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호의 짧은 글, 긴 생각] 마흔여덟 번째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1. 부모가 자식을, 대속죄(代贖罪)

공군 대위로 전역하고 현대자동차에 입사하여 차장으로 고속 승진한 송석춘(76) 씨. 당시 대졸 초임이 2만원일 때 15만 원을 받았으나 좋은 직장을 퇴사하고 아들 둘, 딸 셋을 데리고 미국 플로리다로 이민을 갔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인 큰 아들(송시영)이 교도소에 가게 되었다. 자식을 잘 키우겠다고 이민 왔는데 아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고, 미국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고 그 때마다 아들은 반격을 가했고, 이 때문에 교장에게 여러 차례 불려가 체벌을 받았다.

불만이 쌓인 아들은 어느 휴무일 이틀 동안 다른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학교에 들어가 건물 이곳저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지역신문 1면에 났고 온 가족은 좁은 응접실 구석에 모여 앉아 통곡했다. 송석춘씨 큰아들 밴덜리즘(기물파손) 사건을 크게 다룬 1978년 2월 4일자 ‘센티널 스타’(현 올랜도센티널)1면. 이 신문은 송 씨가 “내 아들이 죄를 지었으면, 내가 죄를 지은 것이다. 내 아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변상은 물론 어떤 일이든 하겠다”고 말한 내용을 실었다. “한국인의 얼굴에 먹칠했다”라는 비난은 기본이었고, 등하교 때 “그 집을 피해 가라”는 한인들도 있었고, “같은 교육구 학교에 내 아이를 보낼 수 없다”라며 전학을 시키는 부모도 있었다. 어떤 젊은 한인은 면전에서 “당신 자식 교도소에 갔다며?”하고 빈정거리며 말했다. 교장은 “세상에 이렇게 학교 건물을 때려 부순 사건은 처음입니다. 카운티(County: 자치주) 내의 어떤 학교에도 전학이 불가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했다.

그는 '아들 죄가 바로 내 죄'라 생각하고 속죄를 위해 매주 주말에 온 가족을 동원하여 학교 청소를 하겠다고 했고​ 교장은 ‘별난 아버지’라는 표정으로 허락했다. 이 별난 행동은 나중에 다시 한 번 플로리다주 주류 사회를, 아니 전 미국을 흔들었다. 교도소에 간 중학교 2학년 아들의 속죄를 위해 부부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네 아이와 함께 주말마다 학교에 나와 청소하는 장면을, 운동장을 청소하는 광경을, 기사에는 “내 아들이 죄를 지었으면 내가 죄를 지은 것이다. 내 아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변상은 물론 어떤 일이든 하겠다”라는 그의 말이 들어 있었다. 미국 전역의 신문들이 AP통신 기사를 받아쓰면서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며칠 만에 수백 통의 편지가 왔다. 변호사비로 쓰라며 5불, 10불짜리 수표와 현찰을 동봉하기도 했다.

미국의 신문들은 아버지의 '아들 죄가 바로 내 죄'라는 고백을 들어 “미국인 부모들도 본받아야 한다”라거나 “미국 교육계도 유교적 가족관계에서 이뤄지는 독특한 교육 철학을 배워야 한다”라는 논지의 기사와 논평을 내보냈다.

며칠 후에 반가운 소식이 가족에게 전달됐다. 법정에서 아들을 방면한다는 소식이었다. 교육청에서는 다니던 학교로는 되돌아 갈 수 없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학교에는 갈 수 있다는 서한도 보내 왔다. 그 후 말썽꾼 아들은 변하여 센트럴 플로리다 대학교(UCF) 학사와 플로리다 텍(FIT)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 우주항공국(NASA) 산하 방산업체에 근무하며 고위 우주선 탑재 전문가가 되었다. 우주선을 쏘아 올릴 때 수십 명이 달라붙어 점검하는데 그 가운데 최고참으로 일하고 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오는 VVIP들에게 직접 브리핑하는 유일한 한국계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대속(代贖) 할 수 있다. 내 몸처럼 사랑하기 때문이다. ‘기름때 묻은 원숭이의 미국이민이야기’ 책 중에서 옮겨봤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견해로 미루어 여묘제도는 신주제도가 확립되기 전에 시신이 묻혀 있는 곳에 죽은 사람의 혼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행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이러한 여러 가지 견해로 미루어 여묘제도는 신주제도가 확립되기 전에 시신이 묻혀 있는 곳에 죽은 사람의 혼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행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 자식이 부모를, 시묘(侍墓)

부모의 상을 당하여 성분(成墳)한 다음, 그 서쪽에 여막을 짓고 상주가 3년 동안 머무는 상례의식을 상례, 여묘(廬墓)·거려(居廬)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시묘는 죽은 부모에 대한 가장 효성스러운 행위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의조(李宜朝)의 ‘가례증해(家禮增解)’나 정구(鄭逑)의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에 의하면 이 시묘제도는 중국의 한(漢)·후한(後漢)·진(晉) 때에 행하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응진(李應辰)의 ‘예의속집(禮疑續輯)’에 의하면 “여묘는 경서(經書)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예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주자가 일찍이 행했기 때문에 힘을 얻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나, 지금은 때가 다르다”라고 하였다. 주자는 어머니상을 당했을 때 반곡(返哭:시신을 매장한 후에 본가로 혼백을 모시고 오는 상례의 절차)을 하여 신주를 궤연(几筵:죽은 자의 혼령을 위하여 차려놓은 영좌와 그에 딸린 모든 물건, 상청을 말함)에 모시고 시묘를 하면서, “삭망(朔望)에는 궤연(几筵)에 모시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주자가 시묘에 대해 부정적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례’에는 여묘에 대한 언급이 없이, 신주를 만든 뒤에 곧 반곡의 절차를 들고 있다. 즉, 축관이 신주와 혼백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와 궤연을 설치한 다음 상주가 지키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송인(宋寅)은, 여묘는 사사로운 것으로, 진실로 하고자 하면 금할 수는 없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의 여묘는 정몽주(鄭夢周)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여묘가 나쁜 것이 아니라 반주(返主)를 하지 않고 여묘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이재(李縡)는 첫째 아들은 궤연을 지키고, 둘째 아들이 여묘를 하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견해로 미루어 여묘제도는 신주제도가 확립되기 전에 시신이 묻혀 있는 곳에 죽은 사람의 혼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행위. 그러다가 신주제도의 발달에 의하여 신주에 죽은 사람의 혼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면서, 점차 그 제도나 행위가 의미를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는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
우리 고향에서는 조선 초기 고득종(高得宗)과 처남 매부인 문방귀(文邦貴)도 제주 고향에서 3년 시묘를 해 벼슬길에 올랐다.

3. 전주의 기계공학 전공 임재규 교수의 20년 시묘 

전주 산골야산에 부모를 모시고 20년을 시묘하는 친구가 있다. 묘소 앞에 집을 짓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묘소앞 텃밭을 메고 산다. 책도 쓰고 연구도 한다. 현대판 시묘이다.

그래서인가. 큰 아들은 서울 중앙기관의 본부장을 하고 둘째는 전주 유명 병원에서 전문의 교수다. 그 친구가 하는 말, 자네는? “글쎄, 나는 건지산 왕능의 이한(李翰~750?) 전주이씨 시조에 수탁(手鐸)을 새벽 4시에 올리네.”

# 이문호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 전기통신 기술사(1980)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울릉공- RMIT대학, 독일 뮌헨,하노버-아흔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공학부 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최초 Jacket 행렬을 발견했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과학기술훈장 도약장,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선정, 2018년 한국공학교육학회 논문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제주문화의 원형(原型)과 정낭(錠木) 관련 이동통신 DNA코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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