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항쟁 120주년 기념 학술대회...‘수탈 당한 주민들’ 한 목소리

1901년 5월, 제주에서 천주교인 300여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그 역사를 한 쪽에서는 신축항쟁, 다른 쪽에서는 신축교안으로 부르며 여전히 미묘한 입장차가 존재한다. 

8일 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신축항쟁 12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는 120년 전 제주도를 생존과 저항 그리고 피수탈자인 주민들의 입장으로 바라봤다.

기조강연자 주진오 상명대학교 교수는 중앙 권력의 세금 폐단(세폐), 프랑스 천주교 세력의 종교 폐단(교폐) 사이에서 보호 받지 못하고, 희생자로 전락한 다수의 도민 입장에 주목했다.

토론자 박찬식 제주역사연구소장은 신축항쟁이 있기 까지 제주 토착 권력의 흐름을 짚었다. 나아가 제주 공동체 문화 근간에 자리 잡은 ‘천년왕국’ 탐라국 복권 의식과 자결·저항 정신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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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항쟁 12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8일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렸다. ⓒ제주의소리

# 신축항쟁과 4.3 모두 제주도민에게는 국가 없었다

신축항쟁을 두고 천주교 측은 ‘세폐와 지방관이 결탁한 향촌 지배세력이 천주교도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규정한다. 그에 반해 정부 측은 교폐를 강조하면서 ‘봉세관 강봉헌(대한제국 황실 직속 세금징수 관리)이 저지른 세폐’를 가급적 은폐하려고 한다. 둘 사이에서 제주도민 입장은 “세폐와 교폐가 결합돼 상승 작용을 일으킨 사건”이다. 

주 교수는 신해박해(1791)부터 병인박해(1866)까지 조선 땅 안에서 천주교가 대대적으로 박해를 받았고, “자연스럽게 조선의 야만성에 대한 선교사들의 인식을 극도로 악화시켰다”고 바라봤다. 

1886년 조불수호 조약으로 간접 천주교 선교가 허용된다. 그리고 요동치는 근대 국제질서 속에 프랑스는 조선 왕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적극적인 포교에 나선다. 주 교수는 “뮈텔 주교(조선교구장)은 조선 국왕은 물론 고위관료들이 지원을 요청하거나 조심하는 양대인(洋大人)이 됐다”고 설명한다. 

전국적으로 천주교 입교자는 1896년부터 한해 2000~3000명에 달했지만, 반대로 1886년부터 1906년까지 교안(敎案)이 305건이나 발생했다. 

주 교수는 당시 천주교 신부들이 제주를 다른 지역보다 더 부정적으로 인식했다고 지적했다. 페네 신부는 “그들(제주도민)은 아주 타락한 사람들이어서, 그들을 천성적인 정직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본토의 한국인들보다 훨씬 못하다. 게다가 그들은 지나치게 미신을 믿으며 지독한 미신을 갖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주 교수는 “따라서 (신축항쟁이) 이렇게 엄청난 사건으로 확대된 것은 선교사들이 직접 무장하고 교인들을 지휘해, 민회를 습격해 인명을 살상하고 장두를 체포해 간 행위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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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오 상명대학교 교수가 기조강연을 진행했다. ⓒ제주의소리

교폐만큼이나 세폐 역시 만만치 않았다. 대한제국 황실의 모든 재산을 관리한 내장원경 ‘이용익’은 1899년 12월부터, 역둔토·목장토 등에 대한 조사와 도조 징수를 시작한다. 각 기관마다 별도로 관리하던 각종 토지에 대해서도 통일적인 수세 규정을 마련했다. 그래서 내장원 수입은 1902년 190만냥에서 일 년 만에 517만냥으로 대폭 증가한다. 하지만 백성들 입장에서는 조세 부담이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

주 교수는 “사실 민중들에게 세금을 기존대로 지방관과 향리들을 통해 납부하나, 궁내부에 직접 납부하나 어차피 차이가 없었다”면서 황실의 조세 정책 변화가 오히려 각 지방의 기득권이었던 지방관, 향리, 향임층에게 타격을 줬다고 해석했다.

때문에 “신축항쟁이 전 도민으로 확대된 데에는 바로 재지 지배세력의 호응 또는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인원 동원에도 향임층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그렇게 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궁내부 내장원이 제주로 직접 파견한 봉세관 강봉헌은 신축항쟁에서도 처벌을 피했다. “정부는 세폐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은 결국 내장원에게 (신축항쟁의) 책임이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판단이다.

주 교수는 신축항쟁과 4.3을 제주도민 입장에서 비교했다. 

그는 “막상 세폐의 주역인 강봉헌은 도피했고, 교폐의 핵심 주역인 프랑스 신부는 손대지도 못했다. 군함선을 타고 도착해 위협 시위를 했던 프랑스 군에 대해서는 전혀 저항하지도 않았고, 관군에게도 시간만 조금 끌었을 뿐 무장을 해제하고 자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국가란 존재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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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조강연 모습. ⓒ제주의소리

더불어 “1948년에도 무장대의 병력이나 무기로는 도저히 미군정의 지휘를 받는 군대를 당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평화적 해결 방안이 모색돼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저항을 계속했다. 물론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쪽에서도 선무공작과 설득의 과정을 통해 평화적인 해결을 먼저 시도했어야만 했다”면서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그 어느 쪽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도민들의 엄청난 희생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도 역시 제주도민들에게 국가는 없었다”고 강조한다.

주 교수는 “사실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역사의식은 불가능하다”라며 “항쟁의 어느 한 쪽을 미화하거나 영웅으로 만들고, 반대쪽을 악의 근원으로 몰아가는 것으로는 화해와 상생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이재수를 비롯한 신축항쟁 당시 지도층의 책임을 짚었다.

또 “역사적 진실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도, 제주도민의 입장에 서서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바라볼 때 진정한 화해와 상생이 가능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 역사 속에 흐른 탐라복권의식...자결의 재인식

탐라국 멸망부터 신축항쟁까지 제주 지역사회 권력은 하급 관리직 ‘향리(鄕吏)’들이 주도했다. 탐라국 지배층 상당수는 고려의 향리로 편입되고, 조선시대에서도 토관직에 임명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향리층으로 포섭됐다. 

1801년 공노비 해방 정책이 시행되면서 제주 사회는 큰 변화를 맞는다. 제주 인구의 60% 이상이었던 중앙관청 예속 공노비가 평민으로 신분이 전환됐다. 여기에 중앙 상납형 진상 위주의 부세 정책에서 지방 수납형 조세 정책으로 바뀌었다.

박찬식 소장은 공노비 해방이 가져온 변화에 대해 “제주에서 벌어진 민란인 양제해란(1813), 강제검란(1862)을 보면 향리·향임층의 폐단과 내부 균열이 나타나는데, 이는 향리·향임층에 집중된 권력 동향을 짐작케 한다”면서 “평민층 또한 저변이 넓어지면서 점차 사회 경제적인 성장 과정에서 의식의 성장이 동반됐고, 19세기 민란의 시대를 주도하게 됐다”고 두 가지 측면을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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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식 소장이 준비한 주제를 발표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특히, 향리·향임 권력층의 결집체였던 상찬계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목장전의 경작 허가 ▲미역밭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 ▲각종 송사에 관여 ▲군역 부과 ▲목자(牧子)의 역 충원 ▲소를 잡아 먹고나 말이 죽었을 때 대신 내는 벌금이나 형벌, 술 수정 금지 ▲2현, 9진의 포폄(褒貶) ▲지방관부의 공사 ▲민원 처리에 대한 부채 같은 막강한 권한을 상찬계가 좌우했다.

여기에 19세기 중반부터 숲이나 나무를 태워 개간·경작하는 토지(화전)에 대한 세금이 새로운 재원으로 부각됐다. 1990년 역둔토(驛屯土)를 황실 소속 내장원에 귀속시킨다는 방침으로 봉세관 강봉헌이 제주로 오면서 향리·향임층의 반발을 불러왔다.

박 소장은 “(신축항쟁) 당시 대정군의 민란주도세력은 우선 향촌사회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할 목적으로 민란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제주 안의 기득권 세력과 도민들은 외부 세력과 투쟁하기도 했고(양수반란, 강제검란, 신축항쟁, 항일운동, 4.3항쟁), 때로는 외래 세력과 연대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삼별초, 목호의란, 문충기란, 방성칠란) 

개항 이후 제주도 어장을 침탈한 일본인들이 처음에는 제주도민들과 갈등을 빚었지만, 나중에는 무난하게 제주 사회로 진출했고 신축항쟁에서 민군과 협조한 정황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박 소장은 이런 굴곡진 역사의 배경에 탐라복권의식이 자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집단 저항의 움직임이 탐라국의 멸망과 때를 같이해 일어났고, 이후에도 장기지속적으로 탐라국 독립과 자치에 대한 집단적인 감성과 기대심리가 잠복해 있다가 표출되곤 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1105년 고려왕조에 탐라가 병합됐어도 지배층의 자치 방식과 서민들의 기층문화에는 변함이 없었다. 탐라왕국을 복원하려는 양수의 난(1168), 삼별초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하는 태도, 몽골 지배 때 탐라로 복귀 사실 등은 탐라민들의 일관된 태도였다”고 강조했다.

박 소장은 1900년에 작성한 천주교 교리서를 예로 들며 “1901년 신축항쟁에서도 다양한 탐라복권의식의 조각들을 엿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원영 신부가 작성한 천주교 교리서 ‘수신영약’에서는 제주공동체를 수호하는 뚝할망신, 한라산신의 존재가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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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참가자들 모습. ⓒ제주의소리

박 소장은 “신축항쟁은 이전까지 출륙금지령으로 봉쇄됐던 제주도 중세역사를 걷어내고 새로운 근대역사로 넘어가든 시기에 근대 외래 지배력, 경제, 문화의 유입에 따른 제주도민의 대응으로 일어났다”면서 “처음에는 천주교의 매력에 이끌려 상당수의 화전민을 비롯한 제주민들이 입교하기도 했으나, 토착신앙 거부, 기존 토착사회 시스템 무시, 징세 수취체계 교란 등 도민 정서에 반하는 활동으로 일관하자 결국 민회가 열렸고, 민군의 타도 대상으로 천주교회라는 (적대적) 외부세력이 설정됐다”고 분석했다. 화전민과 연대하고 도민들이 우호적으로 대한 방성칠란 당시 남학당 무리와 비교된다. 

특히 박 소장은 “신축항쟁은 일제 때 항일운동, 해방 후 4.3항쟁,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개발반대 주민운동 때 역사적 화신으로 거듭났다”면서 신축항쟁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 하는 메시지로 “외부의 영향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수용·관용할 수 있는 정도의 유연한 대외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신축항쟁 120주년을 맞아 공동체의 자존과 정체성을 지키는 내재적 발전 움직임과 제주민의 정의로운 자치, 자결의 저항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떠올려 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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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참가자들 모습. ⓒ제주의소리

이 밖에 발제자로 나선 허원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은 “제주도의 부세(賦稅)와 재정의 중심은 토지가 아닌 호구로서의 수세(收稅)였다. 제주도의 부세는 갑오개혁기 중앙정부의 조세개혁으로 인해 중앙정부의 통제에 놓이게 됐다.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부세제도가 제주에도 관철됐으며, 부세원에 대한 조사와 중앙정부로의 상납이 요청됐다”고 조선 말기 조세 제도의 변화를 주목했다.

허 연구원은 “공토에 대한 수세와 잡세의 수취, 호세의 전용 등 공식적인 부세제도와 달리 운영되고 있었던 제주의 부세제도는 실제 운영에서의 자의성이 개입할 여지가 높았으며, 그 틈을 관리와 마름들이 파고들면서 세폐를 야기 시키고 있었다”고 당시 문제를 꼽았다.

여기에 “그 상황에서 중앙에서부터 강제된 부세원에 대한 확인과 수취한 부세의 중앙상납은, 조선후기부터 누적된 제주도의 부세제도를 둘러싼 관과 민의 갈등과 긴장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조세를 기준으로 신축항쟁 배경을 분석했다. 

다른 발제자 김선필 제주학연구센터 연구원은 “신축교안은 환경에 떠밀려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놓였던 두 집단이 어쩔 수 없이 충돌했던 안타까운 사건”이라며 “이제는 과거 상대방이 보였던 나쁜 점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서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천주교 입장에서 신축항쟁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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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우 천주교 제주교구장(주교)도 이날 참여해 격려사를 남겼다. ⓒ제주의소리

토론에 참여한 홍기표 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신축항쟁은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고자 했던 ‘인류 보편적 가치’, 즉 인간성 회복과 동서양의 상호 존중과 교류를 외쳤던 제주민의 외침으로 보는 시각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고 제시했다. 

토론에 나선 양정필 제주대 사학과 교수는 “제주에서는 과중한 호세 부담으로 인해 호적 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제주도 가족 제도도 독특한 형태로 발전하게 됐다는 사실은 흥미롭다”고 밝혔다. 

주제를 발표한 김동현 문학평론가는 “불완전하고 나약한, 그래서 때로는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윤리를 저버리지 않는 인간의 탄생, 그것이 영웅의 탄생이라면 이재수야말로 시민적 윤리성의 구현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재수를 평가했다.

토론자 홍기돈 가톨릭대학교 국어국학과 교수는 김동현 문학평론가의 발제를 바탕으로 신축항쟁 관련 기록·문학에서 등장하는 이재수를 “제주영웅, 순교의 원인 제공자이자 학살의 주역, 평범한 존재, 영웅설화 구조의 반복, 외세에 저항한 인물, 천주교 입장에서 복기되는 비판의 대상”이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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