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81) 가을 편지/권혁모

떠날 때를 알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낙엽. ⓒ김연미
떠날 때를 알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낙엽. ⓒ김연미

한 때 저 낙엽도 못 이룬 꿈이 있었을까
보내 준 손수건이 울긋불긋 살아나서
연둣빛 속잎에 쌓인 가을 편지를 읽는다

자, 빛을 사세요 연보라 빨강 노랑
천국의 눈물이 모여 우유니호수*가 된
눈目이여, 한번 빠지면 돌아 못 올 저문 강

떠날 때를 아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 지
사랑의 그 꽃말을 다신 전하지 않으리
마지막 지상에 남아 두 손 가만 모은다

*남미 볼리비아의 소금 호수

아침 저녁으로 긴팔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추석이 지났으니 아직까지 여름 옷을 입고 다니는 게 예년 같으면 말이 안되지만, 요즘 어디 기온이 계절 따라 가던가. 여름에 뜬금없이 추워져서 긴 팔을 꺼내 입고, 겨울에 짧은 팔 티셔츠 한 장 걸치고 다니는 젊은 애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이러니 추석이 지났다고 곧장 가을이 올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이제 제법 바람 끝에 가을 감촉이 묻어난다. 

살짝, 그렇게 가을 냄새가 난다 싶었는데, 자연은 어느새 계절 한복판에 와 있는 듯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어젯밤 내린 비를 타고 지상에 내려와 아침 현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낙엽. 먼 길 떠날 채비를 다 마치고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떠날 때를 아는 것’, 비록 ‘못 이룬 꿈’이 있더라도 떠날 때에 맞춰 훌훌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속잎에’ 숨어 있던 ‘연둣빛’ 낙엽과 이제 막 제 본질을 드러내고도 거기에 미련 같은 건 애초 없다는 듯 무념무상 내려와 앉은 ‘빨강, 노랑’ 잎들이 숭고하다. 

그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얼마나 많은 애를 썼으며, 얼마나 많은 날들을 눈물로 지새웠던가. 짜디짠 눈물이 호수가 되어 그 호수 다 마를 때까지 가슴을 졸이다, 결국 소금덩어리만 남을 때까지 뜨겁게 살았다. 온몸을 다 바쳐 갈망해 본 것들만이 이 가을, 이별 앞에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지상에 남아 두 손’을 모은다. ‘사랑의 그 꽃말을’ 굳이 언어로 바꾸어 전하지 않아도 속엣말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계절. 잠시 발길을 멈추고 떠나는 것들의 뒷모습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다. 가을이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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