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아래서

   
▲ 해녀들은 잠수 도구도 없이 맨 몸으로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한다. ⓒ 해녀박물관

해녀들은 제주도와 일본에만 존재하는 여성 잠수부를 말한다. 제주에 언제부터 해녀가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에 전복 속에서 진주를 캤다는 기록이 나온 이래로 해녀는 각종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제주 해녀의 역사는 제주에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고난과 수탈의 역사가 만든 해녀 공동체

제주 해녀들은 맨 몸에 물소중이, 물적삼 등을 걸치고 수중에서 해산물을 채취했다. 전복이나 조개류를 채취할 때는 빗창을 사용하고, 해조류를 채취할 때는 호미류를 사용한다. 이들은 태왁이라 부르는 물체의 부력에 의지하여 장시간 바다에서 채취활동에 종사하고, 채취한 해산물은 태왁에 매단 망사리라는 그물주머니에 담아 보관한다. 특별한 잠수기구 없이 물 속에서 장시간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직업의 희귀성으로 인해, 해녀는 세계적으로도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맨몸으로 거친 바다에서 일해야 하는 만큼 해녀 공동체는 강한 결속력을 과시한다. 해녀들은 공동으로 자신들의 밭인 바다를 관리하고 감독한다. 해녀가 입어할 수 있는 구역이 경계선으로 정해져 있고, 전복인 경우 8월 산란기 때는 채취를 금지하는 등 작업시기가 해산물의 종류에 따라 정해진다.

'물질(수중 작업)'을 마치고 나온 해녀들을 ‘불턱’이라 부르는 곳에서 장작불을 지펴 추위를 달랬다. 불턱은 단순히 불을 쬐는 곳이 아니라, 바다활동에 대한 기술을 전달하는 학습공간이자 공동의 의견을 모아내는 회의공간이었다. 과거의 불턱은 대부분 사라지고 ‘해녀 탈의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해녀들은 둥근 '태왁'의 부력에 의지해 장시간 바다에서 노동에 종사할 수 있었다. 태왁에 매달린 그물은 채취한 해산물을 담아두는 용도로 쓰이는데, '망사리'라 부른다, ⓒ 장태욱
   
과거 해녀들은 잠수일 과정에서 겪는 고단함을 견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채취한 해산물을 관에 바치는 짐도 짊어지고 살았다. 관에 공납하다 남은 해산물로 생활을 영위했는데 탐관오리들은 그마저도 착취하기 일쑤였다.

이건은 광해군 복위를 모의했던 부친 인성군의 죄에 연좌되어 인조 6년(1628) 제주에 유배되었는데, 유배 기간 중 제주의 풍물을 자세히 기록해 <제주풍토기>라는 책을 남겼다. 그는 이 책에서 당시 제주해녀들이 겪는 고통의 실상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였다.

"해산물에는 단지 전복, 오징어, 미역, 옥돔 등 수 종이 있고, 이외에도 이름 모를 여러 종의 물고기가 있을 뿐 다른 어물은 없다. 그 중에서도 천한 것은 미역을 캐는 여자로서 잠녀(潛女)라 한다. (중략) 그들은 전복을 잡아서 관가에 바치고 나머지는 팔아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생활의 간고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더구나 부정한 관리가 있어 탐오지심(貪汚之心)이 생기면 명목을 교묘히 만들어 빼앗기를 수없이 함으로 일년 내내 애써 일을 해도 그 요구를 들어주기에 부족하다." - 이건의 <제주풍토기> 중 일부
  

   
▲ 요왕맞이 굿, 항상 위험을 안고 사는 해녀들은 샤머니즘에 의지해 불안을 달래며 살았다. ⓒ 해녀박물관

일제에 의한 잔혹한 수탈

자본주의가 도입되자 물질은 본격적인 경제 활동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해녀의 경제적 중요성도 크게 부각되었다. 이렇게 되자 매해 정초가 되면 일본인 무역상 밑에서 일하는 한국인 객주들은 제주도로 몰려와서 전도금을 주면서 해녀들을 모집했다. 이 시기에는 제주를 떠나 한반도 본토는 물론이거니와 동북아시아 일대로 무리지어 물질을 떠나는 해녀들도 생겼다.

객주에게 전도금을 받은 해녀들은 객주들에게 얽매이게 되었다. 일본 무역상과 유착한 객주들은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사들일 때, 저울의 눈금을 속이거나 매입가를 헐값으로 정하는 방식으로 해녀들을 착취했다. 바다 사정이 좋지 않은 경우는 객주에게서 빌린 전도금을 갚지 못해 해녀들이 볼모로 잡히는 경우도 있었다.

비참한 수모를 겪던 해녀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1920년 4월 16일에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을 결성했다. 울산, 장승포 등지로 나가는 해녀가 4천여 명에 이르던 당시, 해녀들이 조합에 내걸었던 요구사항은 ‘벌이 나가는 해녀에게 자금을 유통해 줄 것, 그들이 벌이하는 해안에서 어물을 잡는 권리를 보장할 것, 잡은 어물은 공동 판매에 붙일 것’ 등 이었다.

해녀어업조합 결성 초기에는 나름의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제주도사가 조합장을 겸임하고 있었기에 관제조합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점점 어용화되었다. 해녀들이 바깥물질 나간 곳에서 채취한 해산물은 모두 조선해조회사의 손을 거쳐서 판매되었는데, 매상고의 5할은 해조회사의 수수료로 뜯기고 1.8할은 해녀조합 수수료로 공제되었다. 거기에 조합비와 선주에 대한 임금과 소개인에 대한 사례비를 공제하고 나면 해녀들의 실제수입액은 매상고의 2할에 지나지 않았다.

1930년에 와서 상인과 결탁한 관제조합의 횡포는 더욱 극렬해졌고, 해녀들의 불만은 점점 거세어졌다. 그런 가운데 성산포에서 해산물 판매를 둘러싼 부정사건이 일어났다.

성산포산 우뭇가사리가 경매입찰을 통해 근당 20전에 낙찰되었는데 간사한 조합장 서기는 이를 외면하고 상인과 결탁하여 근당 18전으로 내려버렸다. 당시 시세의 절반도 되지 않는 가격이었다. 일본 관리들은 지정가격을 지키라고 주장하는 해녀들을 검거하고 구류처분했다. 격분한 주민들을 성산면과 구좌면 일대에 격문을 돌리며 일본 관리들의 악랄함을 퍼트렸다.

일본 관리들은 격문의 작성자를 추적하여 하도리 청년 오문규, 부승림에게 벌금형을 내렸고, 성산면과 구좌면 일대 청년 20여명을 구속하였다.  
   

   
▲ 제주해녀들의 항일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 ⓒ 장태욱

호미와 빗창으로 왜경에 맞섰던 제주해녀항일투쟁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에 대한 분노가 하도리에서 다시 한 번 거세게 폭발했다. 당시 주민들은 관제조합에 맞서서 자생적으로 농민회와 해녀회를 조직하였고, 해녀들은 혁우동맹에서 운영하는 강습소에서 공부하며 민족의식을 키우고 있었다. 1931년이 되자 조합은 일인 상인에게 시세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해산물을 매입할 수 있도록 특혜를 주었다. 격분한 해녀들이 거칠게 저항하자 일인 상인은 잠적했고, 조합은 협박과 공갈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하지만 해녀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1932년 1월 7일에 세화장날을 이용하여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손에 호미와 빗창을 들고 집단으로 일어섰다. 여기에 이웃마을 해녀들이 가담했고 장터의 군중들이 합세하여 수천의 시위대가 만들어졌다.

세화주재소 경관들이 시위대를 만류했지만 시위대는 당시 면사무소가 있었던 평대리까지 행진했다. 강공칠 면장을 대면한 시위대는 ‘지정판매 반대와 공정한 입찰, 조합비 조정, 조합재정 공개, 손해배상 등’을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이에 당황한 면장은 1월 12일에 도사와의 면담을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하여 시위대를 돌려보냈다.

그로부터 5일 후인 1월 12일은 세화리 오일장이면서 도사가 순시차 면사무소를 방문하는 날이기도 했다. 세화리에는 도사와 담판을 짓기 위해 모인 해녀들과 이 담판을 보려고 모인 인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꾸지 도사가 경관의 호위를 받으며 현지에 나타났을 때 그곳에는 빗창과 호미로 무장한 700여명의 해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놀란 도사는 도망치려 하였고, 해녀들은 도사를 태운 차가 빠져나가는 길을 막았다. 경관들이 해녀들을 위협하자 해녀들은 호미와 빗창을 들고 맞섰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도사 일행은 부득이 해녀 대표들과의 면담에 응했는데, 이때 대표로 뽑힌 해녀들은 하도리 출신 김옥련, 부춘화 외에 부덕량, 고순효(본명 고차동), 김계석 등 5명이었다.
  

   
▲ 물질할 때 해산물을 채취하는 기구들로 해녀항일투쟁 과정에서는 일경과 맞서는 무기로 사용했다. ⓒ 장태욱

담판과정에서 도사는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고 닷새 사이에 요구사항을 완전히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주재소 안에서 도사와 해녀대표가 담판을 벌이는 사이 밖에서는 총으로 무장한 경관과 몰려든 해녀들 사이에 몸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재소 마당에는 짓밟힌 순사의 모자와 칼, 양복저고리들이 널려 있었다.

닷새 안에 해녀들의 요구사항을 이행하겠다던 도사의 약속을 믿고 시위대는 자진 해산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도사로부터 아무런 약속이행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당국은 이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로 ‘민중운동협의회’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했다.

이 와중에 고등계형사 50여 명이 1월 23일 세화리 문도배, 문도후와 종달리 한향택, 항원택 및 우도의 신재홍 등 수십 명을 검속하여 호송하려 하자 500여 명의 해녀들이 몰려들어 자동차를 습격하면서 검속자들을 탈환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본서에서는 각지의 주재소원을 비상소집했고, 이들로 무장경관대를 편성하여 추가 검속에 들어갔다.

이때 30여 명의 해녀들이 구속되었는데 도사와 면담했던 해녀 대표 5명은 자신들이 주모자임을 자임하여 동료 해녀들을 석방시키는 등 제주 해녀 항일운동의 책임자 역할을 다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월 27일로 해녀들의 저항은 끝이 났다.  
  

   
▲ 해녀에 대한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 장태욱

뼈아픈 역사는 무슨 교훈을 남겼나?

당시 제주 해녀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고순효(본명 고차동), 김계석 등 5명의 해녀 대표는 혁우동맹 산하 하도강습소 1기 졸업생들로 야학을 통해 민족에 고취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시 청년 민족운동가들과 연계하여 제주해녀항일운동을 단순한 생존권 투쟁의 차원에서 항일운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하였다. 이 운동은 전국최대규모의 여성 항일운동이자 제주도 내 항일운동 중 가장 치열했던 사건으로 꼽힌다.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와 상도리가 인접한 곳에 이르면, 당시 제주 해녀들의 항일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과 해녀물관을 볼 수 있다. 그밖에도 근처에 야외조형물, 야외체험장, 야외공연장, 해녀광장 등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 시설물들을 모두 포괄해서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이라 한다.
 
일제에서 해방된 지 60년이 지났다. 국가의 선전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외국인이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룩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달라는 민중의 외침에 권력 집단은 과거 일제가 그랬던 것처럼 무자비한 폭력으로 일관하고 있다. 날마다 사회에 악취를 풍기는 부패한 사회기득권층에게 보이는 온화함이나 관대함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아래는 빗창과 호미를 들고 왜경과 맞섰던 해녀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오늘 이 땅에서 반복되는 비참한 압제와 수탈의 역사를 보면서 해녀 투사들은 뭐라 말하고 싶을까?

덧붙이는 글 | 해녀박물관 064-782-9898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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