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35) 신희자 어르신의 두 번째 이야기

밥이 보약이라 했습니다. 바람이 빚어낸 양식들로 일상의 밥상을 채워온 제주의 음식은 그야말로 보약입니다. 제주 선인들은 화산섬 뜬 땅에서, 거친 바당에서 자연이 키워 낸 곡물과 해산물을 백록이 놀던 한라산과 설문대할망이 내린 선물로 여겼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진경 님은 제주 향토음식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입니다. ‘제주댁, 정지에書’ 시즌1에서 소개된 지난 1~25회 원고는 제주의 음식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서술이었습니다. 이어 ‘제주댁, 정지에書’ 시즌2로 마련된 26회 원고부터는 제주의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매월 한 분의 삶을 풀어낸 글을 격주로 소개하면서 그 속에 DNA처럼 배어있는 제주음식 이야기를 함께 교감하려 합니다. 인터뷰에는 일러스트 작가 '色色님'도 동행해 현장에서 영감을 찾아낸 아름다운 삽화도 매회 선사합니다. 할망 하르방이 들려주는 제주인의 삶과 제주음식에 깃든 지혜를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글]

신희자 어르신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전편에서 이야기했듯 어르신이 태어난 곳은 한림읍 대림리이다. 아버지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에는 몇 년 동안 심한 가뭄이 들었단다.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던 어르신 가족들도 가뭄의 여파는 피해가진 못했다. 보리쌀, 조, 산듸쌀을 힘차게 갈아대던 방앗공장은 기계가 멈추고 적막함이 감돌았다. 방아기계가 돌아가야 그 삯으로 돈이나 쌀보리를 받는데 그 시기에는 그런 삯을 기대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대림에서는 당장 먹을 것이 없기에 깅이, 보말, 전복 등 바릇 괴기라도 먹기 위해 바닷가인 한림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한림 원담에 멜이 들면 멜 뜨러 마을 사람들 모두 나가 자리를 떴다. 신희자 어르신네도 마찬가지였다. 멜을 뜨고 멜젓을 담그는 것은 그 당시 제주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었다.

“자리삽써~” 자리장수의 외침이 저 멀리 올레 밖에서부터 들리면 집이나 밭에서 일하다가도 버선발로 뛰쳐나와 사야만 했다. 역시 자리젓을 담그기 위해서이다. 자리와 멜은 제주 사람이라면 꼭 마련해 두어야 하는 음식이었다. 일 년 치 먹을 멜젓과 자리젓, 여기에 된장까지 넉넉하게 마련해 두면 일단 일 년 치 반찬 걱정은 한숨 돌렸단다.

친정엄마가 겨우내 쇠(소)에게 먹일 촐을 베러 산을 오르면 졸갱이, 즉 주렁주렁 열린 으름을 따서 내려왔었다고 한다. 지금에야 으름이 생소하지만, 예전엔 흔했는데, 마치 바나나처럼 생으로 먹으면 그 맛이 지금 바나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으름 외에도 산에는 먹을 것들이 많았다. 어르신은 물릇도 많이 먹었고, 또, 엉겅퀴꽃을 뽑아서 쪽 빨아먹으면 달콤한 꿀이 입안에 싱그럽게 퍼져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신희자 어르신과 그 시기 제주사람들에게 산과 들, 바다는 작은 선물 같은 먹을거리를 베풀어주는 곳이었다. 그래서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물론, 내 곁에 있는 사소한 것들 모두 고마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셨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구덕을 들고 가까운 옹포리 주정공장에 가면 감저(고구마)쭈시를 받아올 수 있었다. 이것을 떡가루로 만들어 조배기를 해 먹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돗통시에 던져 돼지에게 먹이는 용도였던 전분쭈시는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양식이었다. 제주 어른들은 그나마 전분쭈시라도 있어서 살 수 있었다고 하신다. 밭농사가 안돼도 너무 안됐던 그 시절, 마을 사람들 거의 다 굶다시피 했었던 그 시기는 신희자 어르신이 12살~13살 무렵이었다. 

타지생활을 마치고 제주에 내려온 후 친정엄마가 중매로 시집을 보냈다. 같은 마을사람인 남편은 알고 보니 초등학교 동창이었다고 한다. 당시 전쟁 직후라 한림마을뿐 아니라 제주가 모두 어수선한 상태라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 불안정한 시기에 어느 집이나 그렇듯 남편에게 돈 문제가 생겨버렸다. 당시 10만 원을 메꿔야 했는데, 이 때문에 어르신이 타지생활을 하며 모아뒀던 돈 6만 5000 원을 그대로 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열심히 모은 돈을 허무하게 주며 온 상실감과 남편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1남 4녀의 자식들이 있기에 마냥 원망만 할 수 없었다. 다만 더욱더 이를 악물고 일과 살림을 병행했어야 했다. 보험 회사도 다녀보고 일본도 다녀왔지만, 옷을 만드는 작업이 가장 신희자 어르신에게 꼭 맞는 옷이었다. 남편이 원망스러웠을 법도 하지만 원망을 이겨내고 가족을 굳건하게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슬하의 자녀들과 옷을 만드는 일이었다고 한다.

“남편이 술을 좀 마시면 아이고 꼭 넘어져서 독을 깨. 젓갈이랑 장이랑 단무지도 그때는 엄청 담궜어서 집에 독이 많았거든. 그 독이 깨지면 어찌나 화가 나는지, 한번은 늦게까지 일하고 피곤한 상태에서 아침에 지친 몸을 이끌고 출근하려고 세수를 하고 있었어. 그런데 술에 취해 마루에 누워서 자고 있는 남편을 보고 있으니 어찌나 미운지 세수하던 물을 남편한테 뿌리고 도망치듯 출근해버렸어. 나중에는 약간 미안했지만, 그때 당시에는 어찌나 속이 시원했는지(웃음). 그렇게 미운정 고운정 쌓였던 것 같아.”

여느 우리네 할머니가 그러지 아니했을까마는 당시는 대부분 중매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던 시기였다. 지금처럼 연애결혼은 드물었지만 그렇게 50년 넘게 인생을 같이 살아온 배우자에 대한 마음은 나에게 해 준 말과는 달리 신희자 어르신의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엉겅퀴꽃

젊은 시절 내 남편은
들녘에 엉겅퀴 같았다
만만치 않은 세상 바른 자세로 서있는
그 고고한 자태에
나는 몰래 반했다
때로는 가시방석 같은 상처에 힘들어 했지만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듯
세월이 약이 되어 구름 가듯 흐른다
향기가 없는 것 같지만
벌과 나비가 모이고
갈지자 걸음에도 올곧은 성품 때문에
엉겅퀴 같은 향기로
오늘도 나를
유혹한다

신희자 어르신의 소녀 시절, 지천에 널려있던 엉겅퀴를 한 송이 따 입에 쪽 빨았을 때 입안에 퍼졌던 엉겅퀴꿀의 그 향기과 기억은 마치 남편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었나 보다. 

그리고 어르신이 내민 그림을 보고서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2019년 11월 어르신이 그린 그림. “동네 아이들이영 섬섬이 동산에 오르민 엉겅퀴 꼿이영 인동고장이영, 벌, 나비영 궈찌 놀았주”. 어르신의 옛날 기억에 엉겅퀴꽃은 과연 어떤 표상이었을까?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2019년 11월 어르신이 그린 그림. “동네 아이들이영 섬섬이 동산에 오르민 엉겅퀴 꼿이영 인동고장이영, 벌, 나비영 궈찌 놀았주”. 어르신의 옛날 기억에 엉겅퀴꽃은 과연 어떤 표상이었을까?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한평생 옷만 만드셨던 어르신에게 70세에 한수풀도서관에서 만난 붓은 어르신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어르신의 아뜰리에에 걸려 있던 그림을 보고 나는 그 그림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맞힐 수 있었다.

“어어 어르신 이거 보리랑 조 아니에요?”

바람에 넘실대는 익어가는 청보리와 차조, 어르신은 그림을 그릴 때 전체를 보기보다 부분이 갖고 있는 동적이 보인다고 하셨다. 어르신이 그린 차조와 보리는 어렸을 적 방앗간을 운영하던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바람에 넘실대는 익어가는 청보리와 차조, 어르신은 그림을 그릴 때 전체를 보기보다 부분이 갖고 있는 동적이 보인다고 하셨다. 어르신이 그린 차조와 보리는 어렸을 적 방앗간을 운영하던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라디오 코너에서 삼행시 대상을 거머쥔 이후, 옷을 만드는 작업 외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한수풀도서관의 문을 노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수채화 수업에 입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70세에 잡은 첫 붓은 어르신을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다. 섬세하게 놀려야 하는 붓끝은 옷을 만드는 바늘의 세심한 끝과 닮아있었고 여러 수채화 물감색은 어르신이 한평생 봐왔던 아름다운 비단과 별다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늘 봐왔던 솜틀방에서부터 나온 흰 면에 60년 가까이 형형색색 천과 실을 이용해 예술을 펼쳐왔던 신희자 어르신에게는 종이는 면이요, 붓은 바늘, 물감은 비단과 실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이제까지 봤던 그림 중 가장 역동적이었던 청보리 그림은 바람의 결마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리얼했다. 소녀 신희자는 보리와 차조가 우리집의 중요한 곡식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든 가까이 다 된 지금도 어르신에게 제주 제일의 곡식은 바로 저 그림의 주인공들일 것이다.

어르신이 보여 준 몇 장의 그림은 나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내가 이제껏 어르신들에게 구술로 들은 이야기, 구술자료집에서 읽은 텍스트를 그림으로 너무 아름답게 그려주셔서 눈물이 핑 돌기까지 했다. 그중 몇 작품을 함께 공유하려고 한다.

2019년 11월에 신희자어르신이 그린 으름과 머루. “어멍은 촐(소에게 먹인 목초지)비레 우뜨리 강 올 땐 졸갱이영 머루 땅 오민 동생덜광 오라방이영 궈찌 지꺼정”. 어머니가 따 오신 졸갱이(으름)과 머루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고 그걸 바라보는 동생들과 오빠들, 그리고 신희자 소녀의 표정은 그림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눈에 선하게 보일 정도이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2019년 11월에 그린 그림. “물때 맞추왕 바당가민 보멀 깅이영 전복 해삼, 물끄럭 잡앙오민 죽쑤웡 몸보기 하는 날이라.” 썰물 때 맞춰 바다가면 보말, 게, 전복, 해삼, 문어를 잡았고 그렇게 바릇잡이를 하는 날은 죽을 쑤어서 가족들이 몸보신을 했을 것이다. 극심한 가뭄이었을 당시 한림으로 내려오게 된 계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저 멀리 비양도가 보인다. 아버지를 잃고 한림으로 내려와 바릇잡이를 하며 저 비양도를 보며 소녀 신희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2019년 11월 그린 그림. “파란 참깻잎 토다당 머리 꼬무민 민질민질 잘도 좋아.” 신희자 어르신은 나와 이야기 중에도 말씀하셨다. 들깨가 아닌 참깨의 퍼런 부분 잎을 따서 머리에 문지르며 감으면 린스가 따로 필요없다고. 머릿결이 부드러워져서 그렇게들 많이 감았다고 하셨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2019년 11월 그린 그림. “어멍광 허벅정 걸으명 반짝반짝 빛나는 샛별은 머리큰 사람 탄생헌다 말 고르멍 통 아진밭 물 길어당 항 마다 가득 채웠져.” 전 편에서 언급했듯 어스름한 밤,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친정엄마와 함께 물허벅을 지며 물항을 가득 채웠던 소녀 신희자의 모습인 듯 보였다. 그림 가운데에 사이좋게 있는 두 개의 물허벅은 큰 허벅은 친정엄마 것, 작은 허벅은 소녀 신희자의 허벅이 분명해 보인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2019년 11월 그린 그림, “아침에 일어낭 물 먹쟁 국사발에 거리문 장골래비 활활 해엄첨신다.” 밤새 물허벅으로 몇 번이고 지며 물항에 가득 채운 물에는 올챙이들도 함께 집으로 왔다. 올챙이는 반사신경이 느려 대부분 고인물에 있다. 고여있는 물이라도 소중했던 그때 그 시절이 있었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2019년 11월 그린 그림. “장골래비 물 먹어도 옛날 그때가 그리운게.” 그림에 써진 글귀가 인상깊다.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가 불어나면서 바다도 공해되고 한림 먹는 물도 등급이 꼴등이 되어 걱정이 되는 삶’이라고 적으셨다. 아마 무수천 삼행시로 일등을 했던 어르신은 무엇보다도 우리 후손들이 살 제주섬이 파괴되는 것을 가장 걱정하시는 듯 했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2019년이면 신희자 어르신이 79세에 그린 그림이다. 이 따뜻하고 벅찬 그림을 섬세하게 그리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까? 처음에 들었던 생각이다. 하지만 찬찬히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르신의 80년 평생의 삶의 이야기가 축적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그림은 감히 누구도 그려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어르신은 나와의 대화 중간중간 “이제야 내가 이 나이 돼 보니까 우리 친정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제야 친정엄마의 마음이 이해된다. 돌아가신 우리 친정엄마 막 불쌍했다”며 친정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셨다. 친정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무의식적으로 투영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녀 신희자의 모습과 함께 어르신의 친정엄마의 모습도 함께 보이는 것 같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라도, 글을 잘 쓰는 작가라도 오랜 세월 인생의 희노애락을 그 작은 몸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신희자 어르신만큼 표현해 내지 못할 것이다. 

사실 신희자 어르신은 4년 전, 만났던 적이 있는 어르신이었다.

4년 만에 만난 어르신은 오랜만에 나를 보더니 대뜸 이 말을 먼저 꺼내셨다.
“아이고 내가 그 새 너무 늙어부런. 얼굴도 막 늙고 이젠 볼품이 없어져버련게.세상에 쉬운 게 하나도 없어. 하지만 어차피 받아들이며 살아야 한다면 투정부리지 말고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돼.”

4년 전보다 초라해져 버리고 늙어버린 모습이 창피하셨는지 그 말을 먼저 꺼내셨지만 난 안다. 그 깊은 주름과 흰 머리가 얼마나 신희자 어르신을 담대하고 멋진 붓끝을 표현하는 예술가로 만들었는지를.

평생 옷을 만드셨다는 어르신의 미소가 너무 예뻐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어떻게 사셨길래 저렇게 미소가 사랑스러울까... 좋아하시는 그림 오래도록 그리셨으면 참 좋겠다.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어르신이 80세에 그리신 시조화>

금년 산수연

나 아이때 울 어머니는 팔남매 식솔에
물 길어서 보리나무 불 붙이며 국 밥 하면
반찬 없이도 된장국 보리밥이면 행복했지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 자고
눈썹같은 초승달 바라보며 달콤한 엄마마음
골목에 모여 대죽 벗기며 먹는 웃음

이웃과 수눌음하며 콩밭에 앉으면
잡초 매며 세월 타령 시조 타령 하다가
아주 옛날 이야기는 콩잎들도 웃더라

비 오면 솥뚜껑 뒤집어 불 지펴
콩 볶으면 군것질, 보리 볶으면 개역(미숫가루)
하나 된 그 때의 동네(분위기)가 훤해서 좋았지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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