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오라동의 구석구석을 보여드립니다

   
 
▲ 오라동 사무소  ⓒ 장태욱
 

제주시 오라동은 시외버스터미널과 제주시종합경기장을 기점으로 그 인근 남쪽에 산재한 마을들이 모여 이루어진 행정동이다. 오라동은 과거에는 월라(月羅)라 기록되기도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라리로 제주면(濟州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제주시(濟州市)에 편입되었다.
 
1962년 동제(洞制) 실시에 따라 연동(蓮洞)을 합하여 오라동회가 되었다가 1979년 연동이 분할, 독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평마을 연미마을 정실마을 동성마을 등 오라동에 속한 대부분의 전통마을은 지금 오라 2동을 이루고 있다. 오라 1동과 3동은 제주종합경기장과 시외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들로 이루어졌다.  
  

   
 
연미마을 4.3당시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했던 마을이다.  ⓒ 장태욱  
 

오라리의 역사

오라동의 한 자연취락인 연미마을은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문(文)씨에 의해 설촌되어 호수 103여 호의 마을이었으나 빈번히 화재가 발생하므로 당시 풍수지리설에 따라 동네에 큰 연못을 팠다. 연미라는 마을 이름은 이 연못에서 연유한 것으로 물이 생수같이 깨끗하고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연미마을은 4·3사건 당시 '오라리방화사건'으로 인하여 완전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1948년 5월 1일 오전 12시 경 오라리가 청년 30여 명에 의해 기습되어, 열두 채의 민가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사건은 우익청년단체에 의해 자행되었는데  미군정과 경찰은 국방경비대의 진상보고를 묵살하고 유격대의 소행이라 조작했다고 한다.
 
정실마을은 조선조 선조(宣祖) 때에 김해(金海) 김(金)씨가 여기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당시에는 이곳의 지형으로 인해 '도래뫼'라고 불렀다. 또한 1910년께는 오늘의 제주시 오등동과 죽성 등 마을들을 한데 묶어 한북리(漢北里)라고 부른 적도 있었으나, 한천(漢川)을 중심으로 동서 간의 분쟁이 생겨 한천 서쪽 동네가 오늘의 정실 쪽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연미마을의 고씨들에 따르면 지금도 정실에 '고씨터'라고 불리우는 지명이 있으며 연미마을에 사는 고씨의 13대조가 정실마을에 살았다는 주장을 미뤄 이 마을의 설촌이 400여 년 전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알려주려는 듯, 정실 마을에는 수령 400여 년으로 보이는 고목 팽나무들도 있다.
  

   
 
민오름 사평마을에서 바라본 민오름  ⓒ 장태욱
 
  

오라동의 문화유적

연미마을 남측에는 시민들의 녹지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민오름이 있다. 민오름 남쪽에는 조설대(朝雪臺)가 있는데, 이곳은 1905년(광무 光武 9)에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에 한일합방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 마을에 살던 이응호(李膺鎬)가 중심이 되어 선비들의 모임인 '집의계(集義契)'를 결성하고 구국을 도모하던 장소이다.

12인의 집의계 회원들은 이곳에 모여 바위에 '朝雪'이라고 음각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당시 당시 그들이 현무암 위에 암각한 문자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조설대 집의계 회원들이 모여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며 바위에 조설이라 암각하였다.  ⓒ 장태욱
 

당시 집의계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응호는 최익현이 대원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왔을 때 최익현의 한라산 등반길을 안내했던 이기온의 아들이다. 그리고 이기온이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다 제주로 유배 왔던 이익의 후손이다. 선대의 선비정신을 간직해온 이기온과 새로 제주에 유배 왔던 최익현의 만남은 제주 유림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던 것 같다. 이기온과 최익현의 만남을 기리기 위해 이기온의 후손들은 문연사를 지어 정월중순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월정사 정실마을에 있다. 4.3당시 전소되었다가 이후에 재건되었다.  ⓒ 장태욱 
 

정실 마을에는 '월정사'라는 불교 사찰이 있다. 월정사는 1871년 토굴에서 창건되었다가 1938년에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이 절은 4·3사건 와중에 전소되었다가 이후 재건되었다. 이 사찰에 있는 니조여래좌상과 목조보살입상은 제주도 문화재 4호로 지정되었다.

과거와 미래의 공존, 포털 다음(DAUM)과 최익현의 리플

정실마을에 들어선 제주교도소 옆으로 난 길을 따라 2km쯤 남쪽으로 들어가면 방선문계곡이 나온다. 방선문(訪仙門)은 바위그늘로 길게 암석 터널이 만들어져 있어서 마치 선계를 향해 들어가는 문과 같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계곡을 별칭으로 영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봄이 되면 철쭉이 이곳에 고운 수를 놓는다. 과거 사람들은 이곳에 철쭉이 핀 모습이 아름답다하여 영구춘화(瀛丘春花)라 하여 영주십경 중 하나로 자랑하였다.
  

   
 
방선문 입구 방선문 계곡에 들어서면 조선시대 관리들과 유배인들이 큰 바위느늘에 세겨놓은 마애명들을 볼수 있다.  ⓒ 장태욱
 

가는 곳마다 리플을 다는 것이 우리 민족의 타고난 기질인 모양이다. 방선문 계곡에는 과거 이곳을 찾았던 지방관들과 유배인들이 바위 위에 글귀를 새겨 놓은 마애명(磨崖銘)들을 이곳저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과거 조선의 선비들의 필체도 이곳에서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최익현이 유배 중에 남겼던 마애명이 눈길을 끈다.
  

   
 
목장 난지농업연구소에서 관리하는 목장  ⓒ 장태욱
 

한천을 경계로 정실마을의 서쪽 마을을 오등동이라 부른다. 이 오등동에는 난지농업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고, 연구소의 앞에는 국유지에 이 연구소에서 관리하는 목장이 펼쳐져 있다. 그 목장에는 제주마와 제주전통 흑우들이 자란다.

난지농업연구소 근처에서 다음(DAUM) 사옥을 볼 수 있다. 다음 본사가 제주로 이전하는 것을 전제로 회사 일부인 다음 지엠시(DAUM GMC : Global Media Center)가 우선 이주해 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300여명의 직원 이외에도 제주시내 다른 곳에 사무실을 두 있는 '다음서비스' 부서에  200여명의 직원이 근무 중이라고 한다.

미디어사업팀의 김진아 팀장은 "사원들이 제주에서 근무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좋은 점들이 많다고 했다. 우선 제주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회사에서 생활지원비가 주어지고, 서울에서 보다 훨씬 좋은 시설과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는 것이 혜택"이라고 했다.
  

   
 
다음(DAUM) 사옥 다음 일부가 제주로 이전했다.  ⓒ 장태욱  
 

21세기는 지방화시대라고 했다. 지방이 국제경쟁력을 얻으려면 쾌적한 환경과 정보통신 인프라가 보장되어야하고 고부가가치 산업이 유치되어야한다고 했다. 다음의 이전이 제주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하는데 적잖이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제주종합경기장 제주도 유일의 종합경기장이다. 도민들의 여가활동 중심지이다.  ⓒ 장태욱
 

오라1동은 제주시 종합경기장 남쪽 인근에 있는 본동마을 남쇄마을과 종합경기장에 인접한 공설마을로 이루어졌다. 오라2동이 오래전 설촌된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데 반해 오라1동은 도시개발 과정에서 형성된 마을들로 구성된다. 잘 갖춰진 스포츠 부대시설과 도 전역으로 이어진 원활한 교통으로 인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 시외버스터미널로 인해 오라동이 제주시의 교통 중심지가 된다.  ⓒ 장태욱
 

오라3동은 속칭 '중댕이굴'이라 하며 월구(月龜)라 기록하기도 한다. 구제주와 신제주 중간에 있는 도심 속의 조용한 전원마을로 이웃 간에 따스한 정이 오가는 마을이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