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제주기행-항파두리성]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하게 하는 곳

제주시내에서 16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차를 몰고 가다보면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광령 마을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고성리에 도달하면 항파두리성을 볼 수 있다. 항파두리성은 고려조정이 원에 굴복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삼별초 군대가 여몽연합군과 맞서 최후까지 항전했던 곳이다.

고려 조정이 원과 화친할 것과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결정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무기를 싣고 남하한 삼별초군은 진도에 도착하여 용장성을 쌓고 남해 연안을 지배하며 해상왕국을 이루었다.

고려 조정은 진도 용장성의 삼별초 군대를 공격할 것을 결정하고, 용장성 공격 이전에 삼별초의 퇴로를 봉쇄할 목적으로 고려 장수 고여림에게 탐라를 수비할 것을 명하였다. 삼별초에서도 별장 이문경에게 탐라를 장악할 것을 명하니, 1270년에 이문경부대가 제주에 상륙하여 고여림 군대를 격파하고 탐라를 장악하게 된다.

1271년에 진도에 있던 삼별초군은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삼별초군은 여몽 연합군의 화공을 견디지 못했고 전쟁에서 배중손 등 주동자들은 전사하여, 1271년 5월 15일에 용장성은 함락하였다.

 
▲ 항파두리성. 잘 다듬어진 공원에 온 느낌을 준다.
ⓒ 장태욱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은 탈출한 사병들을 거느리고 이문경이 장악하고 있던 제주로 들어왔다. 그는 한라산 북쪽 귀일촌에 흙으로 15리(6km)에 이르는 외성을 쌓고, 돌로 내성을 쌓으니 이게 항파두리성이다.

 
▲ 소왕천. 항파두리성의 외부를 남서쪽으로 흘러서 요새기능을 강화한다.
ⓒ 장태욱
 
이곳은 지대가 높고 북서쪽 방향으로 깊은 하천이 있어서 천연요새를 이룬다. 게다가 구시물이나 옹성물 등 주위에 마실 물이 풍부했다. 외성 안에는 백성들이 살게 했으며, 내성에는 관아를 둔 것으로 생각된다.

 
▲ 복원된 외성. 흙으로 복원했든데, 사료에 기록된 것에 비해 외소하다.
ⓒ 장태욱
 
토성이 다 이루어진 이후에는 민가에서 재를 거두어 두었다가 적의 공격이 있으면 말꼬리에 빗자루를 매고 토성 위를 달리게 하였다. 이렇게 재 먼지를 일으켜 적이 성내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연막술을 사용한 것이다.

 
▲ 토성 위에 서면 해안가가 내려다 보인다.
ⓒ 장태욱
 
그리고 지금의 애월읍 동귀리에 있는 귀일포구를 군항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 곳을 군냉이(군항이 변형된 명칭)라 부른다. 삼별초는 이곳을 기점으로 내륙공격에 나섰는데, 가는 곳마다 맹위를 떨치며 고려와 몽고를 괴롭혔다.

 
▲ 애월읍 동귀리 군냉이 포구. 삼별초 군대가 군항으로 사용했던 포구다.
ⓒ 장태욱
 
삼별초의 항전은 특히 몽고의 일본정벌계획에 타격을 입혔다. 이에 고려와 원은 탐라에 사신을 보내어 김통정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1273년 고려 장군 김방경이 여몽 연합군 1만 명을 이끌고 탐라를 공격하였다.

김방경은 배의 일부를 명월포로 상륙시키는 위장전술로 삼별초를 유인한 다음 주력부대를 함덕포에 상륙시켜 그 곳을 수비하고 있던 삼별초 부대를 격파했다. 그리고 귀일의 파군봉에 있던 삼별초의 전초기지를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이곳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삼별초군이 항파두리성으로 후퇴하자 여몽연합군은 성을 공략하였다.

 
▲ 군냉이에서 바라본 파군봉. 항파두리성에서 2.5km 북쪽에 있는 봉우리로 삼별초의 전초기지였다.
ⓒ 장태욱
 
여몽연합군이 명월포에 상륙하는 것으로 오인해서 그곳으로 출병한 김통정 장군은 명월포에서 항파두리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병들을 모아 항파두리성의 인근에 있는 붉은오름에 진을 쳤다. 이곳에서 김통정 군사들과 김방경의 군대가 뒤섞여 싸우니 산은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김통정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부인과 함께 산속에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1231년 이래 42년 동안 이어졌던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끝을 맺었다.(자료 : 김봉옥의 '제주통사')

오랫동안 역사에 묻혀있었던 항파두리성이 복원된 것은 1977~1978년이다. 이영권은 이 시기에 항파두리성이 복원된 이유를 '유신체제가 자기의 모순을 감당하지 못하여 파국으로 치닫건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국민들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었던 많은 상징물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 순의문 안으로 들어서면 순의비와 기념관이 있다.
ⓒ 장태욱
 
그러다보니 복원된 토성도 원형과 거리가 멀다고 했다. 사료에는 성위에 재를 뿌리고 말을 달리게 했다고 기록되었지만, 그러기에는 복원된 토성이 너무 초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성 안에 만들어진 순의비나 기념관도 제주의 특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한민국 스탠다드 충혼사당이 하나 더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 전시관 내부. 후대에 그린 그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 장태욱
 
반원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목숨을 걸고 항전했던 삼별초 군사들의 자주적인 기개가 친일 천황주의자 박정희에 의해 농락당했다고 했다. (자료 : 이영권의 '제주역사기행')

 
▲ 구시물. 당시 성내 병사들이 마셨다는 물이다.
ⓒ 장태욱
 
항파두리성 인근에는 당시 성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식수원이었던 장수물, 옹성물, 구시물 등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눈으로 확인해본 결과 장수물과 옹성물은 말라서 거의 나오지 않고 있었고, 구시물은 계속 샘물을 내뿜고 있었다.

항파두리성 남쪽 약 1km되는 지점에는 '살 맞은 돌'이라 부르는 바위가 있다. 바위에 가운데에 큰 구멍이 뚫어져 있어서 민가에서는 이 바위가 삼별초 군대가 활 쏘는 연습을 할 때 과녁으로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과학적인 신빙성은 없지만 당시 이 지역 주민들이 삼별초에 대한 기대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 살 맞은 돌
ⓒ 장태욱
 
항파두리성이 그 역사적 의의를 되찾고 역사 학습의 공간으로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왜곡된 우리 현대사부터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교훈을 주는 곳이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했던 모양이다.
 
 
항파두리성 가는 길 : 제주시내에서 16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서부관광도로 입구가 나옵니다. 그 곳에서 우회전하여 광령 마을로 들어서서 4km정도 더 가면 항파두리성 표지판이 나옵니다.

다음 편에서는 고성2리를 소개하겠습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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