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여·순 10.19항쟁 73주년] ① 현장-싸늘한 주검으로 만난 형제들 ‘여수 만성리 형제묘’

제주4.3의 ‘쌍둥이 사건’이라고 불리는 여수·순천 10.19항쟁은 4.3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이데올로기의 대립 아래 국가폭력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이 끔찍하게 학살당한 대한민국의 아픈 기억이다. 

4.3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로 내려가라는 명령에 ‘동포를 죽일 수 없다’고 반기를 들고 전남 일대를 장악한 여수 14연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정부군은 진압뿐만 아니라 거침없이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마치 무장대를 토벌하겠다며 부역자를 색출하고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증거 없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4.3의 모습과 닮아있다. 다시 말해 여순은 한반도 대륙 끝단에 있는 또 하나의 제주였다.

ⓒ제주의소리
여수 만성리 여순항쟁 희생자 위령비 앞에 가지런히 높인 '동백돌'. 동백을 그려넣은 무수한 돌들이 위령비 앞을 가득 채워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있다. 동백은 제주4.3과 마찬가지로 여수에서 희생자들을 기리는 의미로 사용된다. 여수 역시 동백이 많이 자라는 지역이며, 꽃송이가 한번에 떨어지는 모습이 국가폭력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희생된 모습과 닮았다 해서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주의소리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된 섯알오름 학살과 비슷한 일이 1949년 1월 3일 한반도 대륙의 남단, 전라남도 여수에서도 벌어졌다. 섯알오름 학살이 벌어지기까지 약 1년 7개월 전의 일이다.

1949년 1월 여수에서는 10.19 여순항쟁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수용된 125명이 정부군에 의해 만성리 산골짜기로 끌려가 재판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 

군용 속옷을 입었다거나 머리가 짧다는 이유 등 제대로 된 근거 없이 끌려온 그들은 총살당했고 주검은 아무렇게 버려졌다. 해명할 기회를 얻지도 못한 채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무차별적인 총탄에 맞아 죽어간 것.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가족들은 시신마저 제대로 수습할 수 없었다. 정부군은 가족들의 접근들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세우고, 시신을 장작더미에 태워 만성기 골짜기에 돌로 묻어버렸다.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의 증언에 따르면 5명씩 총살한 뒤 다시 5명씩 장작더미에 눕힌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가 있었다. 25명씩 쌓은 더미 5개는 끼얹어진 기름에 태워졌고 시신은 3일간이나 불탔다고 한다. 

이에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은 조상은 달라도 한 자손이니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는 뜻으로 ‘형제묘’라는 이름을 붙여 커다란 무덤을 만들었다. 이처럼 여수 만성리의 ‘형제묘’는 제주의 ‘백조일손지묘’와 서로 많이 닮았다.

취재 기자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다크투어와 함께 여수 만성리 형제묘를 찾아 살펴보니 희생자 이름이나 사건 설명 등 추념 의미가 담긴 비석은 없고 단지 형제묘라는 이름만 적힌 비석만 있다는 점,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으면 역사유적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인 점 등 대우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제주의소리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 형제묘' 전경. 여순항쟁 당시 여수 14연대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는 125명이 진압군에 총탄에 맞아 한 자리에서 학살당한 뒤 불태워졌다.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형제묘를 찾아 희생자 영령에 추모하고 있는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다크투어 관계자들. ⓒ제주의소리

그나마 최근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여순사건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게 되면서 입구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은 표지판이 세워지긴 했다.

제주백조일손지묘는 4.3의 광풍이 불어닥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가 좌익사상 전향자를 계몽한다는 명분 아래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진행하며 자행한 학살 희생자가 모인 무덤이다.

당시 제주지구 계엄당국은 주민 수백여 명을 검속했고 대정읍과 한경면, 한림읍 등 주민 200여 명을 구금한 뒤 1950년 8월 옛 탄약고 물웅덩이 2곳에서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예비검속자들의 다수는 산으로 도망쳤다거나, 초토화작전 중 살고 있던 중산간 마을을 버리고 해안가로 내려오지 않았다는 둥 셀 수 없는 억울한 이유로 잡혀간 뒤 대부분 학살된다.

4.3을 좌익 활동으로 규정했던 당시 이승만 정부가 이들을 북한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는 적으로 간주해 집단 학살한 것. 공무원과 교사, 보도연맹원, 농민, 학생, 부녀자 등 무고한 민간인들은 제주 앞바다에 수장되거나 제주비행장, 섯알오름 등에서 학살, 암매장됐다. 

왜 잡혀갔는지, 왜 죽임을 당했는지 정작 자신들은 몰랐으며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통곡의 세월이 지난 1956년, 겨우 시신을 수습하고자 했지만, 유골이 뒤엉키면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결국 후손들은 132구의 유골을 묘역에 안치하고 서로 다른 조상들이 한날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됐으니 그 후손들은 이제 모두 하나의 자손이라는 의미로 백조일손(百祖一孫)을 결성, 백조일손지묘를 세웠다.

시기상 여순항쟁 만성리 형제묘가 앞서지만, 제주백조일손지묘와 같이 세간에 많이 알려지진 못했다. 명령을 거부한 여수 14연대의 행동이 좌익 세력에 의한 반란이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결성된 군인으로서 동족상잔인 제주도민을 죽이는 일에 가담할 수 없다는 항거는 오랜 세월 지독하게 이뤄진 반공교육 아래 숨겨야만 했다.

ⓒ제주의소리
만성리 형제묘 설명에는 '마치 제주의 백조일손지묘를 연상케 한다'고 적혀있다. 이 곳에는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뒤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유족의 아픔이 서려있다.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돌멩이마다 그려진 동백꽃. ⓒ제주의소리

여수와 순천, 전남 일대에서 짧은 시간 압축적으로 국가폭력에 의한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 따르면 여순항쟁 피해자만 약 1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토해낼 수 없던 억울한 죽음은 이제야 실마리가 풀려가고 있다. 최근 국회는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여순사건특별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를 통해 여순항쟁은 국무총리 소속 ‘여순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와 전남도지사 소속 ‘실무위원회’를 둘 수 있게 됐다.

국가폭력에 의해 무고한 민간인이 죽어간 제주4.3과 여순항쟁. 제주도민을 토벌할 수 없다고 들고 일어나 끔찍한 국가폭력과 마주하게 된 그들 앞에 제주는 큰 빚을 진 것과 다름없다. 

국가의 공식 사과를 끌어내고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실질적인 배·보상의 길이 열리는 등 진정한 명예회복을 이뤄가고 있는 제주가 뒤이어 진상규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순을 도와야 하는 필연적 이유다. / 여수=김찬우 기자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