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29) 서옥춘 어르신의 곤떡 / 김진경 베지근연구소장, 제주음식연구가

밥이 보약이라 했습니다. 바람이 빚어낸 양식들로 일상의 밥상을 채워온 제주의 음식은 그야말로 보약입니다. 제주 선인들은 화산섬 뜬 땅에서, 거친 바당에서 자연이 키워 낸 곡물과 해산물을 백록이 놀던 한라산과 설문대할망이 내린 선물로 여겼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진경 님은 제주 향토음식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입니다. ‘제주댁, 정지에書’ 시즌1에서 소개된 지난 1~25회 원고는 제주의 음식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서술이었습니다. 이어 ‘제주댁, 정지에書’ 시즌2로 마련된 26회 원고부터는 제주의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매월 한 분의 삶을 풀어낸 글을 격주로 소개하면서 그 속에 DNA처럼 배어있는 제주음식 이야기를 함께 교감하려 합니다. 인터뷰에는 일러스트 작가 '色色님'도 동행해 현장에서 영감을 찾아낸 아름다운 삽화도 매회 선사합니다. 할망 하르방이 들려주는 제주인의 삶과 제주음식에 깃든 지혜를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글]

서귀포시 월평마을 서옥춘 어르신의 제주음식이야기 ②

1936년에 태어나신 서옥춘 어르신은 혼인 하고 슬하에 4남 2녀를 두셨는데 혼인 후에도 계속 직장생활을 하셨다. 말하자면, 그 당시에 보기 드문 ‘워킹맘’이셨다. 서옥춘 어르신은 근무하시던 학교의 교장 선생님 중매로 혼인을 하셔서 월평마을에서 거주하기 시작하셨는데, 임신한 뒤 출산을 앞둔 상황에서도 매일 서귀포시 월평에서 도순까지 걸어서 출퇴근을 하셨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 당시 대부분의 직장여성이 결혼을 하면 일을 그만두는 것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사셨던 것이다.

사진=김진경.
서귀포시 월평마을 서옥춘 어르신. 사진=김진경.

어르신은 첫 아이를 출산하고 한 달 정도 몸을 추스르고 다시 복직하여 일을 이어나갔다. 지금에야 정부에서 안정적인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제도를 통해 산모가 충분히 몸조리를 하고 육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만, 그 당시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이야기였다. 그 시절 대부분의 제주 여성들은 아기를 낳고 2~3일 몸을 추스르고 바로 밭일이나 물질을 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서옥춘 어르신의 복직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르신의 기억에 월평마을에는 집에서 출산할 때 산파의 역할을 했던 애기할망이 계셨다고 했다. 어르신 역시 산고의 고통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방에 보리짚을 깔고 그 위에 깨끗한 천을 덮어 산방을 마련한 후 산고의 고통을 애기할망과 온 몸으로 감내하며 출산을 기다렸다. 첫 아이 출산 시 어르신의 나이 22세. 현재 20대 초중반의 친구들을 생각한다면 어린 나이에 그 무시무시한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저려온다. 나 역시 겪어본 고통이지만 그 한창 어리고 예쁜 나이에 엄청난 출산의 고통이라니. 그때, 월평마을의 애기할망은 서옥춘 어르신의 손을 잡고서 그저 담담하고 나지막하게 이야기 하셨다고 한다.

“좀만 ᄎᆞᆷ으라, 좀만 ᄎᆞᆷ으라.”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차분하게 출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따뜻하고 묵직하게 건네신 애기할망의 목소리야말로 차가운 분만실의 기계 소리와 간호사들의 외침보다 훨씬 강력한 무통 주사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할망의 도움으로 아이를 출산한 후 서옥춘 어르신은 시어머니에게 첫 메밀조배기를 받으셨다. 메밀이 궂은 피를 맑게 해준다고 믿고 있는 제주어르신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산모에게 첫 음식으로 메밀을 질게 반죽하여 숟가락으로 떠 넣어 익힌 메밀조베기를 만들어 주신다. 어르신의 기억에는 바다에서 캔 미역도 함께 넣어 푹 끓여 산모가 넘기기 쉽도록 만든 메밀조배기미역국었다고 한다. 조배기와 함께 붉바리나 다금바리를 넣어 만든 국도 출산 후 특별히 먹었던 국 중 하나라고 하셨다. 또 젖이 잘 돌라는 의미에서 아강발을 푹 고아서 만든 아강발국도 역시 산후에 먹어보았던 음식이다. 이러한 산후조리 음식 마련은 어르신의 시어머니가 도맡아 하셨다고 한다. 나 역시 아이를 출산하고 친정어머니가 만드신 메밀조배기와 아강발국을 먹으며 산후조리를 했기 때문에 어르신의 말씀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다만 출산일이 다가오면 시어머니가 장에 가셔서 유통(소젖통)을 미리 주문하신 다음, 출산 후에 받아와 푹 달여서 주셨다고 했는데 나에게는 생소한 음식이라 그 맛이 궁금했다. 이 유통 역시 아강발처럼 모유가 잘 나오기를 바라는 시어머니의 바램이 담긴 제주의 산후음식이었다.

그렇게 신생아를 시기를 겨우 넘긴 아기를 집에 남겨 둔 채, 어르신은 다시 복직 하셨다. 교편을 잡으시면서도 집에 있는 아기들이 생각나 몇 번이고 눈물을 훔치셨다고 한다. 밭일이나 물질을 가는 어멍들이야 아기구덕 채 들고 밭에 가서 틈틈이 아이를 보기도 했다지만 서옥춘 어르신은 학교에 아기들을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아기들이 너무 보고 싶어도 근무시간만큼은 갈 수 없는 처지라 마음만 자꾸만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향하셨다고 한다.

매일 아침 출근을 해야 했기에, 집안 살림 내팽겨 둔 채 직장만 다니는 여자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서옥춘 어르신은 집안일도, 농사도 뭐든 마다하지 않고 했다고 한다. 당시 소유하고 있던 밭이 꽤 컸기 때문에 직장을 다닌다고 해도 나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퇴근 후 남은 육아와 집안 살림도 어르신 손으로 다 해냈고 집에 명절과 제사 때 음식도 역시 어르신 손으로 만드셨다. 물론 당연히 며느리로서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시기도 했지만, 그 당시 흔치 않던 워킹맘이었기 때문에 집안일에 소홀할 수 있다는 선입견이 생기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더욱 고생스럽게 살았던 것 같다고 하셨다. 어르신은 쉬는 날이면 자식들을 모두 밭으로 데려가 보리농사에 손을 보탰고 손이 많이 필요할 때에는 하원의 여성들을 30여 명 정도 직접 빌어 보리경작을 하기도 했다. 보리수확 중 시원한 쉰다리를 한 잔 씩 대접하면 다들 좋아했다고 한다. 갈증도 풀리면서 활력도 돌게 하는 음식으로 쉰다리만한 음식이 없었다고 회고하셨다.

그렇게 15년 동안 교사생활을 이어가시다 집 마당에 넘어지면서 큰 사고를 당하셔서 아쉽게도 일을 그만두셔야 하게 되었다. 그 이후 어르신 댁에서 고구마 전분공장도 운영하셨었던 터라 일을 그만두었어도 신경 써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싫은 티를 내지 않고 당연히 엄마가, 아내가, 또 며느리가 해야 일이라고 생각하시고는 묵묵히 살아오셨다고 한다. 

나는 옆마을에 있는 학교를 매일 걸어 출퇴근을 했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밥도 해야하고 밭일도 해야만 했지요. 그렇게 결혼을 하고 15년을 아침마다 어김없이 출근을 했습니다. ⓒ이로이로
나는 옆마을에 있는 학교를 매일 걸어 출퇴근을 했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밥도 해야하고 밭일도 해야만 했지요. 그렇게 결혼을 하고 15년을 아침마다 어김없이 출근을 했습니다.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집집마다 보리로 누룩을 만들어 술을 만들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서옥춘 어르신 역시 어르신만의 술 레시피가 있었다. 검은 차조를 가루 내어 만든 오메기떡에 누룩을 넣어 발효한 술의 윗국인 ‘오메기청주’는 어르신만의 특별한 재료를 첨가해 더욱더 다채로운 맛과 풍미를 갖추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비법은 바로 꾀까루, 즉 볶은 참깨이다. 어르신은 참깨가루를 오메기 떡에 섞어 술을 빚었다고 하신다. 나는 어르신께 왜 볶은 참깨를 넣어 오메기술을 만드셨냐고 물어보았다. 

“꾀까루를 넣어 만들면 고소한 맛이 배가되지요”

이쯤 되니 어르신이 만든 오메기술의 향과 색, 맛이 궁금해진다. 집마다 김치의 맛과 장의 맛이 조금씩 다르듯 서옥춘 어르신 역시 어르신 댁만의 비법 오메기술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또한 오메기청주에 달걀노른자, 꿀, 참기름, 생강을 넣어 만든 오합주는 서옥춘 어르신 집에서는 ‘영양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어르신은 큰아들을 팔 때, 즉 가문잔치에 소주에 감귤을 넣어 감귤소주를 만드셨는데 어르신이 만든 감귤소주는 사람들이 자꾸 술잔을 내밀었던 매력적인 술이었다고 하셨다.

또한 기억하건데, 큰아들의 가문잔치에 내놓은 떡은 마을 사람들과 괸당들이 함께 나누는 떡으로 생각하시고 흰 쌀을 갈아 곤떡으로 장만하였다. 멥쌀을 익반죽해서 네모나게 빚어 삶은 은절미는 새각시가 먹을 용도로 만들었고 쌀가루를 삶아 치댄 후 성형하여 동그란 솔변틀로 찍어낸 솔변과 절변틀을 이용해 만든 절변에 팥을 묻힌 등절비도 만들었다.

서귀포 지역의 일부에서는 결혼식이 치러지는 전날을 가문잔치, 결혼식 당일을 흰 잔치라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어르신들도 그 이유를 잘 모르신다고 한다. 짐작하자면 가문잔치의 가문을 ‘감은’, 즉 검다는 뜻으로 생각 한 후 위트있게 결혼식 당일을 흰 잔치라고 한 것 아닐까. 혹은 내가 모르는 다른 의미가 있어 흰 잔치로 불렸을 수도 있다. 서옥춘 어르신도 결혼식 당일을 흰 잔치라고 표현하셨다. 그렇게 준비해 둔 흰 떡은 흰 잔칫날, 새각시가 어르신의 집으로 들어오면 비로소 그 쓰임에 맞게 사용되었다. 은절미는 새각시가 먹는 떡으로, 절변이나 등절비는 차롱에 어여쁘게 담아 뒀다가 새각시를 보러 온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셨다. 당시 귀한 쌀로 떡을 해서 먹을 수 있는 날이 몇 없었던 시절, 결혼식을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흰 떡으로 나누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셨던 듯 싶다. 그 떡을 받고 입이 귀에 걸린 동네 꼬마들의 얼굴을 보면 마냥 함께 행복하셨다고 하니 긴 가문잔치 일정, 신경써야 할 일이 많은 긴장감의 연속에 잠시나마 긴장의 끈을 살짝 내려놓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매개체가 그 차롱 속 흰 떡이 아니었을까 싶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 어르신 댁에서 운영하던 고구마 전분공장은 마을사람들이 재배하여 고구마를 받아 전분을 만들었고 전분이 만들어 지며 나오는 부산물인 쭈시는 마을 돗통시의 돼지들에게 먹이로 활용되었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했던 그 시절, 전분쭈시는 돼지들에게 꽤 고마운 먹거리가 되었던 것이었다.

사진=김진경.
서옥춘 어르신 댁에 처음 간 날, 어르신은 먹을 것을 준비해 두고 맞이하고 계셨다. 사진=김진경.

어르신은 틈틈이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시는데 어르신 댁에서 발견한 이 한 장의 종이를 보고는 나는 무릎을 쳤다. 서옥춘 어르신을 설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딱 맞아들었던 이 종이 한 장. 나에게 어르신은 그런 영감을 주는 어르신이다.

행복을 주는 삶이 원칙
미소는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인사는 우리 마음을 열게 한다
대화는 서로의 이해를 도와준다
칭찬, 감사는 서로 용서를 심어준다
비난하기 보다는 이해를
비판하기 보다는 협조
불평하기 보다는 칭찬

종이를 마주하고 한 글자씩 가만히 곱씹어 읽어보았다.

일하는 여성으로, 딸로,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살아온 어르신의 인생이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스며있는 것 같았다.

사진=김진경.
어르신은 틈틈이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신다. 글 마디마디에는 어르신 인생의 스며있는 듯하다. 사진=김진경.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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