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제주기행(18)] 늙은 곰솔은 나그네를 유혹하고

▲ 제단 제단이 파랗게 이끼가 끼어있다.
ⓒ 장태욱

제주시청에서 5·16도로를 따라 7km쯤 올라가면 제주대학교가 입구가 나오고, 그 곳을 지나 1km쯤 더 가면 제주시 아라동에 '산천단'이 있다. 

▲ 산천단 입구 푸른 나무와 검은 돌담이 어울어져 평화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 장태욱

기록에 의하면 과거 제주 사람들은 한라산 백록담 북단에서 산신제를 올렸다고 한다. 고려사에 보면 1253년(고종 40년) 10월 국내 명산과 탐라의 신에게 각각 제민(濟民)의 호를 내리고 춘추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리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인 1601년 제주를 찾았던 어사 김상헌이 임금의 명을 받아 한라산 백록담에서 한라산신제를 봉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봉행했던 한라산신제는 이약동(李約東·1416∼1493)목사가 제주로 부임하게 된 이후 현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소산오름 기슭으로 제단을 옮겨오게 되었다. 

▲ 산천단 산천단에 들어서면 늙은 곰솔이 눈에 들어온다.
ⓒ 장태욱

이약동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이며 시호는 평정(平靖)으로, 현령(縣令) 덕손(德孫)의 아들이다. 1416년(태종 16년)에 김천 하로(양천동)에서 태어났으며, 강호 김숙자의 문하생으로 영남학파의 종주인 김종직(金宗直)·조위(曺偉) 등과 연령차이가 있었으나 교우를 맺었다.

26세에 진시과에 합격하고 36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관직의 길에 올랐다. 1454년에 사헌부감찰·황간현감(38세)을 지내고 1458년에 지평·성균관직강(42세)을, 1459년에 청도군수(43세)를, 1464년에 선전관(48세)을, 1465년 사헌부집의(49세) 등을 역임했다.

▲ 이약동 목사를 기념하는 비석 산천단이 이곳으로 옮겨오게된 배경에는 이약동 목사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 장태욱

이약동은 그 후 1470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도임(到任)하였는데, 재직 당시  관하이속(官下吏屬)들의 부정(不正)을 단속하고 민폐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공물의 수량을 감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과거 한라산 산신제를 백록담에서 2월에 지냈기 때문에 얼어 죽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다가 1470년(성종1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약동이 도민들의 고생을 덜기 위해 이곳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소산오름 기슭에 한라산신제 제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매해 2월 첫 정일(丁日)에는 이곳에서 산신제가 봉행하게 되었다. 

산천단은 백성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목민관의 고뇌가 묻어 있는 곳이다. 이렇듯 백성의 삶을 배려했던 이약동 목사는 선정뿐만 아니라  청렴함으로도 후대에 이름을 남겼다. 

내살림 가난하여 나눠 전할 것이 없고
오직 있는 것은 쪽박과 낡은 질그릇 뿐
황금이 가득한들 쓰기에 따라 욕이 되거늘
차라리 청백으로 너희에게 전함만 못하랴
- 이약동의 시 

청렴을 자랑스러워하고 자식들에게까지 이를 가르치려 했던 이약동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시다. 이 시 말고 다른 일화들에서도 그의 청렴함은 나타난다. 

이약동이 제주목사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 손에 든 말채찍이 관청 물건인 것을 알고는 성루 위에 걸어 놓고 갔다. 후임자들이 오랫동안 그대로 걸어 놓고 모범으로 삼다가 채찍이 썩어 없어지자 백성들이 바위에 채찍 모양을 새겨 두고 기념했다고 한다.

이약동이 제주를 떠나 바다를 건너자니 배가 뒤집힐 듯 흔들렸다. "내 행장(行裝)에 떳떳하지 못한 물건이 없거늘 누가 나를 속여 욕되게 한 것이냐?"며 행장을 뒤지자, 제주의 부하들이 그를 위해 몰래 짐에 넣어 둔 갑옷 한 벌이 나왔다. 갑옷을 물에 던지자 금세 풍랑이 잦아들었다고 한다.

제주목사 임기후에 이약동은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7년 한성부좌윤·이조참판 등을 거쳐, 1489년 개성부유수(73세) 등을 제수 받고 1514년에 청백리(淸白吏)에 선발되었다. 청백리란 의정부가 관리들 중 가장 청렴결백하다고 판단해서 선발한 자들을 말한다. 

원래 이곳 산천단에는 이약동 목사가 세운 묘단(廟壇)과 함께 '한라산신선비(碑)'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의 비들은 모두 소멸되고 없다. 1989년에는 제주지방의 문화예술인들과 이 목사의 후손들인 벽진이씨문중회(碧珍李氏門中會)가 공동으로 '목사이약동선생한라산신단기적비(牧使李約東先生漢拏山神壇紀蹟碑)'와 묘단을 새로 건립,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곰솔 산천단에는 전국에서 가장 늙은 곰솔 나무들이 있다.
ⓒ 장태욱

지금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에 마을 주민들이 포제 양식으로 한라산신제를 봉행하는 것을 비롯하여 10월 3일 개천절에 민족혼대제봉행위원회의 산신제가, 한라문화제에 산신제가 각각 봉행된다.
 
산천단 입구에 서면 거대한 노송들이 솟아 있다. 천연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된 '산천단 곰솔'이다. 적어도 500~60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산천단 곰솔들이 가지 일부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나이로 인해 무거워진 가지들은 일부 땅으로 구부러져 있다.  
▲ 곰솔 늙은 곰솔이 세월을 견디지 못해 가지를 아래로 내리고 있다.
ⓒ 장태욱

이 곰솔은 소나무과 식물로서 흔히 바닷가에 자란다고 하여 '해송'이라 부르기도 하고 나무껍질이 검은색이라 하여 '흑송'이라고도 한다. 산천단 곰솔은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곰솔 중 가장 오래되고 큰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 곰솔들이 이렇게 장수하게 된 것은 산천단이 이 일대로 옮겨 오면서 주민들의 보살핌을 받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나무는 모두 여덟 그루다.

 

▲ 산천단 산책로 주위가 평온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 장태욱
산천단 주위에는 소림천(小林泉)이라는 샘물이 있고, 소림사(小林寺)라는 절이 있다. 500살 넘은 곰솔이 내뿜는 신선한 공기와 이 일대의 평온한 분위를  좋아해서 이곳을 찾아오는 시민들의 발길이 연중 이어진다. 이로 인해 가까운 곳에서 토종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과 전통 찻집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관광차 5·16도로를 지나는 분들은 꼭 들러 볼만한 곳이다.

 

▲ 전통찻집 산천단 주위에서는 토종 음식점과 전통 찻집을 찾을 수 있다.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쉬어가기에 적당한 곳이다.
ⓒ 장태욱

그리고 혹시 공무를 위해 제주를 찾은 관리들도 산천단을 꼭 방문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곳에서 이약동 목사가 알려주기 때문이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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