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충민의 보·받는 사람](5) 내 출생신고를 한 날이 아버지의 봄날이었습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필자의 기억을 소환해 전하는 편지글입니다. 새하얀 편지봉투 앞면의 아래위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칸에 볼펜을 꾹꾹 눌러 누군가와 나의 이름을 써 넣던 ‘우리 시대의 편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게 하는 코너입니다. 편지는 모바일 메신저나 인터넷 이메일로 소통하는 요즘엔 경험할 수 없는 공감의 통로입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풀이 없어 밥풀을 이용해 편지봉투를 붙여본 적 있는 세대들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그립습니다. / 편집자 글 |
지난 편지에는 한 달 전 12월 22일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썼습니다.
누구나 겪는 아버지의 죽음을 많은 분들이 내 일처럼 같이 슬퍼하시고 메일로도 많은 위로를 전해주셨습니다. ‘경사(慶事)보다, 애사(哀事)를 먼저 챙기고 슬픔을 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옛말이 틀린 말이 아니구나.’ 느꼈습니다. 슬픔을 같이 해 주신 분들께 거듭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미루고 있었던 아버지 사망신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요양병원에서 사망진단서를 받았습니다. 담당과장님께 그 동안 아버지 잘 돌봐주셔서 고마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경황없던 차에도 간호사 선생님들께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전화로 고맙다는 말씀 드렸고 아버지가 열 달 동안 계셨던 요양병원을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때까지 병원에서 발급해준 아버지의 사망진단서는 그대로였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서류작성때, 한 번 보여줬고, 그 후 누나, 조카들이 필요하다 하면 한 부씩 줬고 저는 정작 아버지의 사망진단서를 제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보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사망진단서” 라는 5음절은 다시금 아버지의 죽음을 환기시키고, 제주말로 이제, 저와 아버지를 이승에서 곱갈라버리는 명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던 것이지요.
이런 제 마음과는 별개로 아버지의 사망신고는 해야 했습니다. 돌아가신 날 효돈 신효집에 와서 귀양풀이를 하고, 제주시 관음사에서 사십구재 초재를 지내는 동안에도 늘상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실감이 나지 않았고 옆에 같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저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 행사에 같이 있었던 제 아들도 관음사 극락전에서 제게 “할아버지가 같이 계신 것 같애.” 라고 했으니까요.
그러는 사이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사망신고를 한 달 늦게 하면 과태료를 납부해야한다는 각시의 말도 있고 해서, 지난 금요일(1월21일) 아버지의 주소지인 효돈동 주민센터로 향했습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을 큰 결심처럼 마음먹고 말이지요. 딱 아버지 가신지 딱 한 달 되기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효돈동 주민센터, 기어이 울음이 터지고...
사뭇 긴장되었습니다. 주민센터는 우리 효돈마을 가운데에 있는 터라, 오가며 수도 없이 봐 왔던 곳이지만 예전과는 기분이 달랐습니다. 주민센터 안으로 들어서는데 큰 한 숨이 나왔습니다.
“사망신고 하러 왔습니다.”
제 말에 주민센터의 직원은 제게 관계를 묻고, 사망진단서를 갖고 왔는지 물었습니다. 직원은 사망신고서샘플을 주면서 보면서 작성하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줬습니다.
주민센터 가운데에 놓인 책상에 앉아서 사망신고서에 아버지의 이름과 제 이름을 또박또박 썼습니다. 아버지의 주민번호를 적고 제 주민번호도 적었습니다. 비로소 아버지의 사망진단서를 제 두 눈으로 똑바로 마주했습니다. 사망진단서에 적혀 있는 것은 정확히 아버지의 이름과 사망일시였습니다. 주민센터 가운데 놓인 책상과 의자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아버지의 죽음과 다시 맞닥뜨리고 있었습니다.
작성한 사망신고서를 창구직원에게 내미는데 기어이 울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이승에서 살아있는 사람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고인이 된 것입니다. 내 손으로 아버지를 그렇게 망자(亡子)로 밀어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살며시 의자에서 일어나 주민센터 밖으로 나갔습니다. 전국에서 제일 따뜻한 우리 효돈마을 답게 겨울이지만 봄 햇살처럼 따사로웠습니다. 하늘도 맑았습니다. “아버지...”하고 탄식이 나왔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와중에도 마스크를 써서 우는 모습을 주민 센터 직원들이 눈치 못 챈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십 년 넘게 안 피는, 담배를 한 대 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헛헛하게 하늘이 맑았습니다.
아버지는 출생신고를, 나는 사망신고를...
그렇게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하고, 주민센터 문을 나서는데 아버지 생각이 또 났습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을 아버지. 위로 누나 넷을 두고 아들인 내가 태어나서야, 비로소 아버지는 동네에서 큰 소리 쳤다고 내게 수도 없이 얘기했습니다.
딸 넷을 낳은 큰 어머니는 죽어가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 못 낳은 게 한(恨)이난예, 후제라도 아들 봉그민 꼭 나 아들로 해 줍서.”
그 약속을 지켰다며, 내가 우리 엄마가 아닌, 큰 어머니의 아들로 호적에 올라간 사연을 내게 말할 때마다 우셨던 아버지... (그때 큰누나 아홉 살, 둘째 누나 다섯 살, 셋째누나 세 살이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큰어머니 돌아가신 그 해에 와서, 큰어머니가 남기고 간 그 딸들을 키워냈습니다. 다른 편지에 이 이야기는 자세하게 꼭 쓰겠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 효돈은 신효와 하효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신효리사무소에서 수많은 감정들을 마음에 담고,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나의 출생신고를 했을 아버지... 그렇게 출생신고를 하고 얼마나 벅찬 감정으로 리사무소가 있는 앞동산에서 집으로 걸어왔을까요? 아마 그 때가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봄날이었을 겁니다. 지난 편지에도 썼듯, 아버지가 유달리 앞동산 이발소에서 당신의 손자인 내 아들과 그토록 같이 다니는 걸 좋아한 이유를 이제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순간의 기쁨이 당신의 손자대까지 내려온 것을 즐기고 누리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출생신고를 했을 아버지... 나는 내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들이 태어나면서 내가 아들의 출생신고를 했습니다.
누구나 반드시 태어나면, 반드시 세상을 떠나고, 보내고, 또 태어나고, 결국은 모두 영원한 건 없다는 단순한 이치를 이제 겨우 조금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는 비로소 미안하다 고맙다 했습니다
아버지는 손자와 벌초 다녔던 그 선영에 잠들어 있습니다. 천천히 운전하고 아버지가 묻힌 돈내코 선영으로 갔습니다. 빵 두 개 소주, 막걸리를 아버지 무덤 앞에 놓고 절을 하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아버지 가신 지 한 달 동안 참 많이도 왔습니다. 그때마다 무덤 앞에서 아버지에게 넋두리와 많은 원망과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다 늘 끝에는 아버지에게 보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쉽게 감정을 표출하고, 상처를 줬지만 누구보다 외로웠을 내 아버지. 나는 그 동안 아버지가 단 하루라도 신효집에 혼자 계시는 날 없게 나름 늘 신경쓰고 반찬챙기고 일주일에 세 번은 넘게 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외로움을 어찌 내가 다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병원에 가기 한 달 전 쯤, 당신의 앞을 예감한 것처럼, 내 각시에게 말하셨습니다.
“원재 어멍.. 우리 집이 왕 고생많이 햄쪄. 다 알암쪄... 미안하고 고맙다...독헌 시아방 성질 다 받아주잰 허난... 속암쪄..눈 먼 시어멍 20년동안 모셩사는거 아무나 못헌다. 원재어멍 아니라시민 벌써 느네 시어멍 죽어실꺼여. 다 알암쪄. 우리집이 어진 메누리 들어오난 큰 싸움어섯쩌, 고맙다. 고맙다.”
결혼하고 21년만에 처음 듣는 그 말에 각시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아무 말도 못하고 “아니우다. 아니우다” 만 했습니다.
여전히 운전하다가. 길을 걷다가 무심코 아버지의 죽음을 자각하면 힘이 듭니다. 나에게 수많은 짐만을 주고 간 아버지를 가끔 원망도 합니다. 나의 의지는 전혀 없이 아버지의 행위로 설정된 관계들이 너무도 힘이 듭니다. 이젠 나도 정말 조금은, 편안해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 아버지는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내 아버지에게 꼭 하고 싶은 말로 끝을 맺습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2021년 1월 25일
아들 강충민 올림
#강충민 시민기자는?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주의소리,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써왔습니다. 해 보고 싶은 일이 많아, 호텔리어, 입시학원강사, 여행사팀장, 제주향토음식점 대표를 했고, 지금은 독서논술교실을 하며 아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늘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소소한 일상을 소중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제주참여환경연대 회원가입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