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돌 한글날 칼럼] ‘제주어박물관’ 하나 만들자는 지도자가 없다 / 허남춘 제주대학교 교수

한글날이다. 개천절 연휴에 이어 한글날 연휴가 오고 있다. 추석 연휴에 이어 10월 연이은 연휴가 반갑다. 모두 단군 할아버지와 세종대왕 덕분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처음 나라를 열면서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인간을 유익하게 하겠다는 배려의 마음을 담았다는 점이다. 이런 멋진 신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처음 나라의 글자를 만들면서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할 사람이 많아, 이를 가엾이 여겨 글자를 만든다.”는 연민과 공감의 마음이 배어 있다. 이런 멋진 글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 역사 속에 ‘배려, 연민, 공감’의 가치를 중히 여기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싶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아 슬프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검찰, 회계사, 기자, 변호사 등 사회 상층부 사람들이 개발이익을 독점하면서 수천억 원씩 챙겨 넣는다. 대장동 개발에 가담한 화천대유 사람들을 보면서 그 양극화의 심각성을 다시 느낀다. 시민들의 박탈감은 극심하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서민층을 위한 기본소득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고, 우리 조상들이 나누던 배려와 공감의 정신을 다시 돌아본다. 한글은 함께 소통하고 편하게 잘 지내자는 선언이었다. 위아래가 소통하고 함께 잘 지내야 한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 너무 막혀 답답하니 첫 글자로 소리 한번 질러 본다. “가!” 그래도 안 풀린다. “하” “고구마다”
우리말은 쉬운 글자를 만나 디지털 사회 속에서도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애초 28자를 만들었는데 현재는 줄여 24자를 활용하여 컴퓨터 언어로도 손색이 없다. 한류의 흐름 속에서 세계 젊은이들이 한글을 배우려고 아우성이다. BTS 노래를 이해하기 위해 한글 공부를 서두른다. 문화와 언어의 내밀한 관계를 알 수 있다. 민족어를 지켜내고 민족문화를 재창조하여 문화강국으로 우뚝 섰다. 

지난 2019년 한글날을 맞아 제주에서는 전통 고유 어휘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제주어를 지켜 나가기 위한 이색 한글날 행사가 열렸다. 제주어로 노래하는 제라진소년소녀합창단 ‘어떵해서 더 지켜갈건고’ 공연 포스터.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 2019년 한글날을 맞아 제주에서는 전통 고유 어휘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제주어를 지켜 나가기 위한 이색 한글날 행사가 열렸다. 제주어로 노래하는 제라진소년소녀합창단 ‘어떵해서 더 지켜갈건고’ 공연 포스터.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는 어떤가.

말과 글이 한몸인데, 제주에서는 제주어를 잘 지켜 제주문화를 재창조하고 문화를 자랑하는 지역으로 남았는가. 제주어가 사라지고 제주문화도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던가. 한글은 승승장구하며 한글박물관도 있는데, 제주어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소멸 언어의 신세인데 <제주어박물관> 하나 만들자는 지도자가 없다. 아이들과 교육을 그토록 아낀다는 전교조 출신 교육감이 8년이나 하고 있는데, 제주어를 가르친다는 소식은 감감하다. 국가주의의 깃발 아래 민족문화는 잘 지켜냈는지 모르지만, 지역문화는 잘 지켜내지 못했다. 전통을 무시하는 ‘근대’의 속성과 입시에만 몰두하는 ‘교육’이 만나 ‘획일화’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 표준어는 잘 쓰지만 지역어는 사라지게 했다. 교육은 다양성을 키우는 것일 텐데 하나만 잘하도록 하면서, 제주어는 뒷전이다.

1105년 탐라국이 탐라군으로 전락하면서 독립국가의 지위를 잃고, 이어 의종대에는 탐라군으로 바뀌고 중앙에서 현령이 파견되기 시작했다. 13세기에는 탐라란 말도 사라지고 ‘물 건너 땅’이라는 ‘제주(濟州)’로 이름이 바뀌었다. 타자의 이름이다. 대한민국 역사책은 탐라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다가 삼별초의 난이 있고 몽골이 제주에 목마장을 건설한 역사를 적고 있다. 밑도 끝도 없는 역사 서술에 역사학계는 침묵하고 있고, 제주도 교육청도 성명서 한번 낸 적이 없다. 잘못된 교육을 바로잡아야 한다. 

제주보다 300년 정도 늦게, 1400년 경 나라가 망한 웨일즈는 잉글랜드에 합병되었다. 1999년 자치권을 이양 받고 2011년 2중언어 법안을 통과시키며 독립 지위를 완성해 가고 있다. 2021년 올해 2중언어 정책을 위해 유치원과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웨일즈어(Welsh, Cymraeg)를 필수코스로 정했고, 웨일즈어 교사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까지 740억 원이 투자되었고, 올해 새로운 커리큘럼을 위해 500억이 투자되었다. TV 방송도 2중언어로 이루어지고, 영어버전에는 웨일즈어 자막을 담아 보낸다. 그들은 말한다. 웨일즈의 정체성은 웨일즈어로부터 시작되고, 이것은 삶의 질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렇다. 삶의 질은 소득이 높아진다고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 왔고,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것이다.

제주에 묻는다. 잘살고 있는가. 언어와 문화를 잘 지켜내고 있는가. 제주어를 지키는 일은 지방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 언어는 조기 교육에 달려 있고, 방송 노출에 크게 의존한다. 교육 시스템을 개선하고 방송법을 개정하는 일이 시급하다. 웨일즈의 ‘2050 100만 Welsh’처럼 장기 목표를 세우고 제주어 교육에 나서길 바란다.

한글날에 문득 제주어의 길을 묻게 되었다. 한글이 지닌 공감의 정신처럼 제주인의 문화가 공감을 얻고 널리 퍼지기 위해서는 제주어가 되살아나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 허남춘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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