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42) 대천 바다가 술이라도 먹을 놈 없으면 허사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 대천 바당 : 대천 바다
* 엇이민 : 없으면
* 허산다 : 허사(虛事)이다

술은 애주가들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기호품이다. 무료하고 무미건조한 시간을 술 몇 잔 하면 살맛이 난다. 삶에 술은 흥을 돋워 주는 윤활유 같은 것이다. 판소리 한마당에 얼쑤 하는 추임새가 창에 신명을 불어 넣듯 하는 게 한잔 술이 아닌가.

진수성찬 산해진미를 갖춰 상다리가 미어진다 해도 마실 술이 없으면 음식 맛이 싹 가시고 마니, 알다가도 모를 것이 술이다. 잘 차려놓아도 술이 빠지면 푸대접이 되고 말지 않는가 말이다.

사시사철을 두고 농사일에 매여 사는 농부들에게 어찌 예외랴. 사래 긴 밭을 갈다가 지치고 목이 마를 때, 잠시 쟁기 연장 세워 두고 밭가 솔밭에 흐르는 땀을 들이며 한 사발 쭉 들이켜는 막걸리 맛, 신선주가 따로 있을쏘냐.

잘 차려놓아도 술이 빠지면 푸대접이 되고 말지 않는가 말이다. 사진=픽사베이.
잘 차려놓아도 술이 빠지면 푸대접이 되고 말지 않는가 말이다. 사진=픽사베이.

그러고 난 뒤에 쟁기를 잡으면 뒤뚱거리던 밭갈이가 신바람이 나는 법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막걸리를 탁한 술이라 해 탁주라 했으니 농군(農軍)의 술이라 함이 아닌가.

예전에는 잔칫상에 제일 눈독을 들이던 게 술이었음은 말할 것이 없었다. 잔치는 말 그대로 벌이는 것인데, 술을 안 마실 수가 있는가. “어이, 여기 한 병 더.” 찾느니 술이었다. 몇 잔 들어가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던 게 주거니 받거니 잔칫집 수작(酬酌)이었다. 그런 게 잔칫집 풍경이었다.

한데 요즘 그런 풍경은 언제부터인가 슬며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차를 가지고 와서…” 가을 안 마시는 구실이 돼 버린 세상이다. 축축이 젖어야 할 자리가 바싹 말라 버렸다. 그러면서 사람 사이가 소원해 간다. 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술이 없게 되면서….

‘대천 바당이 술이라도 먹을 놈 엇이민 허산다.’ 백번 맞은 말이다. 술이 바닷물처럼 많으면 무엇 할 것인가. 마실 사람이 없으면, 그 귀하고 좋은 술도 아무 데도 쓸데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당연한 말이다.

유사한 예들이 있다.

‘한라산이 금뗑이라도 쓸 놈 엇이민 못 쓴다(한라상이 금덩이라도 쓸 놈 없으면 못 쓴다)’
‘갯것이 작지가 떡이라도, 먹을 놈 엇이민 허산다(바닷가에 자갈이 떡이라도 먹을 놈 없으면 허사이다)’

무엇이든 소용이 닿아야 존재로서 가치가 있다 함이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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