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 제주 '관덕정'

   
관덕정 광장 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다. ⓒ 장태욱

아주 오래 전부터 제주 관덕정 일대는 제주성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성 내부는 관아가 늘어서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자 제주목이 설치되었고, 중앙에서 목사가 파견되었다. 

관덕정 창건, 제주 관아의 가운데서 군사를 훈련시키는 광장으로

그리고 1448년(세종 30년)에 안무사 신숙청은 관덕정을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집현전 직제학 신석조가 쓴 관덕정기에는 '예기에 이르기를, 활을 쏘는 것은 왕성한 덕을 보는 것이다. … 관덕정으로써 이름을 삼음은 활쏘기를 위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관덕정은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훈련소로 이용되었다. 
  

관덕정 애초에 안평대군이 글을 썼는데, 지금은 이산해가 쓴 글이 남아 있다.  ⓒ 장태욱

관덕정을 지을 당시에는 관덕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관아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동쪽으로 트인 공간을 관덕정 광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과거 관덕정 지붕 4각에는 풍경이 달려 있었고, 실내 서쪽 위에 '탐라형승(耽羅形勝)', 가운데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입구 위에는 관덕정(觀德亭)이라고 적힌 액자가 있었다.   

탐라형승과 호남제일정 '탐라형승(耽羅形勝)'은 김영수 방어사가 쓴 것이며,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은 제주목사 박선양이 쓴 것이다.  ⓒ 장태욱
취과양주귤만교 두보가 술에 취해 교자를 타고 양주를 지나는데, 아름다운 기생들이 자기를 쳐다봐 달라고 귤을 던지는 그림이다. 관덕정 들보에는 이 외에도 4점의 그림이 남아있다.  ⓒ 장태욱

'탐라형승(耽羅形勝)'은 김영수 방어사가 쓴 것이며,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은 1882년(고종19년)에 박선양 목사가 쓴 것이다. 그리고 '관덕정(觀德亭)’이란 글씨는 애초에 안평대군이 썼는데, 이곳에 불이나 안평대군의 글씨는 사라지고 지금은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가 쓴 글이 붙어 있다.

관덕정은 1963년에 보물 제 322호로 지정되었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일 뿐만 아니라 들보에 상산사호(네 신선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나무꾼과 옆에서 낮잠을 자는 신선의 그림), 취과양주귤만교(두보가 술에 취해 교자를 타고 양주를 지나는데, 아름다운 기생들이 자기를 쳐다봐 달라고 귤을 던지는 그림), 대첩도, 대수렵도, 십장생도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보물로서의 가치를 더 인정받고 있다. 
  

▲ 옛날 관덕정 과거 관덕정의 모습니다. (제주목관아지에서 촬영)  

관덕정은 1448년 창건된 이래로 1480년, 1559년, 1690년, 1778년, 1851년, 1882년 등의 중수 기록이 있다. 1927년 일제에 의해 중수될 때는 관덕정의 긴 처마가 모두 잘려버려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지금의 관덕정은 1969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관덕정, 정치 1번지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

한편 조선시대 이 일대가 제주 지방행정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관덕정은 제주역사에 있어서 굵직한 사건들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인조반정 이후 제주에서 유배 중 마감한 광해군의 빈소도 이곳 관덕정에 바련되었다. 1641년(인조 19년) 7월 1일,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광해군이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제주에 들어온 지 4년 4개월 만의 일이었다.

인조가 보낸 예조 참의가 화북포에 도착한 것은 7월 27일이다. 광해군의 빈소는 관덕정에 마련되었고, 삼읍의 수령들이 제를 지냈다. 광해군의 시신을 실은 배는 8월 19일 제주를 떠났다. 광해군은 10월 4일 경기도 양주에서 장사되었다. 
  

▲ 장터 관덕정 일대에 들어선 장터(제주목관아지에서 촬영)  

조선시대에는 관덕정을 중심에 놓고 남북으로 관아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관덕정 광장은 관아의 중심에 있어서 제주정치 1번지에 해당했다. 게다가 당시 이 일대에는 큰 장이 서고 있었다.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장소로서의 의미보다 광장으로서 기능이 더 부각되었다.

그러다보니 지방 행정과 지역민들의 민심이 이곳에서 교차했다. 가끔 행정과 민심이 충돌하며 금속성 파열음을 일으킬 때면 주민들은 큰 비극을 맛봐야 했다. '이재수의 난'과 '삼일절발포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건이다.

1901년 5월 14일 평화 시위로 자신들의 주장을 펴고 있던 민당에게 천주교도들이 총포를 발사한 사건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일이 되었다. 성난 군중들이 민병대를 조직하고 1901년 5월 21일에 제주성을 향해 모여들었다. 
  

▲  이재수의 난 관덕정에서 천주교도들과 봉세관과 탐관오리들에 대한 민병대의 보복의 자행되었다.(제주목관아지에서 촬영)    장태욱

민병대들은 굳게 잠긴 제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황사평에 진을 치고 제주성을 공격하였다. 굳게 성문이 잠긴 제주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성문은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열렸다. 5월 25일 퇴기 만성춘, 만성월 등이 관덕정 광장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프랑스 신부에게 문을 열라고 요구했다. 결국 성문은 열렸고 땔감과 곡식이 떨어진 성안의 비천주교도들은 성 위에서 대포를 뽑아 던지며 환호성을 질렀다.

성안에 들어온 민병대들은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여서 피의 응징을 시작했다. 기록에 의하면 민란에 의해 처형된 자들이 317명에 이르는데, 그중 천주교인이 309명이었다. 6월에 이르자 프랑스 함대와 관군이 제주에 상륙했고, 이재수가 이끌던 민병대는 이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47년 3월 1일, 비극의 서곡은 연주되는데

해방 정국에서 관덕정에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렸다.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리던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는 2만 5천에서 3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날은 도내 10개면에서 별도의 기념식을 가졌던 군중들이 다시 제주로 집결했던 것이다.
  

제주북초등학교 47년 3월1일에 열린 3.1절 기념대회에 3만에 가까운 군중이 모여들어 미군정 당국과 경찰을 긴장하게 했다.  ⓒ 장태욱 

이에 앞서 2월 22일에 경찰은 3·1절 기념 대회를 불허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2월 23일 충남·충북 경찰청 소속 각 50명씩 100명의 응원경찰이 제주에 들어왔다. 불행은 이렇게 잉태되고 있었다.

3월 1일 북국민학교로 모여든 군중을 보고 경찰당국은 (행렬은 불허하고)집회를 허가해줄 수밖에 없었다. 집회는 '3·1정신 계승하여 조국의 자주통일을 이룩하자'는 취지로 뜨겁게 진행되었다.

오후 두시 경 기념식이 끝나자 군중들은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가되지 않은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시위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대열는 관덕정 광장을 지나 서문통으로, 다른 대열은 감찰청을 지나 동문통으로 행진했다.

그 와중에 오후 2시 45분경 갑자기 튀어나온 6세 가량의 어린이가 한 기마경관의 말굽에 채였다. 군중들은 기마경관을 향해 야유를 하며 돌을 던졌고, 당황한 기마경관은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당시 관덕정 앞에는 육지에서 내려온 기마경관이 무장을 한 채 시위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기마경관이 시위군중에게 쫒기는 광경을 목격하자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총을 발사한 것이다.
  

제주대학병원 47년 당시 이곳에 도립병원이 있었다. 관덕정에서의 발포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송되었다. ⓒ 장태욱

이 발포로 민간이 6명이 숨졌는데, 허두용(15세), 박재옥(21세), 오문수(34세), 김태진(38세), 양무봉(49세), 송덕수(49세)가 그들이다.

이 때 총상을 입은 시위대원들은 도립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런데 이날 도립병원에서는 또 다른 발포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도립병원에는 그 전날 교통사고를 당한 한 응원경찰이 입원해 있었는데, 갑자기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나고, 피투성이가 된 부상자들이 업혀 들어오자 충남 공주경찰서 소속 이문규 순경이 공포감을 느껴 총을 난사해 행인 2명에게 총상을 입힌 것이다.
  

▲ 제주감찰청 옛 터 이곳에서 시위대와 무장경찰이 대치해서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았다.  ⓒ 장태욱 

한편 이날 발포 사건 직후 제주감찰청 앞에서는 무장경관대와 시위대가 일촉즉발의 상항을 연출하였다. 시위대의 행진을 막아선 경찰관 약 50명이 집총자세로 시위대 앞에 섰고, 주로 부녀자들로 구성된 시위대는 경찰과 대치하였다. 다행히 제주신보 기자들의 설득으로 시위대가 자진해산하면서 인명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경찰당국은 이날 벌어진 일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하고 행사 간부와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남 경찰에 100명의 응원경찰을 요청하였다. 4·3의 비극은 그렇게 서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제휴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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