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광풍의 뒤안길, 그가 그립다

'예'를 숭상하는 마을에 충격을 안긴 사건
 
신례1리는 농부들이 귤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조용한 마을이다. 사람들이 예절바르고 양순하다하여 조선시대에는 예촌(禮村)이라 불렸기에 지금도 주민들은 신례1리를 예촌이라 부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예촌은 주민들 중 다수가 제주 양(梁)씨인 양씨 집성촌이다.  
  

   
 
▲ 한겨레 만평 1991년 11월 9일 자 한겨레 만평이다. 그의 분신이 제주도를 강제로 유린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막을 것이란 내용이다.  ⓒ 장태욱
 

이런 유순한 마을에 충격을 가져다주는 사건이 있었다. 91년 발생했던 ‘양용찬 분신 사건’이다. 1966년 9월 17일 신례1리에서 태어나 신례1리에서 성장해온 양용찬 선배는 1991년 11월 7일 오후 7시 40분 경 당시 그가 회원으로 활동하던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 사무실 3층 옥상계단에서 “제주도개발특별법 반대, 민자당 타도”를 외치며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 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제주도민의 절대다수가 반대하던 제주도개발특별법을 거대여당인 민자당이 밀어붙여 입법하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의 외침이었다. 지역의 문제로 인식되었던 특별법이 전국적인 이슈로 부각되었고, 제주지역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외지에 있던 제주향우회원들마저도 투사로 만들어버린 사건이었다. 양용찬 선배는 자신의 몸뿐 아니라 수많은 제주인들의 가슴에 불을 당기고 산화해갔다.
  

   
 
▲ 유서 양용찬 선배가 남긴 유서  ⓒ 장태욱
 

타일공으로 일하다 제주도개발에 반대해 분신

양용찬 선배는 당시 군대를 제대한 후 누님 집에서 생활하면서 매형과 함께 타일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9년에 가입한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모임에서 서귀포지역문제 대책위원회에 참가하여,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따른 농산물 수입개방문제와 제주도개발특별법을 필두로 한 지역개발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군입대 전 다니던 제주대학교 사학과는 복학을 포기하고 자진 중퇴한 상태였다.

그가 남긴 시 한 편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던 부모님을 향한 느낌과 시선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왜 농축산물이 수입 개방되고
왜 조합장 선거에 몇 억의 돈이 필요하고
왜 부지런하다는 말을 들으며
평생을 살아온 당신에게 지금은
빚더미와 빼앗기다 남은 조그마한
밭뙤기 뿐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개구리마냥 불룩 튀어나온 배를 채우기 위해
당신의 굽은 허리를 일구어낸
자갈밭을 빼앗아가는 저들
당신의 호미로
아들의 괭이로 쫓아내야만 합니다.

-양용찬의 유작시 ‘어머님 전상서’ 중 일부  
  

   
 
▲ 집 그가 살던 집이다.  ⓒ 장태욱
 

그는 열심히 농사를 짓고도 농가부채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농부들의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고, 거기에 개발 광풍이 불면 농민들이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가 분신하던 1991년 11월 7일에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 사무실에는 회원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는 타일공일을 마치고 저녁 7시 30분 경 작업복 차림으로 가방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사무실 안을 들여다 본 후 목욕하러 간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7시 50분경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는 한 통의 전화제보가 경찰에 걸려왔다. 제보자가 신고할 당시에 한 어린이가 그의 불타는 시체를 보고 신문지에 불이 붙은 것으로 오인하고 그 불을 끄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숨을 거둔 후에 유서를 통해 사랑했던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어머니 아버지

그동안 효도한 번 못해드리고 걱정만 끼쳐드리다 가장 큰 불효를 하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항상 함께 있고픈 고향 친구들.

자네들은 언제나 나를 이해해 주었고 따스하게 맞아 주었었다. 과마웠다. 술 너무 마시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란이 누나.

신세만 지다 이번 결혼식 때에는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 떠오르는 모든 이들에게 인사하고 싶지만 끝이 없을 것 같아 이만 줄입니다.

-양용찬의 유서 중 일부  
  

   
 
▲ 표지판 묘지로 가는 길  ⓒ 장태욱  
 

개발광풍의 시절, 그가 그립다

양용찬 선배의 친동생인 양용주는 내 고교 동창생이자 친구다. 용주와 함께 양용찬 선배의 무덤과 그의 집을 찾았다.

신례1리 마을 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청년의 횟불 고 양용찬 열사 추모비’라고 적힌 비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비석의 뒤에는 ‘열사여 불화살이여’라는 제목의 추모시가 적혀있는데, 끝부분에 “제주도 개발 특별법을 향해 영원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민자당 정권의 심장을 향해 비수처럼 날카롭게 틀어박힌 불화살이여”라고 맺고 있다.
  

   
 
▲ 무덤 양용찬 선배의 무덤  ⓒ 장태욱 
 

그의 집 안채에는 그의 아버지가 살고 계시고 바깥채에는 동생 용주네 가족이 생활하고 있다. 그가 살았던 집 입구에는 김규중의 시 ‘만든 당신은 남도에서 자라났습니다’가 적힌 시비가 양용찬추모사업회의 이름으로 세워져 있다.  
  

   
 
▲ 양용찬열사추모사업회 제주주민자치연대 사무실 내에 있다.  ⓒ 장태욱  
 

양용찬추모사업회 김상근 대표(갈릴리 교회 목사)는 최근 양용찬 추모사업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씨는 경부운하를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참여정부는 주민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부 대선 후보는 전남 완도와 제주도 간 터널을 뚫겠다고 합니다. 정치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자연을 파괴하고 농촌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생겨났어요. 16년전 일이지만 양용찬 열사를 추모하는 일은 현재 더 의의가 있습니다. 무분별한 개발 정책에 맞설 의지와 양심을 회복해야합니다.”
  

   
 
▲ 김상근 대표 양용찬 열사 추모사업회 대표인 김상근 목사를 만났다.  ⓒ 장태욱
 

우리는 지금 경제적 이익만 얻을 수 있다면 농촌 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이나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탐욕이 극에 달한 세상에 살고 있다. 2007년 11월에 양용찬 선배가 내 가슴 속에 되살아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양용찬 추모주간(11월 5~11일)동안 그를 추모하기 위한 모임이 있습니다.

묘소 참배 및 추모제 : 7일 오전 10시
추모행사 : 9일 저녁 시청 어울림마당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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