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왓 칼럼]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존엄한 노동을 한다

편견으로 무장한 이들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여전히 반인권적 발언과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 일들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존재 자체로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이 있어선 안됩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난민 등 대상은 다르나 일상 곳곳에서 여전히 차별이나 혐오, 폭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인권문제에 천착한 '인권왓 칼럼' 연재를 통해 인권활동가들의 현장 목소리를 싣습니다. [편집자 글]
사실 우리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규칙은 그림자 노동이나 ‘열정페이’의 경우처럼 계산되지 않는 사람의 존엄한 노동을 재물 삼아 지탱하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사실 우리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규칙은 그림자 노동이나 ‘열정페이’의 경우처럼 계산되지 않는 사람의 존엄한 노동을 재물 삼아 지탱하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한 고등학교에서 노동 인권에 대한 강의를 종종 의뢰 받는다. 인권 강의 내용 중에는 ‘치킨게임’이라는 코너를 넣었다. 극단적 경쟁을 의미하는 ‘치킨게임’이 아니고, 우리가 ‘튀김 닭’을 먹기까지 그 과정에 기여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많이 찾아내는 형태의 교육 프로그램이다.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이 튀김 닭을 우리가 먹기까지 어떤 사람들이 이바지했을까요?” 학생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각각의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을 호명한다. 닭을 키운 사람, 닭을 튀긴 사람, 밀가루를 만든 사람, 밀을 재배한 사람, 튀김용 기름을 만든 사람 등등 바로 보이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더니, 점점 이야기가 깊어졌다. 튀김 닭을 배달한 사람, 닭을 키울 때 고용되었던 사람, 튀김용 기름을 배달한 사람, 그리고 각종 원료를 포장할 때 쓰이는 비닐이며 플라스틱·깡통을 만든 사람, 그것의 원료를 만든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밥을 해준 사람 등등. 학생들은 스스로 찾아낸 사람들이 정말 많고 다양한 직업군의 기여가 있음에 놀라곤 한다. 그렇게 학생들은 우리가 돈을 내고 쉽게 사 먹거나 소비하는 거의 모든 상품의 뒤에 상당히 많은 사람의 기여가 있어야 함을 스스로 인식한다.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더 한다. “그럼 이 많은 사람 중에서 임의로 한 사람이 빠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또 다양한 결론이 나왔다. ‘소금 만드는 사람이 사라지면, 닭이 심심해질 것이다’, ‘튀김용 기름이 없다면 튀김 닭이 아니고 그냥 백숙이 된다’, ‘배달 노동자들이 없다면 튀김 닭의 재료를 어떻게 구할 것이냐?’ 등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이반 일리치는 1981년 ‘그림자 노동’이라는 책을 통해 소위 주류적인 임금노동 뒤에 은폐된 여성들의 노동인 가사노동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생계비를 버는 임금노동에 비해 평가 절하되어 무시되고 있지만, 남성의 임금노동을 근본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여성의 노동이 은폐되어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감춰지고 마치 대가가 없는 노동으로 취급받는 노동을 ‘그림자 노동’으로 명명했다. 

이 사회에는 수많은 사람, 아니 모든 사람이 노동하고 있다. 소위 ‘어른들’은 임금노동을 통해 생계비를 마련한다. 학생들은 ‘학습 노동’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위한 기초적인 지적 자산을 쌓아가며 인간사회의 발전과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로 성장해 나간다. 노인들은 노동을 통해 여전히 자신이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으며,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또 다른 한편, 임금노동이 불가능한 장애인이나 그 외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적절한 일거리, 즉 노동을 제공할 의무를 국가가 지고 있다. 대가가 없는 그림자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지만, 어쨌든 그들도 노동하고 있다. 노동은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사회에 이바지할 기회를 제공해주며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드러내는 방식이 된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는 각각의 노동에 대한 가치의 크기를 정하고, 그것에 따라 임금을 차등 지급한다. 문제는 이러한 임금의 차등에 따라 각각의 사람들이 차별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튀김닭을 배달하는 사람보다 튀김닭 가게 사장님이, 그 사장님들보다 튀김닭 체인 본부의 회장님이 더 큰 임금을 가져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들은 갑이 되어 을을 대상으로 보고 그들을 억누르며 차별하기도 한다. 땅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의 몫보다는 쌀 한 톨 생산하지 않는 머리 회전 빠른 금융 자본가들이 수백 수천 배 이상의 이익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농부들을 무시하고 심지어 비웃기까지 한다. 모든 사람의 존엄을 드러내는 노동은 그렇게 차별적으로 취급되며, 임금차등은 사람들을 나누고 가르며 인간 자체를 차별한다. 마치 임금의 크기가 존엄의 크기가 되는 것처럼…. 그리고 또 그렇게 그림자 노동자는 더욱더 가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하지만 우리가 튀김 닭을 원한다면, 그 과정에서 어느 사람의 역할도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돈이 많건 없건 간에, 그리고 그들의 임금이 얼마든 간에 누구도 생략될 수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튀김 닭을 먹고자 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과정에 화폐적 가치를 매기고, 차별적 인식을 누가 이 사회에 확산시키고 있을까? 또, 그렇게 배달하는 사람의 임금은 작아야 하고, 회사나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의 임금은 커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을 만들고 그것이 마치 공정한 사회적 규칙인 양 행세하게 만들고 있을까? 돈으로 돈을 만드는 능력을 왜 쌀 한 톨이라도 만드는 농부의 능력보다 더 우대하도록 만들까? 

사실 우리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규칙은 그림자 노동이나 ‘열정페이’의 경우처럼 계산되지 않는 사람의 존엄한 노동을 재물 삼아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임금노동자들에게도 차별을 두어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삶이 가능하지 않도록 임금을 낮추고 있다. 현재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리고 전문가들, 지식 전문가들이 논리를 점유하고 있는 현재 사회이다. 그러한 이 사회의 주류세력과 구조는 다양한 노동의 가치를 차별적으로 정함으로서 다수의 노동에 정당하게 지불 해야 할 가치를 제한하거나 낮추고 있다. 그렇게 전반적인 사회 비용을 낮추고, 이익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있다. 호텔의 청소노동자가 반드시 비정규직이고 호텔 경영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정규직이어야 하며, 이들의 급여 차이가 수배에서 수십 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과거 필자가 수출회사에 근무하면서 만났던 외국 기계 수리공은 그 나라 교수 급여의 두세 배를 받고 있다고 이야기해 준 바가 있다. 놀라워하는 나에게 ‘자신은 자신의 노동력과 기술력에 맞게 정당한 급여를 받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 했다. 

생각보다 우리가 공정하다고 믿는 사회적 규칙은 그리 공정하지 못하다. 차별적 사회의 시각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 존엄을 망각하게 하고, 존재의 가치에 차등을 두게 한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차별을 당연한 능력의 결과 수치로 받아들이게 한다. 생명을 유지할 쌀 한 톨 생산하지도 못하면서 농민들의 능력을 비하한다. 이제는 그러한 사회적 차별을 잘 구별하고, 모든 사람이 모두 풍요로워질 수 있는 공정한 사회에 대한 인식을 넓혀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모두에게 동일한 임금을 무조건적으로 제공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에게 정확한 노동의 가치를 제시하고, 모두에게 동일한 노동가치에는 동일한 임금을 주자는 이야

기이다. 사회의 구조적 편견이 주는 차별을 능력의 차이와 공정함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모든 사람의 존엄함을 기반으로 그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인정과 대가를 지불하자는 이야기이다. 

모든 사람은 노동의 권리를 갖는다.(대한민국 헌법 32조1항) 모든 사람은 노동의 권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모두가 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이바지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회는 모든 사람이 존엄하게 살아간다.(세계인권선언문 1조) 인권이 꿈꾸는 사회이다. / 신강협 제주평화인권연구소 왓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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