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51) 겨 먹던 개가 쌀 먹으려 한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 체 : 곡식 껍데기 부분
* 먹단 : 먹던, 먹어오던
* 먹젱 : 먹으려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망스러운 자가 있는 법이다. 알고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픽사베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망스러운 자가 있는 법이다. 알고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픽사베이.

‘겨’란 조나 보리, 산도를 방앗간에서 거피(去皮)해 알맹이를 낼 때 벗겨낸 껍질을 말한다. 옛날 못 살던 시절, 곡식을 장만하다 사람 입에 넣지 못할 이 체를 주로 돼지나 개의 먹이로 사용했다. 체에다 설거지한 음식물 찌꺼기를 섞어 주면 그만, 그게 개나 돼지의 먹이가 됐다.

산디(산도)쌀로는 제사 명절에나 뫼를 해 제사상에 올렸다 음복하며 나눠 먹던 ‘곤밥’을 짓는 곡물이고, 좁쌀과 보리쌀도 없어 못 먹던 시절에 개가 쌀을 넘보다니 어림없는 일이었다. 

주로 겨가 먹이이고 어쩌다 썩은 감저(고구마)가 생기면 저들 차례에 돌아갈까 말까 했다. 썩어 가는 감저도 그 썩은 것을 칼로 도려내고 남은 것은 쪄서 어찌어찌 먹어 고픈 배를 달래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1950~1970년대, 그야말로 적빈(赤貧)의 시절이었다. 

찔레의 새순을 뜯어 먹고 보리 철에 밭에 많이 나는 무릇을 케어다 큰 무쇠솥에 고아 먹었으며, 바다에서 나는 톨(톳)에 좁쌀 눈 볼근 독 주서 먹엄직이(톳에 좁쌀 눈 밝은 닭 주어 먹엄직이) 해서 먹었던 가난의 시절이 있었다.

이 말에 ‘개’가 등장하지만, 실제 ‘체 먹단 개가 쏠 먹젠’ 한 것은 개가 아닌 사람이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하루 세끼 밥도 해 먹지 못하던 주제에 남의 풍족한 삶을 기웃거린다는 것은 제 처지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일이 아닌가. 한마디로 주제 파악하지 못한 처신이라 나무람이다.

쌀은 사람도 없어 먹지 못하는 판국인데 제 체면을 내세운다고 나온 얘기라 할지라도 한참 잘못 나온 것으로, 내막을 아는 사람이라며 비웃음에 손가락질인들 왜 하지 않겠는가. 분수를 저버림도 어느 정도라야 한다. 행여 잘 먹고 잘 살겠다는 허황한 꿈을 꾸고 있거나 한 것이라면 이런 몰지각이 없다.

‘체 먹단 개가 쏠 먹젱 혼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망스러운 자가 있는 법이다. 알고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능력이 닿지 않으면 더 나아가려 하지 말고 이게 내 분수이고, 제자리인가 해서 자족(自足)할 줄 알아야 한다.

빈이무원(貧而無怨) 안빈낙도(安貧樂道)-가난하지만 남을 원망하지 않고, 그런 가운데 도를 닦는 즐거움을 누린다고 했다. 

높은 곳만 쳐다보지 말고, 아래도 굽어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게 행복에 이르는 삶의 지혜일 것이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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