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산, 용머리 해안, 형제섬, 바굼지오름...신이 빚어낸 절경이 자리하는 곳

제주 서부관광도로 길가에 활짝 핀 억새풀의 울렁거림을 보면서 사계리(沙溪里) 마을로 향했다. 오름과 드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하는 서부관광도로는 동광 진입로를 지나면서 눈앞에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를 정면에 두고 바라보면서 길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면 산방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사계리 마을이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 산방산 중턱에서 바라본 사계리 마을 ⓒ 장태욱

사계리 마을은 총 800여가구에 2500여명이 살고 있는데, 주민 대부분이 마늘과 양배추 등 밭작물 농업에 종사하지만, 어업이나 관광업의 비중도 작지 않은 농어촌 마을이다.

이곳에 언제 마을이 들어섰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산방산 주변에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해서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충렬왕 26년(1300년)에 산방현(山房縣)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산방현이 지금의 사계리 마을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문헌상의 증거는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 문헌에서 이 마을과 연관된 기록을 추적하다 보면 금물로리(今物路理)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 지명은 현 사계리 마을에 있는 속칭 ‘검은 질(길)’의 이두식 표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이 금물로리는 정조 8년(1784년)에 아래쪽은 사계로, 위쪽은 신당으로 분리되었다가 헌종 6년(1840년)에 와서 사계리와 덕수리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 사계리의 상징은 산방산이다. ⓒ 장태욱

사계리에서 가장 인상 깊은 심볼은 역시 산방산이다. 산방산은  조면암이 돌출되어 형성된 화산으로, 산 전체가 한 덩어리로 형성되어 있다. 그 모양이 종(鐘)과 같아서 종상화산(鐘狀火山)으로 분류되는데, 산의 기울기가 큰 것은 이 산이 형성되던 시기에 분출되었던 마그마의 점성이 그만큼 컸다는 증거다.

산방산 화산체 남쪽 중심부인 해발 약 150m 지점에는 천장 높이 약 5m, 동굴의 수평 깊이는 약 20m에 달하는 동굴이 있다. 그 동굴 안에는 일 년 내내 천장 암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데, 이 물방울이 산방산 수호여신인 산방덕이 흘리는 슬픈 사랑의 눈물이라는 전설이 전해 온다.
  

▲ 용머리는 산방산에서 해안으로 뻗어있다. 그 건너 보이는 섬이 형제섬이다. 이들이 있어 해안선이 더욱 아름답다. ⓒ 장태욱

산방산에서 바로 남쪽 해안을 바라보면 바다로 돌출된 능선이 보이는데, 그 모양이 마치 용의 머리와 닮았다고 해서 용머리라 한다. 산방산을 배후로 푸른 바다와 만나는 용머리의 형상이 기이해서 이곳에도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온다.

천하를 얻은 진시황이 이웃나라에 제왕이 나타나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주도에 왕후지지(王侯之地)가 있어 제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진시황은 풍수에 능한 고종달을 보내 그 맥을 끊어버리라고 했다.

진시황의 명을 받은 고종달이 제주에서 찾은 왕후지지가 바로 산방산에 있었고, 그 맥을 끊기에 요긴한 곳이 용머리였다. 고종달이 용의 머리 부분과 잔등이 부분을 끊었는데, 바위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산방산은 신음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제주도에는 왕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용머리는 실제로도 꼬리부분, 잔등이 부분의 바위가 가로로 끊겨져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용머리 앞바다 약 1.5km 지점에 큰 바위산 두 개가 섬을 이루고 있는데, 형제가 나란히 서 있는 것 같다고 하여 형제섬이라 부른다. 과거 두 용이 이 섬 앞에서 크게 싸워서 마을이 화를 입었다는 전설도 전해오는데, 형제섬이 있음으로 인해 이 일대 해안절경이 더 빛을 발한다.  
  

▲ 하멜 일행의 표류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배 ⓒ 장태욱

용머리 옆에는 1653년 7월, 대만을 출항하여 일본 나가사끼로 가던 하멜 일행이 이 일대에 좌초되었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그들이 타고 다녔던 상선 스페르베르호를 복원한 배가 전시되어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을 이끌었던 명장 히딩크 감독과 그의 조국 네덜란드에 대한 관심의 표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산방산의 서쪽에는 그 모양이 마치 바구니를 엎어놓은 것 같다하여 ‘바굼지오름’이라 부르는 기생화산이 있다. 단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오름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파놓은 진지동굴들이 발견되었다.  
  

▲ 산방산 정상에서 바라본 바굼지오름 ⓒ 장태욱

단산을 배후로 근처에 과거 이 일대 유생들이 공부했던 대정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태종 8년(1408년) 이 향교가 처음 설립될 당시에는 대정성 안에 있었는데,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기다가 효종4년(165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대정향교의 경내에는 대성전, 명륜당, 서재 등이 있는데, 대성전은 공자, 안자, 맹자, 증자, 자사 등의 유학자 5성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고, 명륜당은 유생들이 공부했던 곳이다. 지금도 봄‧가을에 대정의 유생들이 이곳에 모여 석전제를 지내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5성에 대해 분향을 드린다.
  

▲ 바굼지오름 인근에 있다. ⓒ 장태욱

산방산 앞에서 대정읍 송악산까지 아름다운 해안도로가 연결되어 있는데, 이 해안도로를 따라 송악산으로 가는 길 우측에는 드넓은 농토와 그 위에 자라는 푸른 농작물들이, 좌측에는 시원스럽게 펼쳐진 푸른 바다와 그 위에 떠있는 섬들이 운전자의 마음을 여유롭게 한다.

사계리가 고향이며 이곳에서 생활해온 김정오(52)씨를 만났다. 김정오씨는 어선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최근 어선을 처분하고, 지금은 마늘과 양배추 등 밭작물을 소규모로 재배하고 있다고 했다.

어선을 처분하게 된 이유를 물었더니, “29톤 크기의 어선을 운용하는데, 인건비와 유류비를 포함해서 하루 130만원에서 150만 원 정도 드는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고 했다. “사업이란 게 자금 동원이 되어야 하는데, 대출조건이 까다로워서 영세한 사업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라는 푸념도 더했다.

지금은 어선을 가지고 있는 선주들이 대체로 부채가 3억 정도 되는데, 여건이 악화되어 대부분 어업을 포기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선주가 가지고 있는 어선을 폐기하면 폐선 보상비가 주어지는데, 폐선하려는 선주들끼리 경쟁 입찰을 하다 보니, 폐선보상비가 한없이 낮아지고 있다고도 했다.
   

▲ 김정오씨 사계리 토박이다. 어선 선주였는데 최근에 경영악화로 어업을 포기했다. ⓒ 장태욱
  

어업을 포기하고 농업에만 종사하는데, 마늘은 농협과 1kg당 1300원 정도로 계약재배를 하기 때문에 큰돈은 못 벌어도 수입은 안정적이라고 했다. 평당 6~7kg 정도 수확되면 평당 9천 원 정도의 농가 수입이 보장되는데, 평당 경영비가 2천 원 정도라 순수익이 7천 원은 된다고 했다.

양배추나 감자는 시세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것이지 소득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 작년에는 양배추 가격이 폭락해서 수확도 못하고 산지에서 폐기처분했는데, 올해는 다행스럽게도 평당 6천원에 거래되고 있다고 했다.

김정오씨는 지금 농촌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고충과  당국의 농정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우선 대부분 농어가는 자금이 없어서 허덕이는데, 농협의 대출 심사는 갈수록 까다로워 누구도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엄두를 낼 수 없는 입장이라고 했다.

또 정부에서는 농촌에 40조원의 자금을 투입했다고 하지만, 그 돈들이 마을회관이나 체육시설을 짓는 데 사용되어 농가소득 증대에는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대부분의 농어촌 지원 사업이 선심성 전시행정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김정오씨가 최근에 무엇보다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지역민들 사이에 유대감이 없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쫒기지 않을 때는 이웃을 배려할 줄도 알았는데, 농촌이 벼랑 끝에 내몰리니까 순간적 이익을 좇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우리 농촌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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