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명월리, 쫓고 쫓기던 역사의 현장

▲ 1136번 도로, 봄이 무르익어 벚꽃과 개나리꽃이 활짝피었다. ⓒ 장태욱

제주 섬 전역에 봄이 무르익었다. 거리에 벚나무가 꽃을 가득 터트렸고, 들녘에는 노란 유채꽃이 바람에 넘실거린다. 춘풍(春風)의 유혹을 따라 발 닿는 곳으로 가니 명월(明月)이 기다리고 있다.

제주시내에서 한림읍 명월리로 가기 위해 1136번 도로로 40분 정도 차를 달렸다. 제주시내를 빠져나와 광령 마을로 들어서서 벚꽃 터널이 연출하는 절경을 마주 대하면 ‘옛 사람 풍류’를 체험하게 된다.  

▲ 마을 입구(하동) 길가에 활짝 핀 꽃이 춘풍명월을 실감하게 한다.  ⓒ 장태욱  

오래 전에는 명월 일대를 항상 물이 흐른다는 의미로 "수류촌"이라 불렀다. 서기 1300년(고려 충렬왕 26년)에 제주를 동도와 서도로 나누고 현 제주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14개의 현을 두고 다스렸다. 

그 중 하나가 명월현이었는데, 명월이란 이름은 산세가 좋아 청풍명월(春風明月)의 의미로 붙여졌다고 한다. 당시 명월현의 중심 마을이었던 명월은 현재의 상명리, 동명리, 금악리 지경을 모두 포함하는 큰 마을이었다. 

▲ 명월리 마을을 알리는 표석 ⓒ 장태욱 

서기 1608년에는 현촌제를 폐지하고 방리제가 설치되자 명월은 우면(지금의 한경면, 한림읍, 애월읍) 소재지가 되었다. 그 후 17세기 초에 금악이, 18세기 초에 독포(독개 : 현 옹포리)가 명월에서 분리되었다.

그 후 명월리는 웃명월, 동명월, 서명월 등으로 나누어 졌는데 웃명월은 상명리로, 서명월은 명월리로, 동명월은 동명리로 분리되었다. 과거 제주 서부의 행정 중심지였던 명월이 지금은 그 중 일부만이 남아있는 작은 농촌이다. 지금의 명월리는 상동, 중동, 상동 등 세 개의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다.

▲ 복원된 명월진성(하동), 과거 명월은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다.  ⓒ 장태욱

한림에서 명월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하동이 있는데 그 곳에 서면 큰 성과 성문이 보인다. 명월진성이 복원된 것으로, 명월이 군사적 중요한 곳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삼별초 군대가 탐라를 장악하기 위해 1270년(원종 11년)년 명월포구에 상륙하면서부터 명월은 제주방어의 요충지가 되었다. 그 후 원명 교체기에 원의 목호들이 조정의 말 진상 요구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을 때도, 최영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명월포로 상륙하여 난을 진압하였다.

한림1리 해안에는 목호 군과 최영 장군이 이끌던 관군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던 장소임을 알리는 안내표지가 설치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니 제주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졌다. 1510년(중종 5년)에 제주목사 장림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나무로 둘레 3200척, 높이 8척의 성을 쌓았다. 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 25년)에 제주목사 이경록이 돌로 다시 성을 쌓았다.

한편 명월성은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천주교도들이 민군을 공격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민중의 분노는 증폭되었고, 비폭력 평화운동을 띠던 초기의 투쟁이 무력항쟁으로 급변하게 되었다. 

▲ 찔레꽃 노래공원(중동), 가요 '찔레꽃'을 부른 가수 백난아가 이 마을 출신임을 자랑하기 위해 비석과 함께 세워진 노래공원이다. 내부에 백난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음향시설이 되어 있다. ⓒ 장태욱  

명월리 중동 마을에 이르면 지금은 폐교된 과거 명월초등학교 터가 있다. 이 학교 입구에는 ‘찔레꽃 노래비’와 ‘노래비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가요 ‘찔레꽃’을 부른 가수 백난아가 이 마을 출신임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노래비 공원이라 써진 방안에는 백난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음향시설이 갖춰져 있다.

가수 백난아는 본명이 오금숙으로 1925년에 명월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후 가수 백년설이 오금숙을 양녀로 삼아 그녀의 본명과 출신 고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찔레꽃’은 그녀가 1941년에 이 곡의 작사가(김영일), 작곡가(김교성)와 더불어 고향인 명월을 방문했을 때, 암울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불렀던 노래라고 한다. 가수 백난아는 1992년 12월에 세상을 타계했다.

▲ 명월대(중동), 과거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근처에 석교도 잘 보존되어 있다.  ⓒ 장태욱  

한편 이 노래비 앞에는 이 세 사람이 회포를 풀었다고 전해진 명월대(明月臺)가 있다. 명월대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풍류를 즐겼던 명소인데, 주변이 자생 팽나무 고목으로 덮여 있어서 춘풍명월(春風明月)이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명월대 앞에는 오래된 석교가 원형이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다.

‘고림동’이라고도 부르는 명월상동은 갯거리오름을 배경으로 한다. 상명, 금악과 접하고 있는 상동은 중동이나 하동에 비해 해안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4·3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컸던 곳이다. 지금도 상동에는 당시 토벌군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았던 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 성담(상동), 과거 토벌대가 이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성담이다.  ⓒ 장태욱 

그리고 상동과 금악의 경계지점에 있던 빌레못마을은 토벌대에 의해 파괴되어서 복원되지 못했다. 빌레못마을 옛 터에 가면 사라져버린 마을임을 알리는 표지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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