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제주기행-고성2리] 양잠농가 떠난 자리에 별장주택 들어서

 
▲ 고성2리 마을회관
ⓒ 장태욱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16번 도로를 따라가다 서부관광도로에 진입해서 약 5km만 더가면, 제주외국어고등학교의 진입로를 찾을 수 있다. 제주외국어고등학교가 고성2리에 들어섰기 때문에 이 길을 따라 가면 고성2리 마을에 당도할 수있다.

 
▲ 제주외국어고등학교
ⓒ 장태욱
 
고성2리 마을은 원래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는데 1967년 정부가 ‘이상적인 농촌건설’을 목표로 조성한 양잠단지로부터 출발하여 마을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마을에서 양잠의 근간이 되는 뽕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양잠이란 누에를 키워 고치를 생산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보통 누에는 알→애벌레→번데기→나방의 단계를 거쳐 완전 탈바꿈하는 곤충으로서, 알로서 겨울을 난다. 그리고 봄이 되어 뽕잎이 피는 시기가 되면, 누에알에서 애벌레가 부화해 뽕잎을 먹이로 하여 성장해 고치를 짓는 것이다.

 
▲ 정원수로 심은 뽕나무를 어렵게 한 그루 찾을 수 있었다.
ⓒ 장태욱
 
우리나라의 양잠업은 1960년대의 세계 수출시장의 호황과 정부 정책에 힘입어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1972년 6월 9일에 열린 누에치기 시범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씨가 읽은 연설문을 보면 양잠업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알 수 있다.

(잠사)의 세계 총 생산량이 모든 섬유에 대하여 0.2%라는 희귀성 때문에 절대 수요량이 항상 부족되고 있는 현상으로 미루어 우리나라 잠업의 전망은 매우 밝고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잠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지난 68년부터 양잠농업을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으로 책정하고 행정력을 강화하여 여러분을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만, 질과 양 면에서 공히 세계시장을 주름잡기 위해서는 고치를 생산하는 농민이나 생사와 비단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사람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더한층 연구와 노력과 분발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자료 :<지방행정> 제 21권, 1972)

그러다가 1973년의 유류파동과 각국의 수출여건의 변화 등으로 인해 수출 실적이 크게 감소하였다. 게다가 양잠이 다른 작물에 비해 노동집약적이니만큼 농촌 노임 상승은 생산비를 급격히 향상시켜 양잠 농가를 위태롭게 했다.

특히 1976년 이후 양잠업은 불황에 빠져 그 수익성은 크게 악화되었다. 1969년 전국적으로 57만호에 이르던 양잠농가 수는 1979년에 이르러서 35만 4천호로 거의 절반 가량 감소하였다.(자료 : <농촌경제 제14권 3호> 1981)

 
▲ 1967년 처음 이곳에 입주하며 지었다는 강인종 씨의 집
ⓒ 장태욱
 
이곳 양잠단지에 입주한 농가들은 사양길에 접어든 양잠업에 참여하며 쓰라린 좌절을 맛봐야 했다.

1967년에 원래 사람이 살고 있지 않던 이 마을에 120ha의 면적으로 양잠단지가 조성되자 이곳에 40세대 주민들이 입주하였다. 가구당 25만5천원의 비용을 지불하고 뽕나무를 키우는 상전과 일반 작물재배지를 합하여 3ha(9천 평)의 땅을 불하받았다. 가족노동으로 황무지 땅 9천 평을 경작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뽕나무는 심은 지 3년은 되어야 완전한 상전이 되어 육잠이 가능하기 때문에, 입주 초기에는 상전에서 조금의 소득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단지 주민들은 토지 구입 때 생긴 부채에 대한 연리 8%의 이자와 상전관리비를 꼬박꼬박 지출해야 했다.(자료:<북제주군>지 1970년 9월호)

 
▲ 강인종 씨, 몇 남지 않은 이 마을의 살아있는 증인 중 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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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 이곳에 입주했다는 강인종(46년생)씨를 만났다. 제주외국어고등학교 바로 남쪽에 있는 그의 집은 입주당시 지은 그대로라고 한다. 40년 된 집인 만큼 지난 세월의 흔적들을 집에서 느낄 수 있다.

“초기에 정부 보증으로 은행에서 가구당 25만5천원을 융자해주었고, 그 돈으로 땅 9천 평을 불하받았습니다. 그 당시 이 지역은 땅값이 평당 10원, 20원에 불과할 때였습니다. 근데 양잠업을 시작하겠다고 입주한 이후 10년 동안 겪은 고생은 말로 다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뽕나무를 키우는 동안은 수익이 없었고, 뽕나무가 자라서 잠업이 가능해질만하니 양잠이 사양 산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수익을 낼 수가 없었어요. 뽕나무를 심었던 자리에 다른 작물을 심었는데 수확이 인근의 다른 마을에서 재배했을 때의 70%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곳 토질이 워낙 산성이에요. 그래서 입주한 주민들 중 태반이 도로 불하받는 땅을 팔고 떠났습니다.

“그 때 입주한 농가들 중 현재까지 이 마을에 남아있는 집이 4가구밖에 안됩니다. 나도 중간에 너무 어려워 땅을 많이 팔고, 지금은 농지가 3천 평정도 밖에 남지 않았어요.”

 
▲ 이 마을 근처에서 별장 형 전원 주택을 많이 볼수 있다.
ⓒ 장태욱
 
이 마을에서 별장형 전원주택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을 남쪽에 있는 둘런머리 동산에는 원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요양원과 훈련원이 들어서있다. 이렇게 농업과 관련 없는 외지인들이 들어서게 된 배경에는 서부관광도로 확장이 한 몫하고 있었다.

서부관광도로가 확장되자 제주시내와 마을을 잇는 교통이 훨씬 편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전원 생활을 동경하는 외지인들이 많이 입주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1998년 이곳은 고성2리라는 명칭을 얻고 새로운 행정마을로 신설되었다.

 
▲ 원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요양원
ⓒ 장태욱
 
고성2리는 주위가 푸른 들판과 언덕으로 둘러싸인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이 마을에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정착했던 농민들이 거의 다 절망을 안고 떠나가고, 그 빈자리가 이국적인 전원주택들로 채워지고 있는 현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과거 이 마을 양잠단지 정착민들이 겪었던 아픔이 제주도 농가 전체의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양잠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구하는데 제주대학교 농업경제학과 김자경 선생님이 도와주셨습니다.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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