 주는 음식이 아닐까. 서옥춘 어르신은 멩질음식을 준비하면서 학창시절 친정엄마가 해 주셨던 흰찰밥에 옥돔구이가 떠올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어머니가 해 주신 그 정성과 마음을 생각하며 어르신 또한 정성을 다해 멩질음식을 만드시지는 않으셨을까?

명절음식은 곧 느끼하고 기름진 음식들이라고만 생각했던 나 같은 젊은이들에게 서옥춘 어르신의 멩질음식은 조금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다. 소박하고 담백하지만 진짜 제주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 흰 쌀밥 한 수저에 옥돔 한 점으로도 풍요로웠던 제주의 진짜 명절음식, 평소에 쉽게 먹을 수 없었던 돼지고기와 메밀묵을 쳐다보는 그 시절 아이들의 설렘과 초조함은 어땠을까? 그 음식들이 누구나 접시에 똑같이 나눈 후 내 이름이 불릴 때의 그 행복함은 우린 짐작해 볼 수 있을까? 흰 쌀떡에 골감주로 만든 엿을 푹 찍어 입안에 넣는 그 행복함을 우리는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어르신이 말로만 이야기 해 주셨는데도 이미 내 눈앞에 풍성한 한가위 음식이 차려진 것만 같았다. 이번 팔월 멩질에는 나도 골감주를 끓여 만든 엿과 흰 쌀떡을 준비해보아야겠다. 그렇게 소박하고 담백한 제주의 음식 문화를 우리 아이들의 입속에 넣어주며 작은 행복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제주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가르쳐 주어야겠다.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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