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시작과 끝을 기억하는 마을, 제주 오라동 '연미마을'

오라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사평마을에서 남쪽으로 난 좁은 찻길을 따라가면 연미마을에 당도할 수 있다. 연미마을은 제주시내 도심권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겉으로 보기엔 한적한 시골 농촌과 같은 이미지를 던져주는 곳이다. 한없이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 마을이 제주 4·3 과정에서 학살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는 '오라리방화사건'의 현장이었다.

오라리방화사건의 배경  
  

   
 
연미마을 4.3당시 '오라리방화사건'의 현장이었다.  ⓒ 장태욱
 

1948년 3월 1일에 관덕정에서 수만 명의 인파가 모여 3·1절 기념식을 열었다. 그런데 경찰은 기념식 인파에 총을 쏴 6명이 사망했다. '3·1절 발포사건'이다. 이후 주민들은 총파업으로 저항했고, 경찰은 주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구금을 단행했다. 

제주지역 주민들은 민군정 경찰 서북청년단의 지속적인 탄압과 억압에 정면으로 맞서야만 할 상황에 처했다. 3월 6일과 14일에 경찰의 고문으로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주민들은 "앉아서 죽느니 일어나서 싸우자"는 합의를 만들어낸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한라산과 제주지역 89개의 오름에서 일제히 봉화가 오르면서, 1500여 명의 ‘인민자위대’가 도내 20개 경찰지서 가운데 10개를 공격하는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무장대의 기습공격과 민중의 항쟁에 당혹한 미군정은 4월 27일 경비대의 진압작전 투입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9연대장 김익렬은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양측은 4월 28일에 "72시간 이내에 전투를 완전히 종결하고, 문장해제는 점진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는 협상안에 합의했다. 
  

   
 
민오름 오라리방화사건이 일어나자 민오름에서 유격대들이 급하게 마을로 내려왔다. 유격대들이 내려왔을 때 방화의 주범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 장태욱
 

학살의 전주곡, 오라리방화사건

그리고 제주도에는 잠시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는 듯했다. 하지만 3일간의 평화를 끝으로 5월 1일에 오라리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밤 12시 괴청년 30여 명이 오라리 연미마을에 들어와 12채의 집에 불을 놓으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불이 난 시간에 마을 남쪽에 있는 민오름에서 유격대원 20명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마을로 급히 내려왔지만, 괴청년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유격대원들이 돌아간 뒤, 다시 경찰들이 총을 난사하며 마을로 들어왔다. 그리고 9연대 군인이 도착하자 경찰은 사라져버렸다.

당시 경찰은 방화의 주범을 유격대라 하였지만, 현장을 답사한 김익렬 연대장과 정보참모 이윤락은 이들을 무장대로 위장한 경찰이라고 하였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의 메이데이>란 영화를 만들어 제주 민중의 잔인함을 부각시키고, 경찰의 잔인한 토벌을 정당화시켰다.

한편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나흘 앞둔 시점인 5월 6일에 미군정의 주재로 4·3항쟁의 원인과 대책에 관한 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는 딘 미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경비대 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맨스필드 제주도 군정장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도 도경국장 등이 참석했다.

국방경비대 측은 이 사건의 원인이 경찰의 강경한 탄압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고, 경찰 측은 이 사건의 원인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에서 국방경비대 측과 경찰 측간의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고, 김익렬은 조병옥과 육탄전을 벌였다.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김익렬은 결국 해임되고 말았다.(자료 : 고창훈의 ‘4·3 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
  

   
 
연미마을에 있는 초가 이 초가는 연미마을이 불타 없어진 이후인 50년대에 지어졌다.  ⓒ 장태욱 
 

결국 미군정과 유격대 사이의 중립적 입장에서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김익렬 연대장의 후임으로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진경이 임명되었다. 박진경은 일본군 출신답게 미군정의 총애를 받으며 무장대는 물론이고, 무고한 도민에 대해 잔인한 토벌을 자행했다.

야만의 증거, 사라진 마을들 

한편 당시 오라동 주민들이 당한 피해는 오라리방화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그 후 1949년 실시된 군경합동작전에 의해 정실마을, 연미마을 등이 불타서 없어졌다. 주민들은 야산으로 피신생활을 하거나 해변마을로 이주해야 했고, 이웃마을로 피신했던 이들은 그곳에서 도피자 가족이라고 희생되었다.

이후 전소되었던 마을이 복구되는 과정에서 연미마을에 딸린 작은 동네였던 '어우늘'과 '해산이'와 사평마을에 인접한 '고지레'는 복구되지 못했다. 이곳에 가면 당시 사람이 살았던 곳은 경작지로 변해있고, 돌담 가에 자라는 대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서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김 할머니 4.3이후 마을이 복구된 뒤, 이 초가에 입주하셨다.  ⓒ 장태욱 
 

연미마을에 들어서서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초가로 보이는 집에서 김여호(83) 할머니를 만났다. 4·3 당시 연미마을에서 불타 없어진 동네가 어디냐고 여쭙자, "연미마을이 모두 다 탔다"고 답하셨다. 김 할머니는 연미마을이 폐허가 된 후 복구될 당시 이 마을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지금 살고 계신 초가는 50년 된 집이라고 하셨다.
  

   
 
'해산이'로 들어가는 길 안내표시가 없어서 길 안내자가 없으면 찾기 어렵다.  ⓒ 장태욱 
 

4·3당시 연미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지금 대부분 이곳에 살고 있지 않다고 하셨다. 지금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마을에서 이사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해산이' 동네를 찾을 수 없어서 길을 여쭈었더니, 83세의 노인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설명해주셨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임에도 길을 쉽게 찾지 못할 만큼 우리는 역사에 무관심한 세상에 살고 있다. 폐허가 되어버린 처량한 '해산이'를 보면서, 우리 처지 또한 처량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해산이 군경대토벌 작전에 의해 사라진 마을이다. 돌담가에 자라는 대나무들이 과거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다.  ⓒ 장태욱 
 

지금도 우리는 제주도민을 다 죽이려 했던 자들이 남겨놓은 망령이 배회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