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제주지역 예비검속자에 대한 집단 학살

용담 해안가에 있는 레포츠 공원은 공원이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축구나 농구를 하려는 청소년들은 물론이고,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데이트를 하려는 연인들도 즐겨 찾는다. 이 공원은 넓은 주차장이 갖춰져 있어서 자동차로 용담해안도로를 지나다가 잠시 차를 세워두고 해풍을 맞으며 정다운 대화를 나누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 용담레포츠공원 주차장 단체 관광을 온 여행객들을 싣고 온 버스들이 주차장에 서있다.  ⓒ 장태욱 

그런데 이곳을 자주 찾는 방문객들도 대부분 잘 모르고 지나치는 시설이 있다. 공원의 서남쪽 구석에 세워진 예비검속희생자위령비가 그것이다. 이 비석은 한국전쟁 발발직후 당국에 의해 무참히 희생 당한 예비검속자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졌다. 예비검속자 희생은 4·3의 광풍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주도가 전쟁의 회오리에 휩쓸리면서 겪었던 참극이다.

좌익 인사들을 전향시키겠다던 보도연맹, 실상은 좌익섬멸을 위한 덫 

정부는 1948년 정부가 수립된 이후 좌익인사들을 전향시켜 북한을 분쇄한다는 취지로 '보도연맹'을 결성했다. 외적으로 좌익 전향자들을 '보도'(保導, 편하게 이끈다)한다는 취지로 결성했지만 실상은 전향자가 제출한 자백서를 기반으로 좌익세력을 섬멸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 위령비 위치를 알리는 표지 용담레포츠공원 입구에는 예비검속 희생자 위령비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가 있다.  ⓒ 장태욱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전국 각 지역에서 보도연맹이 포섭한 좌익분자는 39,000여 명에 달했는데, 그 중 제주지역에 등록된 자가 5,283명에 이르렀다. 제주지역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인원은 서울(12,196명)과 경기(5,964명)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했다.

제주는 4·3과정에서 좌익 세력이 거의 전멸한 상황이었는데도, 경찰은 실적을 채우기 위해 좌익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까지 보도연맹에 등록시켰다. 대동청년단원이나 마을 구장 등 경찰에 우호적인 사람들까지 가입시켰고, 종달리 마을의 경우에는 마을 청년 전체가 예외 없이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 위령비 가장 왼쪽에 있는 것이 건수비, 가운데가 위령비, 가장 오른쪽에 있는 것이 양중해 시인의 시가 적힌 비석이다.  ⓒ 장태욱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전국 각 경찰서에서 파악하고 있던 보도연맹원이나 반정부혐의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반정부활동을 할 개연성이 있는 사람들을 사전 구속하여 전쟁에서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겠다는 취지로 실시한 일이다.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대규모 집단 학살

예비검속이 실시되자 보도연맹에 가입된 자들이 최우선 검속 대상이 되었다. 제주도내의 예비검속은 당시 제주경찰서, 서귀포경찰서, 모슬포경찰서, 성산포경찰서 등 각 경찰서 별로 이루어졌으며, 붙잡힌 자들은 관할 경찰서나 인근 창고 등에 수감되었다.

경찰당국은 예비검속자를 A, B, C, D로 등급을 매겨 분류했는데, 가장 심각한 자들은 D등급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인민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에서 치열하게 대치하던 1950년 8월에 제주지역 주둔 군경은 예비검속자들을 대대적으로 집단 총살했다. 

집단 총살을 당한 자들은 주로 C급과 D급에 속한 자들이었다. 군경 당국은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자 제주도를 반공의 전초기지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이런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제주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 학살 =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을 종합해 보면 제주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에 대해 두차례의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 첫 번째 학살은 8월 4일에 자행되었다. 당시 제주항에서 경비근무를 하던 장시용(해병대 소속)씨의 증언에 따르면 8월 4일에 알몸차림의 수감자 500여 명을 태운 배가 바다에 나갔다가 두 시간 정도 지나서 빈 배로 돌아왔다. 
  

▲ 제주비행장 유해 발굴 2007년에 제주비행장에서 제주대학교와 4·3연구소가 공동으로 유해발굴작업을 진행했다(제주 4·3평화기념관에서 촬영).  ⓒ 장태욱 
▲ 제주비행장에서 나온 유골들 유골발굴을 통해 소문으로만 듣던 집단 암매장이 사실임을 확인했다.(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촬영)  ⓒ 장태욱 

두 번째 집단 살인은 8월 19일 밤부터 20일 새벽 사이에 자행되었다. 당시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사람들은 당시 수백 명의 수감자가 트럭에 실려 현 제주국제공항이 들어서 있는 '정드르'에서 총살된 후 집단 암매장되었다고 증언했다.

서귀포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 학살 = 서귀포 예비검속자들의 희생일은 7월 29일로 확인되었다. 서귀포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자들은 이날 수감자 150명 정도가 밖으로 끌려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남은 수감자들 중 일부는 8월 12일에 제주도 경찰국으로 이송되었는데, 제주읍 수감자들과 함께 '정드르'에서 총살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슬포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 학살 = 모슬포경찰서 예비검속자들은 당시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와 한림지서 관할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되어 있었다. 두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자들은 1950년 8월 20일 새벽에 송악산 '섣알오름'에서 총살되었다.

같은 날 새벽에 같은 장소에서 총살되었지만 모슬포 수감자들과 한림 수감자들은 약간 다른 위치에서 총살을 당했다. 이 현장이 우연히 주민들에 의해 발각되었다. 소문을 들은 유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려 했지만 군인들이 제지하여 수습하지 못했다.
 
1956년에 이르러서야 유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하여, 한림에 수감되었던 자들의 시신은 금악리 '만벵디 공동묘지'에, 모슬포에 수감되었던 자들의 시신은 상모리 586-1번지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址)에 안장하였다.
 

▲ 문형순 경찰서장 독립군 출신이다. 4·3 과정에서 집단학살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근무하면서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을 거부했다.(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촬영) ⓒ 장태욱

한편, 성산포 경찰서에서는 당시 경찰서장이었던 문형순이 군의 총살지시를 거부하여 대규모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문형순 경찰서장은 독립군 출신이었는데, 수감자들에 대해 집단 총살을 강요하는 해병대 정아무개 참모의 지시에 대해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라고 써서 지시를 거부했다고 한다.

문형순 서장은 C급(4명)과 D급(76명)으로 분류된 자들 중 6명만 군에 넘겼는데, 이들은 7월 28일 서귀포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이들 6명은 7월 29일 새벽에 서귀포 경찰서 수감자들과 함께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비검속자 사살은 극도로 비밀리에 수행되었기에 총살명령을 내린 게 누구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신성모나 육군본부 정보국 김창룡이 명령의 주범이었을 것이라는 일부의 증언이 나왔을 뿐이다.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광란의 집단살인이 중지된 것은 1950년 9월의 일이다. 당국은 심사를 통해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 198명, 서귀포 경찰서 수감자 120명, 모슬포경찰서 수감자 90명, 성산포 수감자 198명을 석방하였다. 

제주비행장 유골 발굴 결과 집단 암매장, 사실로 밝혀져

예비검속자에 대한 대대적인 총살로 제주국제공항이 들어서 있는 옛 정드르 마을은 4·3의 최대 학살터로 알려졌다.

2007년 8월부터 제주비행장에서 제주대학교와 제주 4·3연구소가 공동으로 제주4·3 피해자 유해 및 유류품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발굴팀은 "남북활주로 서북쪽 지점에서 4·3사건 당시 민간인들을 총살하고 암매장했던 길이 32.4m, 폭 1.2-1.5m, 깊이 0.9-1.2m의 구덩이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지금은 옛 정드르 마을에 활주로가 들어섰기 때문에 제주비행장 전체에 대한 발굴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일부 발굴된 지점에서 유골과 유품을 확인함으로써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 착륙 직전의 비행기 비행기가 제주공항 활주로에 착륙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제주공항은 제주 4·3 최대의 학살터 중 한 곳으로 뽑힌다.  ⓒ 장태욱  

정드르에서는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 이외에도, 4·3과 관련해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을 선고받은 249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1949년 진압군에 의해 집행됐다고 한다. 관광도시 제주의 하늘길이 사실은 민간인들이 집단 사살되어 억울하게 암매장된 땅에서 열리고 있는 것이다.

딸 진주와 함께 레포츠공원을 찾은 날은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인근 제주공항에서 들려오는 비행기의 이착륙 소리가 평일보다 훨씬 세게 들렸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지만 관광버스 몇 대가 공원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 위령비 앞에 선 진주 예비 검속을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장태욱  

차를 세우고도 무관심한 수학여행단, 위령비가 초라하게 느껴져 

위령비를 찾았다. 위령비 뒤쪽에는 단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음식점이 자리 잡고 있는데, 마침 점심시간이라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위령비 오른쪽에는 고 양중해 시인이 남긴 시가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시구 중에 '이승 사는 동안 효도 한 번 못하고 무덤 하나 남기지 못한 때 떠났다'는 대목을 읽고 있노라니 가슴이 미어졌다.  

떠나가는 자의 소원

1950년 음력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그날 밤
우리들은 한도 많은 이 길을
서로 얼싸안고 떠나갔노라

이승 사는 동안
부모님께 효도 한 번 못하고
무덤 하나 남겨두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떠났노라

우리들이 말 못한 말들이사
살아있는 그대들인들 어찌 모르랴
그대들의 가슴깊이 묻어두었다가
아들손자들에게도 전하여다오

아름다운 우리고장 제주도가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는
진실로 평화로운 섬이 될 수 있도록
서로 손을 잡고 굳게 약속하여 다오 

▲ 위령비 뒷 쪽에 수학여행단 이 일대에 단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음식점들이 있어서 수학여행단이 자주 찾는다.  ⓒ 장태욱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에게 이 위령비에 대해 소개를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아니요"라고 답했다. 관광산업이 수익을 목적으로 한다지만 바로 옆에 있는 위령비도 그냥 지나치는 '수학여행'의 현실을 보면서 뼈아픈 과거사를 증거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한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제휴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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