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신례1리, 예절바르고 양순한 농촌마을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1리로 가기 위해 5·16도로(11번 국도)로 들어섰다. 한라산의 속살에 해당하는 5·16도로 주변은 쌀쌀해진 날씨로 얼마 전 갈아입은 붉은 옷마저도 벗을 태세다. 5·16도로를 타고 가다 수악계곡을 지나면 신례1리 마을이 가까이 왔음을 짐작하게 된다. 수악계곡을 지나 서성로(1119번 도로)에 들어서니 만추의 절기를 실감케 하듯 억새와 띠로 뒤덮인 들판은 온통 황금빛이다.
  

   
 
▲ 생물종다양성연구소 마을주민들이 목장부지를 헌납하고, 산자부와 제주도가 기금을 공동출연하여 설립하였다.  ⓒ 장태욱
 

활력을 찾기 위한 노력들: 제주 한우,  생물종다양성연구소, 휴애리 공원

신례1리 입구임을 알리는 생물종다양성연구소가 눈에 들어온다. 이 연구소는 산자부와 제주도가 기금을 공동 출연하여 금년 9월에 준공하였다. 제주도의 생물자원을 발굴하고 그 보존방안을 연구함은 물론이고, 생명공학을 이용하여 바이오신소재를 개발·연구할 포부로 세워진 연구소다. 신례1리 주민들도 이 연구소가 지역에 들어설 수 있도록 2만평의 마을 목장을 자진 헌납했다.
  

   
 
▲ 한우들 방문객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 장태욱
 

생물종다양성연구소 앞에 있는 목장에서 한우들이 낯선 방문객을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쳐다봤다. 최근 지역 축산 농가들에게 기대주로 떠오른 제주 전통 흑한우들도 눈에 띄었다.

제주에 흑한우가 도입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미 고려시대에 임금의 탄신일이나 명절 등에 제주 흑한우가 진상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조선 숙종 때 기록된 탐라순력도에는 제주의 별방(지금의 하도), 정의(지금의 성읍), 대정에 700여 두의 흑한우가 사육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지역 축산 농가들이 위기를 돌파할 길을 전통 흑한우에서 찾았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 휴애리 공원 제주의 전통 생활모습을 담은 공원이다. 신례1리 출신 양지선씨가 10년의 노력 끝에 거둔 결실이다.  ⓒ 장태욱  
 

생물종다양성 연구소 앞에서 차를 우회전하여 마을로 향하는 중간에 ‘휴애리(休愛里)’ 관광농원이 있다. 이 관광농원은 신례1리 출신인 양지선씨가 자연과 농업이 연계된 관광상품을 만들어 고향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뜻으로 올 5월에 개장하였다.

양지선 대표는 이 농원을 만들기 위해 10년을 준비했다고 했다. 농원의 내부에는 과거 제주의 전통 산간마을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테마마을을 비롯하여, 사진갤러리와 다람쥐 공원 등 가족관광으로 적합한 요소들이 두루 갖춰져 있다.

신례리 마을이 만들어지기까지

구전에 따르면 현재 신례1리에 촌락이 형성된 시점은 지금부터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태조 때 성·문·조 삼성이 설촌하여 호촌(狐村)이라 명했다고 하는데, 예촌망(禮村望)의 형세가 여우와 비슷하여 여우 호(狐)자를 따서 촌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 21대 희종 때에는 제주도 내에 14현을 두어 다스렸는데, 호촌(지금의 신례1리)은 귀일 고내 곽지 귀덕 명월 신촌 함덕 김녕 토산 홍로 예래 차귀 고산 등과 더불어 현청이 소재하는 마을이었다.

그 후 조선 태종 16년(1415)에 정의군이 설치되면서 정의군 서중면 예촌(禮村)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예촌이란 마을 이름에는 '예절바르고 양순한 사람들의 모여지는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다가 1915년 제주도제가 실시되면서 예촌이란 이름은 신례리(新禮里)로 개칭되었다.  
  

   
 
▲ 신례1리 사무소 마을 사무소에서 새마을 지도자 김창업씨와 대화를 나눴다.  ⓒ 장태욱 
 

설상가상, 농민의 푸념은 더해 가는데

신례1리 양석철 리장과 면담을 시도했지만 귤 수확으로 인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다며, 대신 새마을 지도자인 김창업씨와의 면담을 주선해주었다.

김창업씨는 대도시 공판장에서 귤 값이 한없이 하락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10월 중순에 비해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져서, “이런 상황이 계속 되면 농사를 짓기 어렵지 않겠냐”며 반문했다. ‘올 감귤시세 산뜻한 출발’이란 제목으로 낸 지역 언론 기사를 본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이다. 내일 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농부의 삶이다.
  

   
 
▲ 귤 농원 신례1리는 어디를 가도 귤이 보인다.  ⓒ 장태욱
 

“신례1리는 농외소득이라고는 거의 없는 순수 농촌입니다. 둘러보십시오. 과수원 말고 다른 뭐가 있나. 예로부터 농사밖에 모르고 살아온 마을이라 농산물 가격이 하락하면 살길이 막막합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서두르는 정부에 대해서도 섭섭한 심정을 내비쳤다.

“개방을 하려면 농민들에게 준비기간을 줘야할 것 아닙니까? 갑자기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농민들에게 변화에 대응하라면 어떻게 합니까? 농업은 다른 산업과 달리 작목을 변경해서 소득을 올리는데 10년 이상이 걸리는데 그 빠른 변화에 적응할 수 있겠습니까?” 
  

   
 
▲ 농민들 선과장에서 작업이 끝난 농민들이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아 농민들의 소리를 들었다.  ⓒ 장태욱
 

그와 함께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우선 마을회관 가까운 곳에 있는 귤 선과장(귤을 선별하고 포장하는 작업장)으로 갔다. 어떤 농부는 작업을 준비 중이고, 포장 작업을 마친 농부들 몇은 모여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술자리에 있던 농부 한 분이 ‘소주 한 잔 하라’고 술잔을 권했는데, 운전을 해야 할 입장이라 술은 거절했다. 대신 옆에 앉아 대화에 끼어들자 그들의 하소연이 흘러 나왔다.

“우리 농민들 다 죽게 되수다. 며칠째 계속 (귤)가격이 폭락햄수다. 방송이 문제라 마씸. 여기 봐봅서. 어디 가스처리 햄신가(하는지)? 몇 사람이 잘못하는 걸 다 잘못햄잰 허민 안되주 마씸(모두가 잘못한다고 하면 안되지요).”

한국방송공사(KBS)에서 이영돈 피디가 진행하는 ‘소비자고발’이란 프로에서 최근에 ‘노란 귤의 비밀’이란 부제로 방송한 내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소비자고발’에서는 귤 농가에서 푸른 귤을 강제로 노랗게 착색시키기 위해 에틸렌(에틸렌은 과일 숙성을 촉진하는 호르몬이다)을 처리하여 귤의 신선도를 떨어뜨린다는 내용을 보도했다고 한다.
  

   
 
▲ 포장기계 귤을 포장할 때 사람이 선별하고 기계가 포장한다. 포장하는 귤을 보니 모두 신선해 보였다.  ⓒ 장태욱  
 

이 농민들은 ‘소비자고발’ 프로에서 방송된 내용이 소수의 잘못을 과장 보도했기 때문에 도시에서 소비자들이 귤을 기피하게 되었다며, 그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 양금석 초가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초가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제주도에서 민속자료로 지정하였다.  ⓒ 장태욱  
 

기억에 남는 이름

신례1리 마을에는 최근까지도 사람이 살았던 초가가 한 채 있는데,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서 제주도 지정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초가의 주인의 이름을 따서 ‘양금석 초가’라고 부른다. 양금석씨는 1991년에 부활한 제4대 제주도의회에 진출해서 의정활동을 펼쳤던 이 지역의 명망가다. 양금석씨는 당시 의정활동 기간에도 이 초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 안내 표지 양용찬 선배의 묘지로 가는 길 안내문이다. 양용찬 선배는 1991년 제주도개발특별법에 반대하며 분신했다.  ⓒ 장태욱
 

이 마을에는 양금석씨 못지않게 잊지 못할 이름이 있는데, 바로 양용찬 선배다. 양용찬 선배는 1991년 다시 노태우 정부와 민자당이 독소조항이 많은 ‘제주도개발특별법’ 입법을 밀어붙이려하자, 자신의 몸을 태워 저항하며 전국적인 ‘특별법 반대투쟁’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마을 청년회는 그의 고향 사랑하는 뜻을 기려 매년 11월 초에 추모제를 지낸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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