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76) 리춘펑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1956년 홍콩 '쌍십절 폭동'의 현장. ⓒSCMP(South China Morning Post)
1956년 홍콩 '쌍십절 폭동'의 현장. ⓒSCMP(South China Morning Post)

1950년대 중국 공산당이 집권하고 국민당이 대만으로 철수하자 친중 좌파와 친국민당 우파 세력은 각각 홍콩이라는 예외 지역에 일정한 정치력을 갖고 노동조합, 교육기관, 문화 신문 매체 등에서 두 갈래 계파가 병존 대립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한편 1949년 이후 대량 난민이 홍콩에 유입되면서 전후 50만명 수준이던 인구가 50년대 초 220만명 가까이 증가하면서 취업난, 주거 및 생활물자 부족 등 민생문제와 치안악화와 경찰부패 문제가 심각해졌고, 사회적 불만은 언제든 식민지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바뀔 수 있는 시한폭탄처럼 변해갔다. 홍콩 정부는 이념 문제에서 이들 양대 세력 지지자들의 기미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대체로 탈정치적 태도를 취하면서 어느 한쪽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무리한 개입을 피했다. 이런 맥락에서 일상이 좌파와 우파의 활동에 둘러싸여 있어도 일반 민중은 정치 참여에 크게 관심이 없다.

ⓒ제주의소리
1956년 홍콩 '쌍십절 폭동' 당시 경찰의 봉쇄선. ⓒ리춘펑

1956년 10월 10일 중화민국의 국경절(충칭절)은 연례 홍콩 친국민당 우파가 대중을 조직하는 중요한 날로 난민 재정착 지구 곳곳에 중화민국의 국기가 게양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날 재정착 지구 직원들이 경비 상의 이유로 거대한 축하 간판을 내거는 것을 제지하고 벽에 붙은 깃발을 파기하자 불만을 품은 민중이 사무실을 포위하고 사과를 요구했다. 군중은 오후에 사무실을 나간 직원들을 뒤쫓았으며 현장에 있던 경찰관이 구조에 나선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경찰에게 물건을 던진 뒤 사무실로 돌아와 부수고 방화했다. 경찰은 기동대를 동원해 밤사이 소요사태는 다소 진정됐다.

이튿날 군중이 다시 집결해 소요는 더욱 확대됐고 폭도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경찰에 투석해 길을 막고 물건을 불태우기도 했다. 노동조합 공장 복지협회 등 다수의 좌파 조직이 약탈 방화 표적이 돼 직원들이 구타당하고 심지어 강간당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좌파뿐 아니라 외국인도 공격 대상이 됐다. 이 가운데 홍콩 주재 스위스 영사관의 프리츠 에른스트 부영사 부부는 소요 현장을 차량으로 지나가다가 제지당해 화살을 당했고 영사는 차에서 끌려나와 구타당해 중상을 입었으며 부인은 습격 중 숨졌다. 오후가 지나면서 폭동이 경찰력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홍콩 정부는 영국군을 파견해 진압을 지원했고 저녁에는 홍콩 사상 처음으로 계엄령을 주룽반도 전역에 내렸다. 최종적으로 소동은 며칠 후에 진정되었다.

이 소란은 6,000명 이상의 체포자, 60명의 사망자, 300명의 부상자를 냈고 전후 홍콩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냈다. 몇 달 뒤 홍콩 정부가 영국에 제출한 주룽 및 샤오완 폭동 보고서는 이 소요가 국민당 지지 삼합회 회원들이 일으킨 것으로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차제에 좌파 노동조합을 공격해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시도라고 지적했다. 이 소요가 국민당에 의해 조직됐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소요 당시 조직원인 홍콩인이 체포됐고 이후 영내에서 추방됐다.

이 폭동은 전후 홍콩 사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별로 주목받지 못했으며, 대부분의 홍콩인은 그 존재조차 모른다(그것은 어느 정도 반공적 냉전의 역사인식의 반영이다). 실제로 이 폭동을 계기로 홍콩 정부는 경찰의 폭동 진압 부족을 절감하고 군에 준하는 기동경찰 부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고, 이것이 경찰 기동부대(PTU:Police Tactical Unit)의 유래가 됐다. 한편 이 폭동으로 민중의 힘의 크기를 보여주면서 홍콩 정부는 앞으로 더욱 그 통치에 대한 압력이 강해질 것으로 보고 군사상, 중국 공산당의 위협에 대응할 필요성의 비용대비 효과를 고려해 영국 내에서 홍콩 포기 검토가 제안됐었다.

그러나 홍콩은 미국에 일정한 전략적 가치가 있고, 만일 영국이 철수하면 파워 밸런스가 무너져 미지의 불확실성을 야기한다. 결국 미국은 영국 측에 장차 홍콩을 방위권에 포함시키는 것, 즉 중공이 홍콩을 침공하면 제7함대를 파견하여 지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미국의 지지로 영국은 홍콩의 운영을 더욱 자신하게 되었고, 이후 일련의 사회개혁 정책을 실시하면서 1960년대에서 1970년대 홍콩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거의 같은 시기에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에서 일어난 탈식민지화 운동과는 대조적으로, 홍콩은 식민지 시스템을 검증할 기회를 놓쳤다고 할 수 있다. 이 소란은 영국 영토 홍콩의 식민지 행정을 더욱 안정시켰고 홍콩이 탈식민지화 운동과 스쳐 가는 전기가 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젊은이들의 로컬 급진적 활동과 글로벌 좌익 사조가 재연될 때까지 검증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 리춘펑

리춘펑(李俊峰, LEE Chun-Fung)은 홍콩에 거주하는 예술가이자 큐레이터이다. 그의 작품들은 공간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공동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는 <Can We Live Together?>(2014) 등과 같은 큐레이터 프로젝트를 비롯해 <Cycling to the Square>(2010~), <Pitt Street Riot>(2014) 등의 프로젝트에서 참여적인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홍콩의 풀뿌리 동네인 야우마테이(Yau Ma Tei)에 기반을 둔 커뮤니티-예술 공간인 우퍼텐(Woofer Ten, 2009-2015)을 포함한 여러 예술 이니셔티브의 공동 창립자였다. 한편, 그는 동아시아 멀티미팅(Multiple Meeting, 2012-2013)과 <Art/Activist-in-Residence>(2011-2015)와 같은 프로젝트와 함께 지역 간 예술/활동가 교류에 힘쓰고 있다.


香港,與戰爭的距離 V:1956
李俊峰

50年代,隨中共上台,國民黨退守台灣,親中共的左派勢力與親國民黨的右派各有部署一定政治力量於香港此一「例外之地」,如成立工會、教育機構、文化及新聞媒體等,在此形成兩派並存、對峙的局面。

另一方面,由於49年後,大量難民湧至香港,人口從戰後約50萬增50年初近220萬,造成就業困難,住屋及生活物資短缺等民生問題,加上治安敗壞,警察貪污問題嚴重,社會不滿如計時炸彈,隨時轉化成針對殖民政權的挑戰。於是港府為免在意識型態的問題上觸犯兩大勢力支持者的敏感反應,一般採取去政治化的態度,不全面支持或打壓任何一方,避免強硬干預。在這脈絡下,一般民眾其實並不太熱衷於參與政治,甚或抱持冷漠的過客心態,雖然左右兩派的活動或許就圍繞在生活範圍當中。

1956年10月10日,時值中華民國國慶(雙十節),在港的親國民黨右派勢力向來視之為組織民眾的重要日子,是以每年在難民聚居的徙置區都可見中華民國國旗到處飄揚的情景。當日,由於徙置區職員因安全理由阻止民眾懸掛巨型慶祝招牌,又撕下兩面貼於牆上的國旗,引發民眾不滿,逐包圍辦事處要求道歉。兩名職員在下午離開辦事處時被群眾追打,群眾不滿在場警員出手營救,逐向警員投擲雜物,其後又到辦事處大肆破壞,並縱火焚燒。警方出動防暴隊增援,到晚上騷亂稍為平息。

節暴動中の警察の封鎖線

翌日,群眾再度集結,騷亂範圍進一步擴大,滋事者從四方八面而來,向警察拋擲石頭,搗路,焚燒雜物等。不少​​左派機構如工會、工廠、福利社等被針對式大肆搶掠、縱火,有職員被毆打,亦有報稱被強姦。除左派人士外,外國人亦成為襲擊目標。其中,瑞士駐港領事館的副領事恩斯特(Fritz Ernst)及其夫人,其座駕在路經騷亂現場時被截停並縱火焚燒,這名領事被拖出車外拳打腳踢,身受重傷,其夫人在襲擊中身亡。到中午時分,由於騷亂規模已超乎警方可控範圍,港英政府於是派出英軍協助鎮壓,並在晚上實施香港歷史上的首次戒嚴,範圍遍及九龍半島。最終,騷亂在數天後方告平息。

這次騷亂警方共拘捕​​6000多人,事件造成60人死亡,300人受傷,是香港戰後至今死亡人數最高的騷亂事件。數月後,港府呈交英國的《九龍及荃灣暴動報告書》指,騷亂是由支持國民黨的三合會成員發動,試圖藉擾亂社會秩序,借機攻擊左派工會,從而奪取工運的領導權。雖然沒有證據證明騷亂是由國民黨策劃,但有其在港人員在騷亂時被捕,及後被驅逐出境。

這場騷亂對戰後香港社會發展影響深遠,但其關注度一直不高,很多香港人甚至對這騷亂一無所知(一定程度反映某種反共的冷戰歷史意識)。其實,正正是因為是次騷亂,港府有感警察的鎮暴能力不足,逐決定成立一支準軍事化的防暴警察部隊,這就是「警察機動部隊」(PTU)的由來。另一方面,由於這次暴動顯示了民間力量的規模,港府認為日後管治壓力將日益增加,加上在軍事上同時又要應付中共的威脅,出於成本效益的考慮,英國內部於是提出「考慮放棄香港」。

然而,對美國而言,香港具有一定的戰略價值,若英國撒退將可能破壞局勢平衡,引發未知的變數。結果,美方對英方承諾日後會將香港納入其協防範圍,即若中共侵犯香港,美方會派遣第七艦隊支援。有了美國的支持,英國於是更有信心經營香港,其後亦推出一連串社會改革政策,讓香港在60、70年代進入高速發展期。

然而,從另一角度看,對照差不多時期在馬來亞和新加坡等地出現的解殖運動,香港卻錯失了一次藉此檢視殖民制度的機會;這騷亂讓港英殖民管治進一步步向穩定,同時又是香港與解殖運動擦身而過的轉折時刻;這機遇或許要到10年後,由本地青年激進運動與全球左翼思潮的影響下,方才再有火苗萌生,假如這不並非另一次的擦身而過...

圖1:1956年「雙十暴動」現場(圖:SCMP) 
圖2: 雙十暴動期間的警察封鎖線 


香港、戦争との距離 IV:1956年
リー・チュンフォン

1950年代、中国共産党が政権を獲得して国民党が台湾に撤退すると、親中左派と親国民党右派勢力はそれぞれ、香港という「例外地域」に一定の政治力を持ち、労働組合、教育機関、文化や新聞メディアなどに両派が並存・対立する状況を作り出した。

一方、1949年以降、大量の難民が香港に流入し、戦後50万人程度だった人口が50年代初めには220万人近くに増加したため、就職難、住居や生活物資の不足などの民生問題に加えて、治安の悪化や警察の腐敗という問題が深刻化し、社会的不満はいつでも植民地体制への挑戦に転化する時限爆弾のようになっていた。香港政府は、イデオロギー問題でこの二大勢力の支持者たちの機微を損なわないよう、概して脱政治的な態度をとり、どちらか一方を全面的に支持したり抑圧したりせず、強引な介入を避けた。このような脈絡で、日常生活が左派と右派の活動に取り囲まれていても、一般民衆は政治参加に関心がない。

1956年10月10日の中華民国の国慶節(重慶節)は例年、香港の親国民党右派が大衆を組織する重要な日として、難民再定住地区のいたるところに中華民国の国旗が掲揚されるのを見ることができた。この日、再定住区の職員が警備上の理由として巨大な祝賀看板を掲げるのを制止し、壁に貼ってあった2枚の旗を破棄したため、不満を抱いた民衆が事務所を包囲して謝罪を要求した。群衆は午後に事務室を出た職員たちを追いかけ、現場にいた警察官が救助に乗り出したことを不満として警官に物を投げつけ、その後事務所に戻って破壊し放火した。警察は機動隊を動員し、夜に騒動はやや沈静化した。

翌日、群衆が再び集結して騒動はさらに拡大し、暴徒が四方八方からやってきて、警察に投石し、道をふさぎ、物を燃やしたりした。労働組合、工場、福祉協会など多くの左派組織が略奪や放火の標的にされ、職員が殴られ、中には強姦されたとの報告もあった。左派だけでなく、外国人もまた攻撃対象となった。この中でも駐香港スイス領事館のフリッツ・エルンスト副領事夫妻は、騒動の現場を車で通りかかった際に制止されて焼き討ちにあい、領事は車から引きずり出され殴打されて重傷を負い、夫人は襲撃中に死亡した。昼過ぎには暴動が警察の手に負えなくなったため、香港政府は英国軍を派遣して鎮圧を支援し、夕方には香港史上初めて戒厳令を九龍半島全域に布いた。最終的に騒動は数日後に沈静化した。

この騒乱は6,000人以上の逮捕者、60人の死者、300人の負傷者を出し、戦後香港で最も多くの死者を出した。数ヵ月後、香港政府が英国に提出した「九龍及び荃湾暴動報告書」は、この騒乱が国民党支持の三合会メンバーらが起こしたもので、社会秩序を攪乱してその機に左派労働組合を攻撃し、労働運動の主導権を握ろうとした企てだと指摘している。この騒乱が国民党によって組織されたという証拠はなかったが、騒乱の時にメンバーの香港人が逮捕され、その後、領内から追放された。

この暴動は、戦後の香港社会の発展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が、あまり注目されず、多くの香港人はその存在すら知らない(それはある程度、反共的冷戦の歴史認識の反映である)。実際、この暴動がきっかけで香港政府は警察の暴動鎮圧の不足を痛感し、軍に準ずる機動警察部隊の創設を決め、これが「警察機動部隊」(PTU:Police Tactical Unit)の由来となった。一方、この暴動で民衆の力の大きさを見せつけられ、香港政府は今後ますますその統治への圧力が強まると認識し、軍事上また中国共産党の脅威に対応する必要性の費用対効果を考慮し、英国内で「香港放棄の検討」が提案されていた。

しかし、米国にとって香港は一定の戦略的価値があり、仮に英国が撤退すればパワーバランスが崩れ、未知の不確実性を引き起こす。結局、アメリカはイギリス側に対して、将来的に香港をその防衛圏に含めること、つまり中共が香港を侵攻したら、第七艦隊を派遣して支援することを約束した。米国の支持により、英国は香港の運営にさらに自信を持ち、その後一連の社会改革政策を実施して、1960年代から1970年代の香港は急速な発展を遂げた。

しかし別の観点からすると、ほぼ同時期にマレーシアやシンガポールで起こった脱植民地化運動とは対照的に、香港は植民地システムを検証する機会を逸したとも言える。この騒乱は、英国領土香港の植民地行政をさらに安定させ、香港が脱植民地化運動とすれ違ってしまう転機にもなった。それから10年後、若者のローカルかつ急進的な活動とグローバルな左翼的思潮が再燃するまで、検証の機会は訪れなかったのである。

図1:1956年 「双十節暴動」の現場(South China Morning Post紙より)
図2: 双十節暴動中の警察の封鎖線


Hong Kong, The Distance from War V: 1956
LEE Chun-Fung

In the 1950s, after the Chinese Communist Party (CCP) came to power and the Kuomintang (KMT) retreated to Taiwan, the pro-CCP leftists and the pro-KMT rightists both deployed their political forces in Hong Kong, such as trade unions, education institutions and media agencies etc, creating a situation where the two factions coexisted and confronted here together.

In this context, in order not to offend the sensitive reactions of the supporters from these two major powers, HK government generally adopts a depoliticized policy which does not strongly support or suppress either side. Thus, the general public is actually not really keen on politics, although the activities of the left and the right may be surrounded by the scope of daily life.

On 10th October 1956, the National Day of the Republic of China (Double Tenth Day), the pro-KMT rightist in Hong Kong have regarded it as an important day for organizing the public, so every year the national flag of the Republic of China is flown everywhere in the resettlement area where the refugees live. On that day, the staff of the resettlement area prevented people from hanging a giant celebration sign for security reasons and tore down two flags that were posted on the wall, causing vigorous discontent among their supporters, they surrounded the office and demanded an apology. When the staff left the office, they were chased and beaten by the crowd, hence they went on a rampage at the office, setting it on fire. 

On the following day, the crowd gathered again and the riot spread further, with rioters coming from all directions, throwing rocks at police and burning items on the street. Many leftist organizations such as the offices of trade union and welfare agencies were targeted and looted, some staffs were beaten, and some reported rape. In addition to the leftists, foreigners were also targeted, such as Fritz Ernst, the deputy consul of the Swiss Consulate in Hong Kong, was stopped when his car was passing the scene of the riot. He was dragged out of the car, punched to seriously injured, and his wife was killed in the attack.

By noon, as the riot was already beyond the control of the police, the government sent British troops to help suppress it, and then imposed the first martial law in Hong Kong's history, spreading across the Kowloon Peninsula. In the end, the riots subsided a few days later.

In this riot, the police arrested more than 6,000 people, which left 60 dead and 300 injured, making it the deadliest riot in Hong Kong ever. A few months later, the Hong Kong government submitted a report to London, stating that the riots were initiated by Triad members who are the supporters of KMT, in an attempt to attack the leftist trade unions in order to seize the leadership of the labor movement.

Today, although the riot has had a profound impact on the development of Hong Kong society, it has not received much attention, and many Hong Kong people do not even know anything about it (which reflects the absence of Cold War historical awareness). In fact, because of this riot, the colonial government found their insufficient capacity in riot control, as well as the difficulties in dealing with the threat from both KMT and CCP, for cost-benefit reasons, the British side started to have the idea of "abandoning Hong Kong".

Yet, for the United States, Hong Kong had its strategic value, the withdrawal of the British could upset the balance of power and create unknown uncertainties. As a result, the U.S. promised to the British side that they would include Hong Kong in their zone of defense. With such promise, Britain was able to govern Hong Kong with more confidence, and subsequently introduced a series of social reforms policies, which allowed Hong Kong to enter a period of rapid development in the 1960s.

However, from another perspective, Hong Kong missed an opportunity to examine its colonial governance in the light of the decolonization as the case happened in Malaya and Singapore around the same period. This opportunity is missed until the local radical movement by the youth and the global left-wing movement 10 years later, If this is not just another brush with decolonization…

Figure 1: The scene of the "Double Ten Riot" in 1956 (Photo: SCMP) 
Figure 2: Police blockade line during the Double Ten ri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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