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제주기행(7)]삼별초, 김정희, 이재수...화북동에서 역사의 흔적을 더듬다

▲ 거로마을에서 바라본 화북동. 화북공업단지 뒤에 화북주공단지가 보인다. ⓒ 장태욱
제주공항에서 일주도로를 따라서 동쪽으로 약 5km쯤 거리에 제주시 화북동이 있다. 화북동은 화북공업단지와 화북주공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인구 밀집지역이 되었고, 오현고등학교와 제주교육대학이 자리하면서 제주의 교육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이 곳은 과거 육지와 제주를 연결하는 관문이었기에 현대적으로 탈바꿈하는 와중에도 제주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많은 역사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화북 해안에서는 고려조정에서 삼별초의 상륙에 대비하여 쌓았던 환해장성을 볼 수 있다. 이 성은 1270년 9월에 고려 장수 고여림이 조정으로부터 제주방어의 명을 받고 도민들을 동원해 쌓기 시작했다.

▲ 환해장성. 고려 장군 고여림이 주민을 동원해 쌓기 시작했다. ⓒ 장태욱

기록에 따르면 제주해안에 축성된 환해장성의 총 길이는 300리(약 120km로 제주해안의 절반 길이)에 해당한다. 애초에 성을 쌓기 시작한 시기가 1270년 9월경이고, 이로부터 두 달 후 고여림 군대가 전투에서 패배하여 삼별초가 제주를 지배하게 되었음을 감안해 보면, 고려의 관군에 이어 삼별초 군대도 제주도민들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이영권의 '제주역사기행')

조선시대 화북포구는 조천포구와 더불어 육지와 제주를 연결하는 관문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제주읍성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제주로 부임하는 지방관뿐만 아니라 김정희, 송시열, 최익현 등 제주로 유배된 선비들이 애환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 화북포구. 과거 육지와 제주를 잇는 관문이었다. ⓒ 장태욱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절해의 고도이다. 과거 이곳은 척박한 땅과 모진 바람, 비가 많은 기후 때문에 바다에 의지하여 살 수 밖에 없었던 곳이었다. 제주도로 유배를 당했다는 것은 단순히 중앙정계에서 소외당했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유배 도중 풍랑을 만나 죽을 수도 있었고, 이 섬에 도착한 이후에도 추위, 기아, 질병, 왜구침탈 등의 시련에 쉽게 노출되었다. 유배인들에게 화북포구는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는 안도함을 주는 곳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시련을 맞이해야 하는 곳이었다.

추사 김정희도 해남을 떠나 화북에 당도한 후 부인 예안 안씨에게, '선중사람 다 수질(멀미)하여 정신을 잃어 종일을 굶어 지내는데, 나 혼자 수질도 아니하고 선상에 종일 바람을 맞고 앉아 밥도 잘 먹었다'는 편지를 남겼다. 그의 편지를 보더라도 당시 배를 타고 제주에 당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양순필의 '제주유배문학연구')

▲ 1820년 제주목사 한상묵이 지은 해신사. 이곳에서 정월 대보름에 해신제를 지낸다. ⓒ 장태욱
화북포구 앞에는 1820년 때의 제주 목사였던 한상묵이 해상활동의 안전을 위해 지었다는 해신사라는 사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매월 정월 보름에 해상활동의 안전을 위해 용왕에게 제를 지냈는데 지금까지도 그 풍습이 이어 내려오고 있다. 특이한 점은 유교를 숭상했던 추사 김정희도 유배를 마치고 제주를 떠날 때 이곳에서 해신제를 올렸다는 것이다.

당시 바람이 많았던 제주의 환경에서 무속신앙이 제주민중들 뿐만 아니라 제주를 다녀가는 이들에게 얼마나 강한 지배력을 발휘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아울러 '선중사람 다 수질해도 바람 맞고 앉아 밥을 잘 먹었다'고 했던 추사도 거친 자연 앞에서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였는지 실감하게 해준다.

화북이 제주의 관문이었기에 제주에 파견된 지방관들은 다투어 이곳에 자신의 선정을 과시할 목적으로 비석을 세우려 하였다. 화북동 비석거리에서는 목사 이현공, 목사 백희수, 목사 홍규 등 과거 지방관들의 이름이 세겨진 총 13기의 비석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곳 비석의 특징은 비문에 새겨진 지방관의 성씨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는 점이다.

▲ 비석거리. 비석 대부분이 지방관들이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 세운 것들이다. ⓒ 장태욱
이영권은 이를 가문을 중요시하는 신분제사회에서 별다른 저항수단을 갖지 못했던 민중이 탐관오리의 학정에 대한 분노의 표시로서 '비석치기'를 행한 결과라고 했다. 그 곳의 비석 대부분이 탐관오리의 횡포가 극심했던 19세기에 대부분 세워졌음이 이를 증명한다고 했다.

화북에 있는 대부분의 역사유적이 화북 포구와 화북 해안 가까이에 있는 동마을, 중마을, 서마을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이들 마을보다 해안에서 조금 더 멀어지면 화북공업단지와 화북 주공아파트를 볼 수 있다. 화북은 해안 가까이에 있는 세 개의 전통 마을과 두 개 단지를 중심으로 현대적 주거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중심지에서 조금 중산간 지역으로 벗어나면, 거로마을과 황사평 마을, 동화마을 등의 농촌형 마을들이 나온다. 이곳에는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많이 살고 있지 않고, 주민 대분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 황사평 천주교 묘역. '이재수의 난'에 죽은 천주교인들을 기리기 위한 묘역이었는데 지금은 일반 천주교 신자들의 묘역으로도 사용된다. ⓒ 장태욱

황사평 마을안에는 이재수의 난 당시에 살해된 천주교인들이 묻혀있는 '순교자묘역'이 있다. 이 황사평순교자묘역이 최근에는 일반 천주교신자들도 묻힐 수 있는 공동묘지로 탈바꿈되었다. 그리고 이 묘지 주변에는 천주교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여러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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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는 화북동에 있는 별도봉을 소개하겠습니다. 취재를 위해 도와주신 화북동 조희철 동장님과 한경훈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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