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2월5일 공군 수송기 추락...전두환 경호임무→대침투훈련 조작 ‘끝내 사과 없어’

이재영 특전사 제주 2.5유족회장이 2012년 2월 [제주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1982년 2월 봉황새작전으로 자신의 아들을 잃은 사연을 취재진에게 이야기 하는 모습.  ⓒ제주의소리
이재영 특전사 제주 2.5유족회장이 2012년 2월 [제주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1982년 2월 봉황새작전으로 자신의 아들을 잃은 사연을 취재진에게 이야기 하는 모습. ⓒ제주의소리

“1982년 2월7일 대간첩 작전 중 전사했다고 통지를 받았고 그렇게 믿었지. 3개월이 지나서야 전두환을 경호하기 위해 제주로 갔다가 변을 당한 사실을 알았어...”

이재영 특전사 제주2·5유족회장이 2012년 2월 [제주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생생하게 전한 39년 전 일명 ‘봉황새 작전’에 대한 전두환 군사정부의 실체였다.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씨가 23일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향년 90세로 생을 마감하면서 살아생전 단 한마디의 사과를 기대했던 유족들의 희망도 사라졌다.

1982년 2월5일 국가의 부름을 받은 특수전사령부 707대대 소속 특전사 대원 47명과 공군 6명은 1982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공군 수송기 C123기에 올라 제주로 향했다.

제주국제공항 준공식과 제주도 연두 순시를 앞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특전대원들을 미리 태워 출발시킨 항공기였다. 

3대 중 가장 먼저 출발한 공군 수송기는 목표지점인 제주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한라산 1060m 고지 개미등 계곡에 추락했다. 이 사고로 특전대원과 공군 53명이 전원 사망했다.

1982년 2월5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C-123 공군 수송기. 이 사고로 특전사 대원 등 53명이 전원 사망했다. [사진출처-서재철 전 제민일보 부국장]
1982년 2월5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C-123 공군 수송기. 이 사고로 특전사 대원 등 53명이 전원 사망했다. [사진출처-서재철 전 제민일보 부국장]
1982년 2월5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항공기 잔해. 30년이 지난 아직도 땅을 파면 나온다고 유족들은 주장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1982년 2월5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항공기 잔해. 30년이 지난 아직도 땅을 파면 나온다고 유족들은 주장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당시 군부는 제주로 향한 나머지 2대의 수송기 속 특전사 대원들을 동원해 수색 작업을 진행했다. 1982년 2월6일 오후 4시30분 철저한 보안 속에서 추락한 수송기를 발견했다.

특전사 수색대는 이틀에 걸쳐 마대자루를 동원해 시신을 산 밑으로 옮겼다. 수습이 끝난 후에야 유족들에게 사망 사실을 알리고 그해 2월9일 서울 국립묘지에 유해를 안치했다.

53명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간 사건이 벌어졌지만 정작 사고 소식은 지역 신문에 전해지지 않았다. 군부는 언론사를 장악해 보도용 사고 현장 사진까지 빼앗아 갔다. 

당시 군부는 사고 후 넉달이 지난 1982년 6월2일 ‘훈련지역인 제주에 도착하던 중 이상기류로 한라산에 추락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전두환 경호 임무가 대침투훈련으로 조작된 것이다.

2012년 2월 [제주의소리]는 사고 30년을 맞은 기획취재 과정에서 추락사고를 직접 조사한 공영화 공군 소장과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고인이 되면서 마지막 육성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당시 어렵사리 연락이 닿은 공 장군의 부인은 남편이 예편 후 숨을 거두기 전까지도 ‘한라산 수송기 추락사고에 대해서는 군인 출신으로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만 했다고 전했다.

특전사 제주2·5유족들은 40년째 자신 때문에 군인들이 숨진 사실을 인정하고 유족들에게 사과할 것을 요청해 왔다. 하지만 전씨는 끝내 진실을 밝히지 않고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제주 한라산 관음사 옆에 설치된 일명 봉황새작전 순직 희생자를 위한 충혼비 ⓒ제주의소리
제주 한라산 관음사 옆에 설치된 일명 봉황새작전 순직 희생자를 위한 충혼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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