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여·순 10.19항쟁 73주년] ② 현장-여순특별법 통과 “진실이 꽃이 피었습니다”

제주4.3과 함께 한국전쟁 이전 발생한 여러 민간인 희생 사건 중 피해가 극심했던 여수·순천 10.19항쟁. 그날의 진실을 꽃피우기 위한 특별법이 지난 6월 국회를 통과한 가운데 19일 전남 여수 이순신광장에서 위령제와 추념식이 진행됐다. 

여순항쟁이 발생한 지 73년을 맞는 올해는 전남도 시·군 순회 합동 위령제와 여수시 합동 추념식이 합쳐진 정부 차원 행사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진행된 시작된 위령제는 ‘여순 10.19, 진실의 꽃이 피었습니다’를 주제로 진행됐으며, 시작과 함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사이렌이 울렸다. 

여수와 순천 일대가 사이렌 소리로 뒤덮이자 현장에서는 일순간 저마다 당시를 떠올리기라도 한 듯 적막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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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10시 전남 여수시 이순신광장에서는 '여순 10.19, 진실의 꽃이 피었습니다'를 주제로 여순항쟁 합동위령제 및 추념식이 열렸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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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 동백연이 여수 하늘 높이 날고 있다. ⓒ제주의소리

이어 행사는 1부 위령제와 2부 추념식으로 나눠 진행됐으며 1부에서는 여순사건유족협의회 주관으로 전남도립국악단의 공연과 희생자 손주인 서영노 씨의 사연 낭독, 여수시립합창단 추모공연 등이 진행됐다.

서 씨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보내는 편지’를 통해 특별법 제정 이후 할아버지가 억울하게 학살됐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통탄의 세월을 보냈을 조부모를 기렸다. 

그는 “할아버지는 조용한 어촌 마을에서 구장일을 보던 평범한 농부였다. 1948년 10월 20일 여수 14연대 군인들이 탑승한 기차가 멈춘 뒤 구장인 할아버지를 부려 율촌지서 무기고를 지키게 한 것 때문에 좌익으로 몰려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동네 사람들을 마을 어귀에 모아 할아버지 집에 불을 질렀고 할머니는 손가락 총에 끌려 나와 지게 작대기로 맞고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며 “옷을 벗길 수 없을 만큼 온몸은 부었고 밤이 되길 기다려 멀리 떨어진 친정으로 피신했다”고 말했다.

또 “날이 어두우면 이웃 동네 이모 할머니 댁에서 신세를 지고 해가 뜨기 전 다른 곳으로 도피하는 등 모진 삶을 살아야 했다”라면서 “할아버지는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야경 근무를 가던 도중 순경에게 연행됐고 행방불명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후 할머니는 어린 다섯 남매를 홀로 키우기 위해 행상으로 겨우 생계를 이었고 장남이었던 제 아버지는 사찰계 순사가 학교에 찾아와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하는 등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고 토로했다.

서 씨는 “할머니는 항상 못 배우고 못 사는 대물림에 마음 아파하셨다. 행방불명된 할아버지를 평생 기다리며 말문을 닫고 모진 삶을 이어오다 특별법이 통과한 올해 영면에 드셨다”며 “이제 특별법이 통과된 만큼 모든 걱정과 고통, 슬픔을 내려놓고 그곳에서 두 분이 만나 봄날 여순으로 구경 오셨으면 좋겠다. 사랑하고 고맙고 고생하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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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합동위령제 및 추념식에서 공연을 펼친 여수시립합창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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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유족이 행사에 참가해 공연을 보고 있다. ⓒ제주의소리

편지 낭독이 이뤄진 뒤 진행된 2부에서는 여순사건 추모 영상과 주요 인사들의 헌화와 분향, 추념사, 전남도립국악단 추모공연 등 순서로 진행됐다. 

영상으로 추모사를 대신한 김부겸 국무총리는 “여순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아직도 풀어내지 못한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며 ”73년간 풀리지 못했던 역사의 상흔이 상생의 길로 향하는 디딤돌 될 수 있도록 여러분과 함께 그 뜻을 키워나가겠다“ 밝혔다.

이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피해자와 유가족 대부분이 80대 이상 고령이시다. 평생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지 않도록 한을 풀어드려야 하지 않겠나‘라며 “내년 출범 예정인 여순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를 중심으로 진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다음 순서로 헌화와 분향이 진행됐으며 이 자리에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전남도와 여수, 순천 지역 주요 인사들이 무대에 올라 희생자를 기렸다. 이 가운데 이석문 제주도교육감이 장석웅 전남도교육감과 함께 무대에 올라 헌화와 분향에 참여했다.

이어진 추모사에서 정근식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장은 “여순은 그해 봄에 발생한 제주4.3과 함께 6.25전쟁 이전 발생한 여러 민간인 희생 사건 중 가장 피해가 컸다”며 “냉전 분단 논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전개된 것인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또 “대부분 피해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거주지에서 희생됐지만, 일부 검거된 사람들은 여러 형무소에 수감된 뒤 전쟁 직후 희생되기도 했다”며 “이 사건 이후 여순은 오랫동안 오명에 시달렸고 피해자 가족들은 연좌제 피해를 고스란히 받기도 했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올해 여순 10.19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사건의 진실을 폭넓게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유족들의 염원이 가까운 시일에 해결되길 기원하고 적절한 치유 사업이 동반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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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문 제주도교육감은 도교육청간 교류 일환으로 여수를 찾아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이날 행사장에서는 장석웅 전남도교육감과 함께 무대에 올라 헌화와 분향에 참여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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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묵념 중인 참석자들. ⓒ제주의소리

여순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 신월동에 주둔했던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제주4.3 파병을 반대하며 일으킨 사건이다. 무고한 시민들이 공권력에 의해 학살당하는 등 현대사의 비극으로 제주4.3과 ’쌍둥이 사건‘으로 불린다.

올해 6월 29일에는 여순사건이 발생한 지 73년 만이자 여순사건특별법이 국회에 발의된 지 20년 만에 겨우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를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여순사건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겨우 통과한 것. 특별법에 의거해 여순사건은 국무총리 소속 ‘여순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와 전남도지사 소속 ‘실무위원회’를 둘 수 있게 됐다. / 여수=김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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