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배 칼럼] 1948년 10월 19일, 제주가 여수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오늘은 73년 전인 1948년 10월 19일, 여수와 순천에서 여순항쟁이 발발한 날입니다.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자!”는 제주토벌 출동거부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당시 출동거부 호소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를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군인에게 자국민을 학살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했다면, 이는 정의로운 항명이었을 것입니다. 4.3 발발 이후, 이미 제주에서 발생하고 있던 참극에 대해 여순에서는 진압출동 거부로 화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파란이 예측됐던 항명, 그들에게는 하등의 이익도 없는, 때문에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겁니다. 제주가 여순에 빚을 진 까닭입니다.

4.3이 발발한 4월~9월 그 무렵, 제주에서는 매달 100명 이상의 도민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여수의 제14연대에게 제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10월 한 달에도 이미 800명이 넘는 도민들이 학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전국적으로도 제주사람에 대한 유혈 탄압을 중지하라는 호소도 빗발치고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여수의 14연대는 이런 보편적 외침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순사건 당시 반군 협력자 색출을 위해 진압군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키고 있는 장면 사진.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가 1948년 11월 1일 촬영했다. 출처=LIFE,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여순사건 당시 반군 협력자 색출을 위해 진압군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키고 있는 장면 사진.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가 1948년 11월 1일 촬영했다. 출처=LIFE,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그들에게 제주는 낯선 땅이었고, 제주사람도 낯선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도 없는 동족 진압에 군인들이 동원되는 것은 동의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이들은 국방경비대가 “안으로는 자주독립을 추진시키고 밖으로는 국방의 중책을 완수하려는 국가의 간성”이라는 교육을 받았을 터였고, 때문에 동족상잔을 위해 군대가 동원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는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항명의 대가는 적지 않았습니다. 여순에서는 수천 명에 달하는 무고한 양민들의 인명 피해가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제주4·3이 없었다면 여순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에, 제주사람으로서 여순의 비극은 더 비통하며 제주가 이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 도의적 책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도도하게 이어졌던 제주4.3진상규명운동 과정에서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이영일 소장)가 항상 함께 했던 것도 그런 과거사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운명적 과제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철권통치의 그림자가 여전했던 1990년대, 제주4.3도 외로웠고 여수도 외로웠던 그때,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정의로운 길에 제주와 여수가 함께 했던 것은 오래된 기억이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그분들은 언제나 제주4.3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제주4.3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로 인해 4.3 해원의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 어디 제주사람만의 공력 덕분이겠습니까? 이런 모든 4.3의 성취들은 한국사회의 민주화, 이를 위해 흘린 고귀한 헌신과 희생 위에 맺어진 결실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주를 기억해 준 숱한 민주인사들과 단체들이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했음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수가 항상 제주와 함께 해줬던 것은 동병상련의 깊은 공감이 있었기 때문임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순은 73년 전에도 동족상잔으로 죽어갔던 제주사람들을 기억해 줬고, 4.3진상규명운동 과정에서도 제주를 기억해 주고 있었던 셈입니다.

4.3문제가 제도권 속에서 힘겹게 하나하나씩 성취를 이루어나갈 때, 그분들은 제주를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주 때문에 치러야 했던 여순의 희생을 아시는 제주사람들은 그분들에게 항상 죄송해 했음을 기억합니다. 4.3진상규명운동에 헌신했던 분들이 여순항쟁의 해결을 위해서 미흡하지만 음으로 양으로 문제해결의 지혜를 나눈 것은 그런 보은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여순항쟁의 진실을 규명한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가 나온 뒤에 여순사건 63주년 기념식에서는 국방부가 유족과 시민들에게 사과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73주년을 맞이한 금년 '여순사건특별법' 제정·공포의 성취도 이루어냈습니다. 제주로서는 무척이나 다행스런 일이고, 진심으로 축하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4.3진상규명운동을 통해 이룩한 제주4.3특별법 제정 등, 제주의 경험이 여순사건특별법 제정에도 준거가 되고 자그마한 보탬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거 제주가 진 빚을 현재의 제주가 조금이라도 보은하고 있다면, 이보다 감사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순사건특별법은 아직까지는 미완의 법이라고 합니다.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기간도 충분치 못하며 지원금 지급대상에서도 유족은 제외되는 등, 현재 제주4.3특별법의 도달점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내시기 바랍니다. 제주4.3특별법도 1999년 제정 후에 20년 넘게 하나씩 하나씩 개정을 통해서 '완전한 해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순도 그런 '완전한 해원과 해결'을 향해 나갈 것임을 믿습니다. 제주가 가능했기 때문에 여순 또한 가능한 일임을 믿어야 합니다.

정부와 여야도 단호하고 명징한 입장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형제가 죽임을 당하고, 의지할 곳 없이 천애의 고아로 살아야 했던 숱한 유족들의 삶을 기억하십시오. 잘못된 공권력이 뿌린 과오는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때문에 대대로 정치권의 부채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뿌린 자가 거두어야 합니다. 어두운 과거와 다투는 것이 아니라, 창창한 미래와 다투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훨씬 이익이고 그것이 도덕적이기 때문입니다. 여순의 억울함을 해소하는 것은 정치권의 언사가 아니라 여순 피해자의 언어를 경청하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규배 이사장.
이규배 제주4.3연구소 이사장.

너무 먼 길을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주4.3특별법은 이미 숱한 시행착오의 시금석이 됐지 않습니까? 여순사건특별법이 그런 머나먼 길을 걸어가야 할 까닭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무고한 제주의 눈물을 닦아줬듯이, 억울한 여순의 눈물도 말끔하게 닦아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이익이고 미덕임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여순의 모든 희생자와 유족 여러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73년 전에 빚을 진 제주에서 여순항쟁 기념일을 기억하며 축하와 연대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여순의 형제자매 여러분, 힘내십시오. 그리고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 이규배 제주4.3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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