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청년연극제, 연극 불꽃여인 강평국, 연극 고사리 육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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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청년극단 RED의 연극 '라이어' 제작진과 출연진. ⓒ제주의소리

# 시작이 절반, 시작은 절반

‘극단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모인 미숙한 청년들.’

소박한 자기 소개와 달리 제주청년극단 RED는 1~2년 사이 꾸준히 무대 위에 오르며 이름을 알리고 있다. 특히 강지훈, 고훈민, 김민건, 정다혜 등 주축 멤버들은 제주에서 손꼽히는 규모를 가진 극단 ‘가람’ 작품에 주로 출연해 경험을 쌓았다. 이상용 가람 대표가 협력 연출로 참여한 오페라 ‘순이삼촌’에도 일부 참여한 바 있다.

청년·모닥치기, 몬딱스, 프로젝트 그리다, 사부작 등 최근 제주에서 활동해온 청년 공연예술 단체들 상당수는 활동을 멈추거나 다소 긴 호흡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 사이 RED는 전략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본인들만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지난 12~13일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첫 번째 제주청년연극제는 이런 존재감을 알린 자리이기도 하다.

제주청년연극제에서 RED는 연극 ‘라이어’를 준비했다. ‘라이어’는 1998년부터 올해까지 한국에서 공연돼온 스테디셀러 작품이다. 두 집 살림을 유지해온 택시 운전사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줄타기 생활이 흔들리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희극이다. 마치 갈수록 커지는 눈덩이처럼 거짓말이 더 큰 거짓말을 부르고, 그 사이마다 성인 유머가 적절하게 섞이면서 웃음을 선사한다. 특히 막장까지 치닫는 주인공 존 스미스(배우 강지훈)와 이웃 스탠리 가드너(고훈민) 간의 호흡은 ‘라이어’에서 가장 큰 볼거리 가운데 하나다.

RED는 원작이 지닌 재미를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한 모습이 역력했다. 물론 충분한 훈련을 받거나 아주 많은 경험을 가진 배우진이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 끝까지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원작이 가진 완성도와 함께, 나름 배역에 충실한 구성이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고 본다. 

특히 형사 트로튼 역의 김민건, 형사 포터하우스 역의 문준엽이 한몫을 했다. 두 사람은 지난 8월 제30회 소극장 연극 축제 출품작 ‘당신이 잃어버린 것’에서 단편 하나를 맡았다. 서로 비슷하면서 또 다른 상실의 감정을 다뤄야했던 당시 작품은 아쉬움이 꽤 컸지만, 이번에는 비교적 소화할 만 한 역할이었다. 여기에 부담 없이 안정감을 보여준 강지훈, 과감하게 망가진 고훈민, 남편의 동분서주에 혼란스러운 감정을 충실히 표현한 정다혜·고영은, 어려운 역할을 맡은 우준희도 더한다.

그러나 작품 전체적으로 ‘노력했다’ 이상으로 느끼기에는 한계 역시 분명했다. 이것은 RED가 처한 위치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은 ‘청년’ 시기를 보낸다. 단순히 젊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의미 이상으로, 그 시기라서 가능한 고민과 즐거움, 무대 예술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청년은 그저 생물적인 나이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관객에게 기억될 만 한 실력은 두말 할 나위 없는 기본이다. RED를 이끄는 강지훈 단장은 “탄탄한 기반의 안정성을 갖춘 공연 기획사 겸 전문 극단”이 자신들의 목표라고 밝혔다.

공연 준비부터 소극장 대기실에 꾸민 소품 전시, 아기자기한 소개 자료, 부대행사까지. 모든 것을 21세 이상 31세 이하 단원들이 준비한 모습은 ‘내가 그 나이라면 과연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제1회 제주청년연극제는 정성이 가득했다. 이번 행사와 유사한 자리가 연말에 열릴 수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RED를 포함해 무대를 사랑하는 제주 청년들의 ‘감동(感動)적인’ 활동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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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불꽃여인 강평국' 출연진과 제작진. ⓒ제주의소리

# 창작을 짓누른 역사의 무게일까

제주시가 후원하는 제주소재창작연극개발사업의 두 번째 선택은 ‘강평국’이다. 지난 9일 제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창작극 ‘불꽃여인 강평국’은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다간 애국지사의 삶을 충실하게 쫓아간다. 

작품은 경영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부터, 3.1만세운동 참여, 야학 여수원 설립·운영,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재학, 경찰의 모진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짧다면 짧은 지사의 33년 인생을 요약한다.

특히 주로 알려진 독립운동 이외에 여성운동에 대한 부분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강평국 인물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강평국 지사는 1925년 6월 1일과 7월 20일 동아일보에 ‘여자해방의 잡감’이라는 글을 실었는데, 당시로서는 꽤나 진보적인 여성 권리에 대해 강조했다. 이재섭은 지난 2019년 ‘탐라문화’에 발표한 논문 ‘일제강점기 강평국의 생애와 여성운동’에서 “(여자해방의 잡감은) 여성운동가로서 조선 여성의 인간 권리 회복과 남녀평등에 이르는 길에 들어서고자 하는 여성운동가 강평국의 결연한 의지를 살펴볼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고도의 집중력이 돋보인 강평국(배우 박은주)과 경찰 간부(함창호) 간의 갈등, 이후 어머니(양순덕) 품에서 미안함을 내비치며 눈을 감는 장면은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꽃여인 강평국’이 못내 미련이 남는 이유는 역사 재현 이상의 창작까지 충분히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최정숙, 고수선 같은 동지들을 이끄는 적극적인 리더십과 독립을 향한 강렬한 염원, 여성 권리를 외친 선도적인 자세를 보여줬지만, 일대기를 풀어내는 정도에 그쳤다. 애국지사의 행보에 맞춰 짧은 막 전환이 수차례 반복되는 구성에서 역사를 무대 위에 펼쳐내기 위한 제작진의 부담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강평숙 지사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나 자료가 열 손 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은 상황은 창작자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으리라 짐작해 본다.

▲화면 영상과 미리 녹음한 독백으로 ‘여자해방의 잡감’을 보여줬지만, 곧이어 강평국 강연 장면 대사에서 ‘여자해방의 잡감’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는 모습 ▲일본 경찰에 일제 군복을 입힌 고증 오류 ▲대극장 무대가 비어보이는 공간 활용 ▲경직된 대사 등 어쩔 수 없이 아쉬운 기억이 많이 남는다. 

허영선 작가가 1998년 펴낸 ‘불꽃의 여인 강평국’에 따르면 “강평국이 일찍 개화한 가문에서 태어나 별다른 갈등 없이 학문을 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몸에 밴 사상이 훗날 남녀평등과 여성운동을 벌이게 된 단초”라고 설명한다. (양순덕 배우의 연기력과 무관하게) 평면적으로 그려진 어머니 대신 아버지를 포함한 강평국 가족을 보다 다양하게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사족을 떠올려 봤다. 혹은 경찰 조사, 재판장 같은 배경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창작 구성도 생각해봤다. 오랜만에 무대에 선 차선영, 강명숙, 함창호 배우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 반가웠다. 촉박한 일정, 어려운 예산에도 애쓴 제작진들에게도 다소 늦었지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그 중에서 오종협이 작곡한 음악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8년부터 시작한 제주소재창작연극개발사업으로 지금까지 홍윤애, 강평국 작품을 창작했다. 앞으로 보다 다양하고 의미 있는 제주 소재가 지역 연극인들을 통해서 발굴되길 기대한다. 작품성을 높이는 노력 역시 빠질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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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고사리 육개장' 출연진. ⓒ제주의소리

# 행여나 간직했을 부담감, 떨쳐내길

극단 예술공간 오이의 세 번째 4.3창작극 ‘고사리 육개장’은 다른 입장에 선 두 사람을 통해 4.3이란 역사에 접근한다. 4.3을 작품으로 남기고 싶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는 미술작가 정현(배우 채려나)과 잇달아 실패하는 자살을 성공하기 위해 제주를 찾은 단우(이상철). 

4.3을 당연히 중요하게 기억해야 한다는 정현과 그런 태도를 보며 ‘피해의식’을 언급하는 단우는 신경질적으로 맞선다.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괘를 계기로, 만나서 갈등하고 이해하는 과정. 종국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과거와 인연이 밝혀지는 구성은 일면 흥미롭다. 연극 무대와 영상을 잇는 시도는 지난 ‘감금’에 이어 사용됐다. 

‘삶 역시 감옥일 수 있다’는 회의적인 인물이 제주에 와서 4.3을 알아가고 그것을 계기로 자신의 인생에서 너무나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오늘 날 4.3에 대해 여전히 낯설고 무관심한 대상들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4.3에 대한 언급을 포함한 극중 일부 대사들, 영상 설명, 유머코드는 투박하게 느껴질 만큼 솔직하고 익숙했다. 이야기 구성도 몰입보다는 다소 단절감이 느껴지는 인상을 받았다.   

단우는 섯알오름을 비롯한 4.3 현장을 둘러보며 남겨진 자에 대한 아픔을 알고, 이내 마음 속 깊이 간직한 트라우마를 떠올린다. 곧이어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을 통해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는 분명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부질없고 의미 없는 희생은 없다는 것. 하지만 이전부터 감정이 흐르면서 모아지기 보다는, 막바지 들어 급하게 연결되는 듯 해 매끄럽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고사리라는 소재는 극 중에서 ‘일부분이 전체와 이어지는 프렉탈 구조의 고사리는 어디를 가도 4.3을 만나는 제주와 맥이 닿는다’는 의미를 품는다. 하지만 극 전체를 봐도 삼촌(이진혁)의 고사리 설명 한 토막과 고사리로 제주도 모양을 만든 캔버스 소품이 전부라, 관객 입장에서는 설명 이상의 공감대를 얻기 어려웠다. 

전체적으로 평소 오이 작품에서 만나온 감각적인 접근이나 통찰 보다는, 흡사 야구에서 타자에게 유리할 정도로 정직하게 던지는 직구 같은 느낌에 가까웠다. 

‘고사리 육개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바로 극중 미술작가 정현의 대사다. 내가 4.3을 예술로 다룰 자격이 되는지, 내가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정현에게서,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고사리 육개장’을 쓴 전혁준 작가 겸 연출을 떠올렸다. 

전혁준 작가는 2018년 첫 번째 4.3창작 기획 ‘4통 3반 복층 사건’을 시작하면서 4.3을 작품으로 만들어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수 없이 물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고 어느새 4년 동안 이어갔다.

예술공간 오이는 2018년부터 '제주4.3 기억과 공감 연극프로젝트'의 일환으로 ▲4통 3반 복층 사건(2018~2019) ▲프로젝트 이어도(2020) ▲고사리 육개장(2021)을 만들었다. 2019년에는 7개월 동안 ‘4통 3반 복층 사건’을 공연하는 전례 없는 활동을 남겼다. 세 작품 모두 전혁준 작가의 손으로 썼다.

행여나 계속 새로운 이야기, 더 나은 이야기로 4.3을 알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면 마음 편히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계속 작품을 만들어도 좋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대답은 작품 속 정현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10월 2일부터 시작한 ‘고사리 육개장’은 23일과 24일(오후 3시·7시)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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