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산방산 할아버지는 이야기 보따리

산방산은 점성이 큰 마그마가 냉각되어 형성된 종상화산(鐘狀火山)으로 산 전체가 한 덩어리로 되어 있다. 산방산은 높이가 약 395m에 타원형의 장축이 약 1250m, 단축이 약 750m이며, 둘레가 약 6.1㎞에 이른다.   
  

▲ 산방산은 제주도 서남쪽 해안의 이정표다. ⓒ 장태욱

산방산 형성에 관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한 포수가 한라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잘못해서 한라산 산신의 궁둥이를 활로 쏘았다. 화가 난 산신이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아 던진 것이 한라산 정상의 봉우리고, 이게 날아와 만들어진 것이 산방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봉우리가 뽑힌 자리에 생긴 공간이 백록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백록담의 내부 크기와 모양이 산방산과 비슷해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 산방산의 남쪽 150m 높이에 있는 천연동굴이다. ⓒ 장태욱

산방산 화산체 남쪽 중심부인 해발 약 150m 지점에는 천장 높이 약 5m, 수평 깊이는 약 20m에 달하는 천연 동굴이 있다. 산방굴과 이곳에 떨어지는 물로 인해 산방산에는 산방덕의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산방산 근처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이 부부가 지극정성으로 자식을 염원하는 기도를 올리던 중 산방산 중턱에서 여자 아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하늘이 자신들에게 보내준 아기라 생각한 부부는 아기에게 산방덕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친딸처럼 정성스럽게 키웠다. 그런데 산방덕은 산방산 산신이 인간으로 환생한 아기였다.

산방덕이 커가면서 이웃에 사는 고승이라는 총각과 사랑에 빠지고 둘이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일에는 마가 끼는 법. 산방덕의 미모에 반한 사또가 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사또는 날마다 산방덕에게 선물공세를 펼치며 유혹의 눈길을 보내지만, 산방덕은 매번 이를 거절했다. 사또는 산방덕을 차지할 목적으로 고승에게 누명을 씌워 잡아가 죽여 버린 후, 산방덕에게는 고승이 귀양도중 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사또는 홀로된 산방덕을 차지하기 위해 회유와 압력을 가했다. 남편을 잃은 슬픔과 더불어 사또의 유혹과 압력에 지친 산방덕은 인간의 몸으로 환생한 것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 산방덕이 좌정을 하고 주문을 외자 그의 몸은 바위가 되어버렸고, 그 바위에서는 쉬지 않고 눈물이 흘렀다.  
   

▲ 탐라순력도에 나온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이 일대 지명들이 그대로 나온다. ⓒ 장태욱
 

고려시대 혜일법사가 창건하여 불상을 봉안한 이래로 이 동굴은 절로 이용되어 왔다. 부를 때도 산방굴사라 부른다.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재임시절(1702~1703)에 관내를 순력하면서 제주의 풍물들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 탐라순력도인데, 탐라순력도에는 산방산도 그려져 있다. 산방산 굴에서 행한 배작 장면을 화폭에 담아 제목을 ‘산방배작(山房盃酌)’이라 했는데, 산방산은 물론이고 형제섬, 용머리, 군산 등이 보이며 도로와 사계리 포구(흑로포) 등이 그려져 있다. 옛 지방관들도 이곳 절경을 탐해서 술잔을 곁들여 풍류를 즐기고 갔음을 알수 있다.
  

▲ 소나무 2백 전 쯤 심어졌다고 한다. 수문장처럼 굴을 지키고 있다. 사계리 장부 유명록이 심었다는 설이 있다. ⓒ 장태욱

이 산방굴 입구에는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마치 문지기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유명록(柳命祿)이라는 사계리 장부가 심었다는 설이 전해온다. 유명록은 이 소나무만큼이나 기개가 등등한 인물이었다.

현종 11년(1845)의 일이었다. 영국 선박이 우도에 나타나 섬 위에 깃발을 세우고 섬 근처에서 수심을 측량하고, 방위를 표시하였다. 권직 목사는 크게 놀라 변란에 대비하였다. 이 때 대정현 사계리 사람 유명록이 목사를 찾아가 “소인에게 화약을 주시면 배에 싣고 몰래 다가가 화약에 불을 놓아 저들과 함께 죽겠습니다”라고 했다.

권직 모사가 그의 충의에 감탄하였고, 그에게 화약을 준비하여 거사를 도모하려 하던 중 영국 배는 돛을 올리고 떠나 버렸다. 기정진(奇正鎭)은 을사록에서 “우리나라 3백 주에 대정현의 기풍이 있고, 천만 사람에게 유명록의 담력이 있었다면, 비록 수백의 양이(洋夷)가 온들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여 그의 용기를 높이 칭송했다.

이 소나무를 유명록이 심었다는 주장은 바위덩어리에 뿌리를 박고 산방굴사를 든든히 지키고 서 있는 소나무에게서 유명록의 기개와 흡사한 면이 있다고 생각해서 나온 것이리라.

풍수지리학적으로 산방산은 금장지지(禁葬之地 : 무덤을 쓸 수 없는 곳)로 알려져 있다. 산방산의 산세가 너무 좋아서, 이곳에 산을 쓰면 겨드랑이에 날개를 단 장수가 태어나지만, 더불어 심한 가뭄이 들어서 사람들이 굶어 죽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과거 민중들은 늘 가렴주구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들을 늘 자신들을 지켜줄 영웅이 나타나길 기대하면서도, 영웅출현은 수많은 민중의 피를 요구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곳을 금장지지라고 했던 이면에는 영웅출현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혼재된 민중의 심리상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덕수리 마을에서 산방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등반로의 입구다. ⓒ 장태욱

산방산은 안덕면 사계리와 덕수리에 위치하고 있다. 산방산에는 두 개의 등반로가 있는데, 산의 기울기가 급하기 때문에 어느쪽이든 오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사계리에서 오르는 산방산 남쪽 등반로는 돌 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중턱의 산방굴사까지만 등반이 가능하다. 산방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덕수리 마을에 있는 진입로를 통해 북쪽 등반로를 따라 올라야한다.

북쪽 등반로를 따라 정상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등반로 중간에서 과거 일본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파 놓은 진지동굴이 보인다. 높이가 1m 남짓하고 깊이가 50m 정도 된다.  
  

▲ 북쪽 등반로를 따라가면 보인다. 깊이가 50m에 이른다. ⓒ 장태욱

이 바위산에도 그 단단한 틈에 무수히 많은 생명체가 터를 잡고 삶을 지탱하고 있다. 산방산의 중턱 암벽에는 지네발란, 풍란, 석공 등의 희귀한 암벽식물들이 자생하고 있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어 보호하고 있다. 산의 정상에는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생달나무 등이 천연 난대림을 이루고 있다. 이 천연 난대림에 새가 지저귀고 구름이 걸려 놀닐다 간다.

▲ 산방산 정상에 서면 발아래 해안이 보인다. ⓒ 장태욱

산방산이 가져다주는 최고의 아름다움은 가파른 산을 기어오른 이후에 정상에서 바라본 해안가의 전망이다. 정상에 올라 남쪽으로 난 좁을 길을 따라가면 그곳에 '고냉이돌'이라는 너럭바위가 나온다. 그 바위 위에는 한 평 남짓한 평평한 자리가 있는데, 이 자리가 천연 전망대 역할을 한다. 그 곳에 서면 마치 바다 위 높은 곳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 형제섬과 그 일대에서 고기를 잡는 어선들이 보인다. ⓒ 강민식

산방산 정상에서 바람을 맞고 서 있으면 용머리와 형제섬이 발아래 보이고, 멀리 있던 가파도와 마라도가 성큼 다가온다. 송악산을 향하는 길가 해안 마을들이 구름사이로 옹기종기 다정하게 보이고, 대정일대의 너른 평원이 파랗게 눈에 들어올 때 마치 누구나 신선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진다.
  

▲ 멀리 송악산과 가파도가 가까이 다가왔다. ⓒ 강민식

산방산은 이곳을 방문한 이들에게 오랜 시간 간직해온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씩 풀어 놓는다. 그 이야기 속에는 과거 민초들의 삶과 정서가 그대로 녹아있어 더욱 재미있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잠시나마 신선이 되게 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더욱 건강하고 풍요롭게 한다. 제주도 서남쪽 해안가에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산방산이 민초들의 삶을 든든히 후원하고 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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