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 (1) 여전한 ‘간첩’ 낙인에 고통받는 사람들
정치적 위기 탈피 ‘민간인’ 희생양 삼은 독재 정권

힘으로 권력을 움켜쥔 군사독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반공 분위기를 조성, 여론의 관심을 돌렸다. 무고한 피해자들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한 채 유죄판결을 받았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만 20건, 피해자만 53명에 달한다. [제주의소리]는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제주출신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바탕으로 억울한 그들의 사연을 매주 한 차례 소개한다. / 편집자 글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간첩조작사건 3건에 대한 내용이 벽면에 소개돼 있었다. 하지만 상설전시관 리모델링 사업을 거치며 이 전시패널은 통째로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박근혜가 대통령이었고, 전시패널에 소개된 3건의 간첩조작사건은 그의 아버지인 박정희 때 벌어진 일이었다. 이에 KBS제주방송총국이 사라진 패널을 중심으로 간첩조작사건에 대해 집중 보도했고, 사회적 반향에 따라 제주도의회는 간첩조작사건 관련 전국 최초의 조례를 제정했다. 사진=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갈무리. ⓒ제주의소리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간첩조작사건 3건에 대한 내용이 벽면에 소개돼 있었다. 하지만 상설전시관 리모델링 사업을 거치며 이 전시패널은 통째로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박근혜가 대통령이었고, 전시패널에 소개된 3건의 간첩조작사건은 그의 아버지인 박정희 때 벌어진 일이었다. 이에 KBS제주방송총국이 사라진 패널을 중심으로 간첩조작사건에 대해 집중 보도했고, 사회적 반향에 따라 제주도의회는 간첩조작사건 관련 전국 최초의 조례를 제정했다. 사진=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갈무리. ⓒ제주의소리

“제주4.3사건으로 붉은색이 덧씌워진 제주도민들은 사건 이후에도 냉전과 정치공작의 희생양이 되었다.”(제주4.3평화기념관 리모델링 과정에서 사라진 간첩조작사건 전시패널 중)

제주도는 4.3 당시 ‘레드 아일랜드’로 규정된 이후 부당한 국가권력에 의해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뤄지며 죄 없는 사람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붉은색이 덧씌워진 사람들은 한 떨기 동백꽃이 무심히 툭 바닥으로 떨어지듯 그렇게 사라졌다. 부모 형제, 자식, 친구, 이웃 등 내 바로 옆 사람이 피의 광풍에 휩쓸려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되거나 차디찬 주검으로 발견된 그때, 제주4.3이다. 

이런 깊은 생채기에 억울함도 제대로 토해내지 못했던 제주도에 군사독재정권은 또다시 왜곡된 이데올로기에서 빚어진 이념의 탈과 누명까지 씌워 간첩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넣었다. 

인구 1% 제주에서 나온 간첩만 대한민국 전체 3분의 1 수준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되는 수치지만 과거부터 붉은색을 덧씌워왔기에 의심 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너는 간첩이다” 무차별 매질에 ‘거짓 자백’만 살길

불법적인 힘으로 권력을 움켜쥔 군사독재정권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데올로기를 이용했다. 아주 작은 실밥 같은 명분이 발견되면 달려들어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했다. 여기서 실밥은 대부분 ‘제주와 일본’이었다. 

제주도는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어 4.3당시 피바람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해 목숨을 부지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일본행을 택한 도민들이 많았다. 1980년대까지도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밀항이 잦았다. 

최근 제주특별자치도와 (사)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가 발간한 ‘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심층 인터뷰가 이뤄진 12명 가운데 10명이 일본과 관계됐다. 

당시 일본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있었는데, 4.3 당시 국가가 국민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 중 일부는 조총련에 가입하기도 했다. 이념을 떠나 은행과 학교를 운영했기 때문에 삶의 일부였다는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진술도 있었다. 

재일동포 사회가 북한계 ‘조총련’과 남한계 ‘민단’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함께 제사를 지내는 등 큰 충돌이나 갈등이 없었다는 진술도 있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본으로 밀항했거나 여행을 간 도민들은 자신이 만난 사람이 조총련 소속인지, 민단 소속인지도 모른 채 자연스레 만났다. 독재정권은 바로 이점을 노렸다. 

대공업무 담당 기관들은 조총련을 만났다는 단순한 사실을 가지고 ‘간첩’이라는 주홍글씨를 씌워 이들을 사용했다. 붙잡아온 뒤 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자백하라”며 심한 고문을 가했고,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과 피해자는 모두 20건, 피해자는 53명이다. 사진=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갈무리. ⓒ제주의소리
‘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과 피해자는 모두 20건, 피해자는 53명이다. 사진=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갈무리. ⓒ제주의소리
‘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과 피해자는 모두 20건, 피해자는 53명이다. ⓒ제주의소리
‘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과 피해자는 모두 20건, 피해자는 53명이다. 사진=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갈무리. ⓒ제주의소리

 물고문에 전기고문, 가족 협박까지…후유증에 ‘간첩’ 꼬리표는 평생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 중 일부는 팔과 다리를 묶인 채 얼굴에 수건을 덮어쓰고 물고문을 당했다고 진술한다. 고춧가루를 탄 물을 붓거나 호수를 콧구멍에 꽂아놓고 물을 붓기도 했단다.

손과 발에 전기를 통하게 하는 전기고문은 물론, 고문 장치를 활용해 물을 마실 수밖에 없도록 한 고문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심지어 사흘, 나흘간 잠을 재우지 않고 고문을 가해 대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간첩으로 만들어져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던 한 피해자는 “왜 허위자백을 했느냐”는 물음에 “온갖 고문을 다 버텼는데, 수사관이 ‘네 마누라와 딸도 끌고 와 너와 똑같은 고문을 하겠다’는 협박을 이기지 못했다”고 말한다.

고문을 받은 피해자들은 육체적 피해는 물론 평생을 안고 갈 정신적 후유증도 겪어야만 했다. ‘간첩’이라는 주홍글씨로 가정은 파탄났고, 연좌제가 적용돼 고통은 대를 이어 전해졌다.

어차피 언론 자유를 말살한 마당에 누군가 간첩으로 만들어 널리 알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언론을 통제했고, 정권이 내는 자료만을 가지고 기사를 작성토록 했다. 보도지침을 벗어난 취재는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피해자들은 지금이라도 억울함이 밝혀지고 사회에 널리 알려지길 원하고 있다. 아직도 ‘간첩’이라는 낙인을 지우지 못한 까닭이다. 

이에 제주특별자치도와 (사)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는 ‘제주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등의 인권증진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따라 실태조사에 나섰고 기존 조사에 더해 새로운 피해자들을 발굴했다. 

김종민 제주4.3사건중앙위원회 위원을 필두로 강남규 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 이사장, 황석규 제주다문화교육복지연구원장, 한상희 서귀포여자중학교 교감, 고승남 제주환경운동연합 감사가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를 만들었다. 

조사팀은 약 7개월의 짧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무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건 피해자를 중심으로 조사했다. 더불어 지원 시기를 놓칠 위기에 처한 피해자를 돕기 위해 지원도 병행했다. 

재심을 청구해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는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진실규명 결정’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때 출범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신청’ 마감일이 2022년 12월 9일이었고, 이에 조사팀은 지원을 병행하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해 조사팀은 피해자와 유가족이 국가기록원에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판결문을 입수하도록 돕는 한편, 진실규명 개시 결정을 받을 수 있도록 피해 사실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즉, 보고서는 이미 알려진 사건보다 알려지지 않은 사건에 초점을 둬 제작됐다.

물론 보고서에 담기지 않은 밝혀지지 않은 사건은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보고서 발간을 끝으로 조사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더 발굴하기 위해 조사가 계속돼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제주의소리]는 아직 주홍글씨를 지우지 못한 피해자들이 진실규명을 위한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여러 차례에 걸쳐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내용을 소개할 예정이다. 아직도 마음속 고문실에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는 그들을 위한 관심이 절실하다. 

‘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제주의소리
‘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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