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두 세상 이야기 / 고봉진 객원논설위원·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최근 뜻하지 않게 ‘주역’에 나오는 단어를 알게 됐다. ‘화천대유(火天大有)’와 ‘천화동인(天火同人)’으로, 주역 64괘(卦) 중 14번째 괘와 13번째 괘이다. LH 사태가 있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이런 사태를 접하는지 모르겠다. 올해의 단어를 꼽으라면 아마도 ‘화천대유’나 ‘LH’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윤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드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를 넘으면 범죄가 된다. ‘대장동 택지개발’과 ‘LH 사태’가 대표적이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부동산과 관련해서는 민간기관이든, 공공기관이든 ‘이 참에 떼돈 벌어보자는’ 생각밖에 없는 모양이다. 

또 다른 세상의 국민이 있다. 88만원 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인 청년들이다. (2020년 8월 기준) 36.3퍼센트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코로나 이후 부쩍 늘어난 음식배달 플랫폼 노동자들이다. 며칠 전 아파트 외벽을 청소하다 추락사한 20대 청년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다. 아르바이트 첫째 날이라던데, 보조 밧줄만 있었더라도 살 수 있었다. 

천정부지로 뛰는 자본가치에 비해 노동가치는 추락했다. 최저임금을 올리려 해도 자영업자의 비용 상승 때문에 많이 올릴 수도 없다. 비정규직이 정상이 되었다. 불안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도처에 있다. 무심코 지나가는 우리에게 그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저쪽의 세상과 이쪽의 세상은 엄연히 구분된다. 영화 ‘기생충’이 그랬고, 최근 신드롬을 일으킨 ‘오징어게임’도 이를 배경으로 한다. ‘두 세상 이야기’가 영화 소재가 되고 흥행하는 건 좋지만, 현 시대를 반영하기에 왠지 씁쓸하다. 

부의 양극화에 따른 계층간 양극화는 모든 것에서 격차를 가져왔다. 그 격차는 줄지 않고 점점 커진다. 주거 공간이 분리되고, 교육 기회가 차별화되고, 생활 방식이 달려졌다. 계층 이동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두 세상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이다. 

27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에 위치한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에 위치한 '화천대유' 사무실. ⓒ 오마이뉴스 이희훈

평등한 사회라고 하지만, 형식적 평등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에서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노동자의 노동을 너무 쉽게 산다. ‘총알 배송’을 자랑하지만, 그 이면을 알면 부끄럽다. 돈의 가치에 다른 모든 가치가 녹아버린 맘몬의 세상에서 ‘가치의 왜곡’을 우리는 애써 외면한다. 이미 인간종은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진화했는지 모르겠다. 

헨리 조지(Henry George)는 1879년에 출간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에서 토지사유제의 궁극적 결과는 ‘노동자의 노예화’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는 현재 존재하는 토지사유를 없앨 수 없기에 현실적인 방안으로 불로소득으로 귀속되는 지대를 조세로 징수하자고 제안한다. (헨리 조지, 김윤상 역,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1997/2012 참조)

주역 13번째 괘인 ‘천화동인(天火同人)’은 세상이 막혀서 소통이 되지 않으니 서로 힘을 합쳐 이런 상황을 타개하자는 뜻이다. 다른 사람과의 대동(大同)과 조화 및 단결, 국가와 사회의 단결을 의미한다. 주역 14번째 괘인 ‘화천대유(火天大有)’는 천하의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하면 천하의 인심이 그에게 귀의하고 천하가 그에게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대유괘(大有卦)가 동인괘(同人卦) 뒤에 오는 이유는 사사로움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뜻을 같이 하면 부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유(大有)가 되려면 반드시 동인(同人)이 되어야 한다. (정병석 역주, 주역, 을유문화사, 2010/2019 참조)

‘화천대유’와 ‘천화동인’ 아래 모인 사람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고 하늘의 뜻을 저버렸다. 그들의 네이밍(naming)은 그들의 행동과 정반대였다. 이 사회의 지도자급 인사들의 행태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사사로운 이익 앞에 진보와 보수의 구별은 없었다. 

고봉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고봉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선 아래 모인 사람들도 비슷해 보인다. 고발에 고발이 이어지고, 각종 프레임으로 덮어씌우기 바쁘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권력을 잡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국민은 안중에 없다. 상대방의 약점은 드러내 표를 깎아내리고 내 약점은 숨겨 자신의 표를 올리려는 고도의 정치 공학만이 난무한다. 

영화 속 ‘두 개의 세상’은 재미있게 그려지나, 현실 속 ‘두 개의 세상’은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나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선거 구호로만 그쳐선 안 된다. ‘화천대유’와 ‘천화동인’의 뜻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된다. / 고봉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