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족회, 호적불일치 희생자-유족 실태조사..."국가폭력 비롯된 문제, 특별법 개정해야"

22일 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제주4.3사건으로 인한 호적불일치 실태조사 보고 및 토론회'. ⓒ제주의소리
22일 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제주4.3사건으로 인한 호적불일치 실태조사 보고 및 토론회'. ⓒ제주의소리

제주4.3의 광풍 속에서 가족공동체가 무너진 이들. 역사의 소용돌이에 뒤틀린 호적은 7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바로잡히지 않았다. 사회구조적 문제 탓에 출생·혼인신고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부모와 남편을 여윈 이들은 뿌리를 잃은 채 살아가야 했다.

70여년간의 고통 끝에 이제야 빛이 보이나 싶었지만, 국가는 역설적이게도 가족관계등록부 불일치 유족들에게 스스로 법적 절차를 통해 가족임을 증명해 오라고 몰아세웠다.

친자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묘를 파헤쳐 DNA를 감식해야 한다는 현실의 벽에 유족들은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행방불명 유족들은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아들·딸 세대를 넘어 손자·손녀에게까지 전승되고 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22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제주4.3사건으로 인한 호적불일치 실태조사 보고 및 토론회'를 개최했다. 

최근 개정된 4.3특별법에는 4.3희생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규정이 담겼다. 개정된 법률에 따라 4.3희생자와 유족이 보상금 지급결정에 동의하면 민법상 화해가 이뤄진 것으로 간주되고, 4.3피해 보상이 완전히 종결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법률은 국내 다른 과거사 보상문제와의 동일성과 시급성이 우선시되면서 제주4.3의 공간적·역사적 특수성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로 인해 호적을 정정할 수 있는 특례조항을 두지 못해 피치못할 피해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이날 토론회는 현혜경 제주연구원 책임연구원의 4.3희생자 및 유족 간 가족관계등록부 불일치 문제 조사결과 발표에 이어 김종민 4.3위원회 위원이 좌장을 맡아 강병삼 변호사, 강민철 제주도 4.3지원과장, 오화선 제주4.3연구소 자료실장, 양성주 4.3희생자유족회 사무처장 등이 검토의견을 제시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실태조사는 보상의 사각지대에 놓인 호적 불일치 희생자·유족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진행됐다. 지난 8월19일부터 11월22일까지 면접원 4명이 투입돼 직접 면접조사 방식으로 이뤄졌다. 조사 대상자는 가족관계등록부 불일치에 해당하는 유족 78명이다.

조사 대상자와 희생자와의 관계를 살펴봤을 때 호적 불일치가 일어나고 있는 경우는 딸 유족이 73.1%로 상당수였다. 아들 유족의 경우 10.3%에 해당하며, 손녀, 조카, 9촌 등도 나타났다. 딸 유족에서 호적 불일치가 많은 원인은 가부장적 유습이 남아있는 당시 사회적 관습에 의한 영향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부계 전승과정에서 주로 딸 등이 호적에서 제외되거나 뒤늦게 입적시키는 과정에서 호적 불일치가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22일 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제주4.3사건으로 인한 호적불일치 실태조사 보고 및 토론회'. ⓒ제주의소리
22일 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제주4.3사건으로 인한 호적불일치 실태조사 보고 및 토론회'에 발표자로 나선 현혜경 제주연구원 책임연구원. ⓒ제주의소리

호적 불일치의 주요 원인으로는 희생자의 혼인신고 여부가 가장 컸다. 희생자의 배우자가 혼인신고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자녀들이 호적 불일치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부친이 사망하고 모친과 생활하더라도 부계 혈통 우선에 따라 부계 호적에 입적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현 시점에서는 모계 입적도 보편적이지만, 당시에는 부례 우선주의가 작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부친이 사망함으로써 호적 이동에 대한 의사결정을 생모가 관여할 수 없게 되면서 친인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으로 작동했다는 분석이다.

호적 불일치 사유와 시기로 분석하면 4.3 이전과 4.3 이후 시기로 나뉘어진다. 4.3이전 시기는 4.3으로 인한 호적 불일치 원인보다는 제주사회의 문화적 환경 및 제도 미비 등에 의해 발생한 경우가 많았다. 호적부의 존재도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초안이 나오는 등 사실상 국가라는 형태가 갖춰지기 이전이었던 탓이다.

4.3이후에는 피해의식 때문에 호적 신고가 늦거나 타인의 호적에 입적시키는 사례가 다수였다. 도피 과정에서 출생신고를 놓치는 경우도 있었고, 연좌제 피해를 우려해 호적 취득 시기를 늦춘 사례도 발견됐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해당 유족들이 호적 불일치 정정 시도를 숱하게 진행했음에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데 있다. 조사 대상자의 61.5%는 호적 불일치 정정시도가 있다고 답했다. 유족 상당수는 적극적으로 재판을 통해 불일치를 정정하려 하거나 관련기관에 문의하는 등 여러 실패를 겪어왔다.

호적 불일치 정정 시도가 번번이 무산된 데는 현행법상 호적 정정이 법원 판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데 있었다. 법적 절차상 희생자와의 유전자 검사 과정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유전자 검사가 어렵기도 했고 사회적 통념상 부친의 묘를 훼손할 수 없어 중도 포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기술적으로 모든 시신에서 DNA가 검출된다는 보장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 친지간의 이해 문제, 문화적 관습 문제도 발목을 잡았다.

결국 호적 불일치로 인한 생활사적 어려움은 고스란히 유족들의 몫이 됐다. 조사 대상자들은 가족의 해체, 정체성 문제,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편견, 교육 및 직업 획득의 어려움, 호적 정정의 어려움 등 갖가지 고생에 노출된 과거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들의 호적은 정정하지만 딸의 호적은 정정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해 자아정체성의 혼돈을 초래하기도 했다.

22일 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제주4.3사건으로 인한 호적불일치 실태조사 보고 및 토론회'. ⓒ제주의소리
22일 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제주4.3사건으로 인한 호적불일치 실태조사 보고 및 토론회'. ⓒ제주의소리

현 연구원은 "4.3으로 인한 희생자의 호적 불일치는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 가족사의 문제로 볼 수 없다. 원인 측면에서 국가의 폭력에서 비롯된 문제이기 때문에 해결방안 마련을 위한 면밀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현 연구원은 "불일치의 원인 측면에서 살펴봤을 때 모친이 재혼하거나 혼인신고가 안 된 상태에서 부친이 사망함으로써 실질적 유족 본인들의 선택보다는 친인척이나 사회적 관습에 의해 호적 등재가 발생하고 있다"며 "불일치 사유가 다양한 만큼 좀 더 세밀한 조사를 통해 희생자의 실질적 유족이 맞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4.3특별법 개정 절차도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 연구원은 "법원의 판결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유전자 감식 결과 제출 등의 조건이 발생하고 있으나, 희생자가 행방불명자인 경우 대조 가능한 유전자를 확보할 수 없는 문제가 있고, 사망자인 경우에도 희생자의 무덤을 훼손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며 "4.3특별법 개정을 통한 특례 조항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도 검토의견을 통해 발표자의 의견과 궤를 같이했다.

강민철 4.3지원과장은 "희생자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기록될 경우 낙인과 연좌제 피해를 겪게 될 것을 우려해 타인의 호적에 입적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가족관계의 혼란은 국가폭력에서 파생된 피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바로잡는 것은 과거사 정리의 피해회복 과정에서 필수적인 절차"라고 강조했다.

강 과장은 "일반적인 가족관계등록부 작성과 정정의 절차 규정에도 불구하고 간소화된 절차를 마련해 호적부 정정이 필요한 유족들의 시간적·비용적 부담과 번거로움을 덜고 4.3특별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한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족관계 불일치 실태조사에 함께 참여한 오화선 실장은 실질적인 유족임에도 가족관계등록부의 불일치로 인해 법적 유족이 되지 못한 사례를 세세하게 소개하며 "가족관계 불일치 문제는 제주4.3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른 과거사 관련 사건들과 연대해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며 "행정과 유족회가 법조계와 함께 법률과 규칙 등에 대한 설명회도 하고 지원조직을 만들어 실질적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성주 사무처장 역시 "4.3특별법을 개정하든, 가족관계등록법 등 관계 법령에 대한 특별보치법의 제정 등을 통해 70년 넘게 잘못된 가족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특단의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개정될 내용에는 △재적부에 없는 4.3당시 출생한 희생자 호적 창설  △부모의 행방불명으로 DNA 대조 등 사실규명이 어려운 경우 증언에 의한 자녀관계 인정  △행방불명된 희생자가 살아있는 것으로 된 상태에서 이뤄진 혼인신고와 자녀 출생신고 인정 등의 조항이 꼭 반영돼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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