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격전지 , 제주 명월

제주시내에서 서쪽 방향으로 향하는 일주도로(1132번 도로)를 따라 40여분 차를 달려 한림항을 조금 지나면, 비양도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해안에 이르게 된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한림1리 바닷가에 속하지만, 조선시대 이전에는 이 곳을 명월포라 불렀다. 고려 삼별초의 난에서부터 이제수의 난에 이르기까지 격변기마다 관군과 저항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 명월포 탐라를 장악하기 위해 삼별초 군대는 명월포로 들어왔다. ⓒ 장태욱
강화도에서 몽고에 저항하던 고려조정이 1270년에 개경환도를 결정하자 삼별초는 이에 반대하여 난을 일으킨 후 진도에 도착하여 그 곳에 용장성을 쌓았다. 여몽 연합군은 용장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1270년 9월 영암부사 김순과 장군 고여림에게 군대를 주어 탐라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진도 용장성이 함락되면 삼별초가 탐라로 들어갈 것이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여몽연합군이 탐라를 선점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삼별초 군대도 별장 이문경을 동원하여 탐라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이문경은 1270년 11월에 삼별초 군대 일부를 이끌고 탐라에 들어왔는데, 당시 이문경 군대가 상륙했던 포구가 명월포다.

"탐라에 성을 쌓고 삼별초 군대의 침입에 대비하라"는 고려 조정의 명을 받고 주민들을 동원해 성을 쌓기에 바빴던 고여림 군대는 이문경 군대의 거친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섬을 내주게 되었다.

한편 여몽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의 용장성이 함락당하지 살아남은 삼별초 군대는 제주에 들어옴으로써 삼별초에 의한 3년간의 제주지배가 시작되었다.

▲ 비양도 명월포에서 바라본 비양도 ⓒ 장태욱
지금의 애월읍 고성에 있는 항파두리에 거점을 확보한 삼별초 군대는 인근의 해상을 장악하며 맹위를 떨쳤다. 고려 조정에서는 삼별초를 공격하여 탐라를 함락하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윽고 1273년 고려 장군 김방경이 여몽 연합군 1만 명을 이끌고 탐라를 공격하였다.

김방경은 배의 일부를 명월포로 상륙시키는 위장전술로 삼별초를 유인한 다음 주력부대를 함덕포에 상륙시키는 양동작전을 동원하였다. 여몽연합군이 명월포에 상륙하는 것으로 오인해서 그곳으로 출병한 김통정 장군은 성의 함락 소식을 듣고 되돌아 왔지만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삼별초 군대가 패배하자 원에 의한 100년간의 제주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후 원명교체기인 1374년(공민왕 23년)에 탐라에 원의 목호(말을 키우는 전문 목자)들이 난을 일으켰다. 원과 고려 조정에 탐라에 있던 몽고말을 진상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장군 최영에게 군사 2만 5천 명을 내주었다. 목호들을 토벌하기에 앞서 최영은 명월포 앞마다에 닻을 내리고 목호들에게 사자를 보내었다. 투항을 권유했으나 목호들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 최영장군의 전과를 알리는 표지 최영장군이 목호의 난을 진압할 당시 명월포가 격전지였음을 알리는 표지 ⓒ 장태욱
결국 명월포에 상륙한 최영의 군대와 목호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한림에서 애월읍 새별오름에 이르는 광활한 초원 위에서 '칼과 방패가 바다를 덮었고 간과 뇌가 땅을 가렸다'는 살벌한 전쟁이 한 달간 이어졌다.

목호의 난을 진압한 최영의 군대는 그해 9월 22일 다시 명월포를 출항하여 고려로 돌아갔다. 한림1리 해안에는 목호 군과 최영 장군이 이끌던 관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던 장소임을 알리는 안내표지가 설치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자 제주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졌다. 기록에 의하면 1316년(충숙왕 3년)부터 1556년(명종 11년)에 이르기 까지 외구가 침입한 횟수가 30여 차례에 이른다고 한다.

▲ 명월성 1510년 제주목사 장림이 외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목성을 쌓았다. ⓒ 장태욱 명월성
1510년(중종 5년)에 제주목사 장림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나무로 성을 쌓았다. 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 25년)에 제주목사 이경록이 돌로 다시 성을 쌓았는데, 그 규모가 둘레 3200척 높이 8척이었다고 한다. 성의 내부에는 신사 객사 사령방 무기고 별고(식량보관창고)등이 갖춰져 있었다.

그 후 1764년(영조 40년)에 어사 이수봉의 건의에 의해 성의 책임자를 만호로 격상시켰다. 복원된 명월진성 입구에는 역대 만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편 명월성은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천주교도들이 민군을 공격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봉세관(세금 거두는 자)과 천주교도들의 만행이 거세지자 유생들을 중심으로 자위단이 결성되었는데, 그 이름을 상무사(商務社)라 하였다. 비밀단체를 구성했다가 들통 났을 경우에 당할 봉변을 우려하여, 영리단체인 것처럼 꾸몄다. 사람을 쉽게 불러 모으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대정 상무사는 각종 민폐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회를 종종 개최하였다. 1901년 5월에 대정 좌수 오대현의 이름으로 삼읍에 급주를 뛰었다. 제주성에서 동남쪽 10리 떨어진 황사평 벌판에서 5월 17일에 봉세관들과 천주교도들의 폐단을 시정해 줄 것을 진정하는 민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었다.

▲ 명월성 이재수의 난 당시 천주교도들이 이곳에 집결한 민초들을 습격하였다. 그를 계기로 성난 민초들은 저항의 방식을 무장투쟁으로 바꿨다. ⓒ 장태욱
5월 10일부터 민회에 참석하기 위해 고을에서마다 사람이 모여들어 수천의 군중을 이루었는데, 당시 그 모습이 ‘흡사 마른 내가 터지는 형국’이었다고 한다. 5월 12일에 이르자 황사평 민회에 참석하기 여러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중간 행선지인 명월성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5월 13일이 되자 천주교인 6백여 명이 프랑스 신부 두명을 교자에 태우고 명월진으로 향했다. 이들은 프랑스 신부 두 명이 민당(민중)의 장두를 만나 화해하러 간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리고 마을에 든 교인들은 야산 밑에 진을 쳤다.

프랑스 신부들은 김창수 군수를 통해 민당에 첩보를 보냈다. '교당(교인들)과 민당이 열명씩 대표를 보내 담판을 벌이자'는 내용이었는데, 민당은 이에 응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런데 새벽이 되자 담판을 벌이자고 제안했던 천주교도들이 명월성에 머물고 있던 민당을 무력으로 공격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작가 현기영의 묘사다.

"그러고서 한식경이 지났을까, 과연 새벽하늘을 찢어발기는 요란한 총성이 수십 발 터졌다. 총소리를 신호로 교인들은 일제히 숲 밖으로 튀어나와 성을 향해 벌떼같이 내달았다. 두 신부는 연방 쌍혈포를 하늘에다 쏘아대고 교인들은 무섭게 함성을 지르며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그렇게 사전 계획이 물샐 틈 없이 용의주도했으니 어찌 승리하지 않고 배기랴. 장두 오대현 이하 상무사 유생들은 한집에 들었다가 창졸간에 총을 난사하며 들이닥친 최선달의 포수들에게 무더기로 사로잡히고 생전 처음 듣는 총소리에 놀란 회민들은 먹던 밥을 팽개치고 산지사방으로 튀어 줄행랑 놓기에 바빴다."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중 일부

당시 천주교인들은 민초들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에서 민회를 선제공격하였다. 하지만 이 공격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성난 민중은 비폭력 저항에서 무장항쟁으로 투쟁의 성격을 바꿨다.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흥분하여 들고 일어나 민병대를 결성하였고 제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황사평으로 집결하였다. 결국 5월 28일에 제주성은 함락되었고 성난 민중에 의한 피의 보복이 진행되었다.

▲ 명월의 들녘 명월성 인근에 있는 밭이다. 지금은 한 없이 평화로와 보이지만 최근의 사회 환경을 보면 이 일대가 다시 뜨거워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장태욱
명월은 삼별초 장군 김통정의 통곡과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죽기로 저항했던 몽고 목호들의 수많은 주검과 외세와 결탁한 매국세력에게 주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들고 일어섰던 제주민초들의 핏방울이 뜨겁게 뒤섞여 있는 곳이다. 어쩌면 그 싸움이 여전히 진행 중인 지도 모른다.

뺏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왜 이 변방고을의 몫이어야 하는지 서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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