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귀리마을 ③] 제주 의귀초등학교 학살을 통해 본 4·3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는 1925년까지 남원면 소재지였을 정도로, 이 일대 지역 문화의 중심지였다. 마을에는 일본 유학생이 많았고 의식 수준도 진보적이었다. 1948년 4·3이 발생했을 당시에도 이 마을에는 큰 폐해가 없었다. 그해 5월에 치러진 5·10선거 당시 주민들이 선거를 보이콧하기 위해 마을 산으로 피신했지만 의귀리 마을에는 큰 희생이 없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 황폐화된 마을 1948년 11월 토벌대가 들이닥쳐 방화와 학살을 자행했다.(4.3평화기념관에서 촬영) ⓒ장태욱
이 마을에 광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48년 11월 7일에 토벌대들이 마을에 들어오면서부터다. 갑자기 들어온 토벌대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산이나 들로 피신했다. 어떤 이는 움막을 지었고 어떤 이는 숲 속의 동굴이나 냇가의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토벌대에 발각되면 즉각 처형당했다.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몸을 숨겨야 했다.

48년 어느날 의귀리에 불어닥친 토벌대의 살육전

   
▲ 움집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을 피해 주민들이 산으로 피신해서 움집을 지었다.(4.3평화기념관에서 촬영) ⓒ장태욱
1948년 12월 의귀국민학교에 군인이 주둔하면서 희생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당시 주둔했던 2연대 1대대 2중대는 의귀리뿐만 아니라 이 일대 수망리, 한남리, 가시리 마을을 초토화했고 붙잡힌 주민들은 현장에서 총살하거나 의귀국민학교 창고에 수용했다. 또 산으로 몸을 숨긴 사람들에게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소문을 퍼트려 스스로 돌아온 자들도 이 학교 창고에 수용했다.

   
▲ 의귀리 냇가 토벌대의 만행을 피해 주민들은 냇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발각되면 즉각 총살되었다. ⓒ장태욱
이에 유격대는 토벌대가 주둔하고 있는 의귀국민학교에 진격해서 토벌대를 섬멸할 계획을 세운다. 당시 상황을 작가 현길언은 작품 속의 주인공인 인민유격대 남동부 지대 부대장 오규민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그렸다.

   
▲ 의귀초등학교 토벌대와 유격대간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이 있었던 현장이다. 민간인에 대한 토벌대의 보복테러도 자행되었다. ⓒ장태욱
"이제 그들(토벌대)은 비인도적인 술책을 도모하여 현대화된 병기로 우리 인민들을 개와 돼지처럼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우리들의 전략 거점인 중산각 부락을 초토화하고, 인민 유격대의 사기를 저하하는 온갖 감언이설을 유포함으로써 혁명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간악한 전술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그들의 꾐에 빠진 동지들과 인민들이 많이 하산하였습니다만, 결국은 그들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희생을 당해야 했습니다.

… 그들은 이 전략의 성패를 남원 지역에서 판가름하기 위해, 남원면 의귀국민학교에 1개 중대의 군 병력을 주둔시키고, 본격적인 인민초토화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작전으로 이틀 전에, 중산간 부락 인민들이 그들에게 체포되어 지금 그 학교에 수용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이번 작전을 통해서 그들을 구출하고 토벌대를 섬멸함으로써 미제국주의의 하수 군부들의 제주 작전을 무력화시켜야 하겠습니다." - 현길언의 <깊은 적막의 끝> 중에서

   
▲ 성담 토벌대가 주민들을 동원해 쌓은 성담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장태욱
유격대의 반격, 그러나

이렇게 해서 유격대원 135명이 1941년 1월 12일에 의귀국민학교로 침투하였다. 새벽에 학교 울타리에서 유격대와 토벌대간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토벌대가 하늘로 조명탄을 쏘아 올릴 때쯤, 유격대는 국민학교 지붕 위에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유격대가 공격해 올 것을 미리 알아차린 토벌대가 유격대의 공격에 대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 승넹이골 의귀리와 한남리 경계지역이다.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무장대원들이 집단 매장된 곳이다. ⓒ장태욱
날이 밝자 운동장에는 유격대원들의 시신 90여 여구가 뒹굴고 있었다. 이 시신들은 의귀리 1931번지 일대 속칭 속냉이골에 집단 매장되었다. 한편 2004년 5월에 '생명평화탁발순례단'(단장 도법스님)은 이곳에 조그마한 방사탑을 세우고, 제주4·3연구소와 현의합장유족회 등과 더불어 이곳을 벌초하여 표지판을 세웠다. 지금도 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된 표지판이 남아있다.

"모든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옛말에 '적의 무덤 앞을 지나더라도 먼저 큰절부터 올리고 가라'고 했다. 바로 이곳은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 사건의 와중에 국방경비대에 의해 희생된 영령들의 유골이 방치된 곳이다. …

우리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은 우익과 좌익의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 학살된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 형제 내 부모였다.

평화의 섬을 꿈꾸는 제주도, 바로 이 곳에서부터 대립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리 순례단은 생명평화의 통일시대를 간절히 염원하며, 모성의 산인 지리산과 한라산의 이름으로 방치된 묘역을 다듬고 천도제를 올리며 이 푯말을 세운다."

   
▲ 유골 현의합장묘 옛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나온 유골들 ⓒ탐라사진작가협의회의 '뼈와 굿'
   
▲ 유골 현의합장묘 옛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두개골들 ⓒ탐라사진작가협의회의 '뼈와 굿'
결국 유격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고 후퇴했고 4명의 전사자를 낸 토벌대는 곧바로 의귀국민학교 창고에 수용되어 있던 주민 80여명을 운동장으로 불러세웠다.

"이들은 모두 폭도들이다. 엊저녁 공비들은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기습작전을 폈던 것이다. 우리는 방금 전에 이 자들이 바로 저 죽은 폭도들을 모두 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것으로 이자들도 똑같은 폭도들임을 증명할 수 있다. 나는 이 자들을 즉결처분할 것을 명령한다." 현길언의 <깊은 적막의 끝> 중에서

대장의 명령이 끝나자 총성이 이어졌고, 주민들은 피를 흘리며 그자리에 쓰러졌다. 이 때 희생당한 주민들의 시신은 국민학교 동쪽 밭에 집단 매장되고 마을을 초토화시킨 군인들은 1월 20일에 의귀국민학교에서 철수했다.

총알박힌 유골들, 4·3 외면하는 이명박 대통령

1976년에 자신의 가족들이 이곳에 매장되었다고 확신하는 유족들을 중심으로 봉분을 쌓고 성묘를 했으며, 1983년에 '현의합장묘' 비석을 세웠다.

한편 현의합장묘는 2003년 9월에 유해를 발굴하고 추도식을 열어 이 유해들을 수망리에 새로운 묘역에 안장했다. 발굴된 유골들은 뼈들이 서로 얽혀있고 총알이 박혀있어서 당시의 참상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 위패 4.3사건 당시 희생된 주민들의 위패가 제주4.3평화공원에 봉안되어 있다. ⓒ장태욱
의귀리는 민간인을 사이에 두고 토벌대와 유격대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총격적이 벌어졌던 현장이었다. 그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무고한 주민들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었기에 비극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니 이 비극의 희생양들의 명예를 짓밟는 야만적 시도들이 다시금 이어지고 있다. 그런 시도들 자행하는 자들과 뜻을 같이하기 때문인지 4·3사건 60주년을 맞는 금년 기념식 현장에는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한다.

저 불쌍한 저 유골의 주인들에게 이념의 색깔을 덧씌워 정죄하려 드는 이들에게도 심장이 있는지 묻고 싶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제휴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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