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 (7) 강광보 간첩조작 사건 연루, 피해자 강병선 씨

힘으로 권력을 움켜쥔 군사독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반공 분위기를 조성, 여론의 관심을 돌렸다. 무고한 피해자들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한 채 유죄판결을 받았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만 20건, 피해자만 53명에 달한다. [제주의소리]는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제주출신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바탕으로 억울한 그들의 사연을 매주 한 차례 소개한다. / 편집자 글

배추밭에서 작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다리던 검은 승용차에 무작정 태워져 끌려갔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곳은 다름 아닌 사라봉 사거리 근처 ‘한라기업사’였다.

다녀오면 ‘반병신’ 된다는 소문이 자자하던 한라기업사에 왜 끌려온 지도 모른 채 옷이 발가벗겨져 온몸을 두들겨 맞았다. 야구방망이로 사정없이 발바닥을 맞은 탓에 제대로 걷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유를 몰랐다. ‘북한에 갔다 왔느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면 무차별적으로 때릴 뿐이었다. 고문은 폭행으로 끝나지 않았다. 성기에 전기를 흘려보내거나 과거 천주교도를 박해할 때 사용했던 형벌인 ‘도모지’를 연상케 하는 고문도 서슴없이 당했다.

고문관들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막대를 끼워 달아맨 뒤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그 위에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얼굴에 올려진 수건이 젖어 코와 입에 달라붙을 때면 숨을 제대로 쉬기도 힘들었다. 

갑자기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받은 이 사연의 주인공은 제주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강병선(76) 씨다. 강 씨는 1986년 강광보 간첩조작 사건에 연루돼 모진 고문을 받고 지금까지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강병선 씨는 1986년 강광보 간첩조작사건에 연루돼 고문 취조를 받았다. 강광보 씨와 10촌 사이인 피해자는 고문에 못 이겨 북한에 다녀왔다는 허위자백을 했다. 일주일 만에 풀려났으나 지금까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김종민.&nbsp;ⓒ제주의소리<br>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강병선 씨는 1986년 강광보 간첩조작사건에 연루돼 고문 취조를 받았다. 강광보 씨와 10촌 사이인 피해자는 고문에 못 이겨 북한에 다녀왔다는 허위자백을 했다. 일주일 만에 풀려났으나 지금까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김종민. ⓒ제주의소리

# 흐릿한 기억, 10촌 강광보 간첩조작사건 연루

강씨는 지금도 잡혀가는 꿈을 꾸며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꿈속에선 늘 ‘아! 또 죽게 생겼네!’라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가 고문을 받게 된 건 10촌 형님인 ‘강광보’ 간첩조작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었다. 강광보 씨는 일거리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붙잡혀 강제 송환된 이후 1979년 공안당국에 끌려갔다. 

공안당국은 일본에 사는 큰아버지가 조총련 소속이니 간첩 지시를 받은 것 아니냐는 등 고문을 가했다가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풀어줬다. 그러나 1986년 그를 다시 끌고 간 뒤 가족을 협박하고 고문하는 등 악랄한 행위 끝에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강광보 씨는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으며, 지난 2017년 재심을 청구해 31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이후 자택을 개조해 전국 처음으로 조작간첩을 비롯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기억 공간 ‘수상한 집’을 만들었다.

강병선 씨는 이 사건에 연루돼 보안사령부 제주지부인 한라기업사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것이다. 연결고리는 일거리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송환당한 사실이 있다는 이유였다. 10촌 관계인 강광보 씨와는 초등학교 시절 문중 벌초 때 얼굴 본 적이 전부였을 뿐이었다.

# 고문받다 정신 차려보면 물 '흠뻑' 송두리째 바뀐 삶

그러나 공안당국은 강씨를 상대로 고문하며 북한에 다녀온 것 아니냐고 추궁했고, 일주일간의 끔찍한 고문을 당한 강씨는 허위자백을 하고 쓰라는 대로 썼다. 그렇게 그는 간첩으로 둔갑했다. 

강씨는 “쓰라는 대로 썼다. 뭐라고 썼는지도 잘 생각이 안 난다. 내가 진정으로 쓴 거라면 지금도 기억할 텐데 거짓으로 쓴 거니까 생각도 안 난다”고 했다. 

이어 “북한의 국기가 얼마나 크더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남한 국기 크기를 생각해 대충 몇 센티 정도 된다고 답했다”고 허위자백하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강씨는 고문을 받다가 기절해 정신을 차려보면 고문관들이 몸에 물을 끼얹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무차별 폭행에 전기까지 흘려보내는 악랄한 고문으로 계속해서 정신을 잃었고, 그럴 때마다 보안사 직원들이 강제로 깨워 다시 고문을 가했다.

강씨는 허위로 자백한 끝에 일주일 만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생의 흐름 속에서 짧다고 할 수도 있는 일주일이지만, 강씨가 겪었던 그 끔찍한 일주일이라는 흐름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 잊히지 않는 고통, 후유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그는 한라기업사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뒤 불안함에 시달려 평상시 자주 마시지 않던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옷이 벗겨진 채 매질 당하고 성기에 전기고문을 받던 끔찍한 기억이 자꾸만 생각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고문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지만, 안으로는 마음의 상처가 썩어 문드러져 있었던 것이었다. 불안함을 억누르기 위해 술을 계속해서 마시다 보니 만취 상태로 시비가 붙는 사건사고는 계속됐고, 결국 강씨는 아내와 이혼하게 됐다. 

조작된 간첩을 만들기 위해 꼬투리를 잡고 일주일간 고문을 가한 결과, 한 사람의 삶이 무참히 망가진 것이다. 강씨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잡혀가는 꿈에 시달린다고 했다.

그는 “육체적 후유증은 없는데, 정신적으로 불안해서 술을 마신다. 이혼하고 가족도 뿔뿔이 흩어지고, 아이들은 명절에나 본다. 내 처지를 한탄하는 생각만 난다”고 하소연했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강씨는 제주시의 한 2평 남짓 여인숙에서 살고 있다. 빈곤한 차상위계층으로 정부 지원금과 노령연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신세다. 

만약, 간첩을 만들어내기 위한 군사 독재정권의 악행이 없었다면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억울하게 고초를 겪은 피해자들을 위한 명예회복과 지원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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