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 교래리에서 폐교 걱정해야 하는 제주 개발의 모순

제주돌문화공원 교래리 북쪽 경계 지점에 있다.  ⓒ 장태욱  

제주 시내에서 표선을 향해 뻗은 동부산업도로(1137번 도로)는 회천에서 남조로(1118번 도로)와 만난다. 남조로 검문소에서 오른쪽으로 남조로를 따라 4Km쯤 지나면 길 오른쪽에 우뚝 솟은 오름이 보인다.

끝이 뾰쪽하기가 마치 바늘과 비슷하다 하여 바농오름(바농은 바늘을 이르는 제주 방언)이라 한다. 바농오름 앞에는 최근에 개장한 제주돌문화공원이 들어서 있다. 바농오름과 제주돌문화공원을 지나면 교래리의 북쪽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산악지대에 위치해서 사냥으로 삶을 지탱했던 마을

교래리는 행정구역상으로 제주시 조천읍에 속해 있다. 해발고도가 410m에 이르러 제주도에서 가장 고지대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겨울에 한 번 내린 눈은 좀체 녹지 않고, 봄과 가을에도 밤에는 두터운 이불을 덮고서야 잠을 잘 수 있다. 차가운 기후로 이 마을은 예로부터 농사가 발달하지 못했다. 화전을 일구었던 흔적도 있지만 마을은 주로 목장과 산림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4·3 과정에서 마을이 전소되면서 많은 기록이 소실됐기 때문에, 교래리의 정확한 설촌 연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 일대에서 고려장의 흔적과 화전민이 거주했던 터 등이 발견됐고 탐라순력도에 교래대렵(僑來大獵)이 남아 있어서 설촌 시기를 대략 700~800년 정도 전으로 추축하고 있다.

과거에는 교래를 '도리'라고 불렀다. 교래리에 하천이 발달했는데, 다리 모양의 암반이 있어서 그 곳을 다리 삼아 건넜던 것에서 유래된 마을명으로 보고 있다. 도리는 다리를 이르는 제주 방언이다. 도리가 교래리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다리 교(僑)'자와 '올 래(來)'자를 사용하여, 지명의 유래를 더 명확히 하였다. 
  

교래대렵 이형상 목사가 조정에 진상할 짐승을 얻기 위해 병졸들을 동원하여 사냥을 하는 장면이다. 화공 김남길이 그렸는데, 탐라순력도에 남아있다.  ⓒ 장태욱  

이형상 목사가 남긴 탐라순력도에 교래대렵이 포함된 것은 당시 교래리의 자연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오름으로 둘러싸인 산간에서 농사를 짓기 힘들었던 주민들은 사냥으로 삶을 지탱했던 것이다.

1702년(숙종 28) 10월 11일에 이형상 목사는 교래리 일대에서 조정에 진상할 동물을 얻기 위해 사냥에 열었다. 교래대렵은 화공 김남길이 이 당시 사냥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날 이형상 목사와 함께 사냥에 참여한 관원은 삼읍 수령과 감목관(국마 관리인)이다. 그리고 사냥에는 마군(馬軍, 말을 타고 사냥하는 군인) 200명, 보졸(步卒, 걸어서 짐승을 모는 군인) 400여 명, 포수(砲手) 120명 등의 군인이 동원되었다. 사냥으로 잡은 짐승은 사슴 177마리, 돼지 11마리, 노루 101마리, 꿩 22마리였다고 한다.
  

산굼부리 정상에 있는 분화구의 크기가 한라산 백록담 보다 크다고 알려졌다. 분화구내에 다양한 식생이 그 가치를 더한다. 천연기념물 제 263호로 지정되었다.  ⓒ 장태욱 

힘센 사냥꾼 '송천총'의 전설

교래리에 사냥이 발달했다는 것은 송천송의 전설에서도 나타난다. 송천총은 옛날에 교래리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힘센 사냥꾼의 이름이다. 

송천총이 어느 날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수사슴 두 놈이 서로 뿔을 마주대고 싸우는 것을 보았다. 두 사슴은 서로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지라 사람이 가까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송천총은 미소를 띠면서 아들에게 저 사슴 두 놈을 잡으라고 했다. 아들은 양손으로 각각 두 사슴의 뿔을 잡았는데, 싸움에 열중하던 두 사슴은 깜짝 놀라 달아나려 하였다. 두 사슴 사이가 벌어지자 두 뿔을 잡고 있던 아들이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 제 몸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이놈아, 그 정도에 몸이 찢어질 것까지 있느냐?"

송천총은 아들이 손에 잡고 있던 두 사슴의 뿔을 움켜쥐고 서로 박치기를 시켰다. 사슴이 서로 뿔로 상대의 머리를 들이 받게 되었고, 결국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조개와 황새가 다투는 사이에 지나가는 어부가 이들을 거두어 들였다는 어부지리(漁父之利) 성어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사냥이 잘 되길 바랐던 주민들의 희망이 반영된 전설이다.

그런데 그렇게 힘이 장사였던 송천청에게도 라이벌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바로 심돌(지금의 성산읍 시흥리) 사는 부대각이었다. 부대각이 송천총과 힘을 겨루고 싶었다. 당시만 해도 교통로가 변변치 않았던 지라 부대각은 그저 산을 바라보고 들판을 가로지르며 송당을 향해 걸었다.

마침내 부대각은 송천총과 들판에서 마주쳤다.

"뉘신데 좋은 길 나두고 들판으로 가는 것이요?"
"난 심돌 사는 사람인데 길을 잘 몰라서 저 도리 마을만 바라보고 가는 길이라우."
"심돌 부대각이 힘이 장사라고 하더이다만 혹시 아시우?"
"내가 부대각이오만 그대는 뉘시우?"
"바로 그대로구먼, 난 도리사는 송천총이라우."

이렇게 만난 두 장사는 들판에서 씨름으로 힘을 겨루었다. 낮에 시작된 두 사람의 힘겨루기는 석양이 내릴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송천총은 부대각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저녁상과 함께 막걸리를 융숭히 대접했다.

그리고 날이 밝자 두 사람은 다시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힘겨루기는 3일 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결국 서로 씨름을 그만두기로 합의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경주마육성목장 조선시대 교래리에는 국마를 키우는 녹산장이 있었고, 녹산장 내에 도내 국마 관리를 총괄하는 감목관의 사무실이 있었다. 지금은 한국마사회에서 운영하는 경주마육성목장이 들어서 있다. ⓒ 장태욱  

교래리 일대는 조선 시대에 국마를 키우던 녹산장(鹿山場)이 자리 잡고 있었고, 녹산장 내에는 산마감목관이 근무했던 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산마감목관은 녹산장뿐만 아니라 제주도내 모든 목장을 관리하던 관직이었다. 이 일대는 조선 후기 제주 축산행정의 중심지였던 셈이다. 목축의 중심지로서의 전통 때문인지 지금 교래리에는 한국마사회가 관리 운영하는 경주마육성목장이 들어서 있다.

4·3 이후에 복원된 마을은 그 가치를 인정받는데

교래리는 한때 마을이 번창하여 가구 수가 일백여 호에 이른 적이 있다. 조천면 소속 중산간 마을 중에서는 선흘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하지만 4·3 사건으로 말미암아 마을이 폐허가 되고 주민들은 해변 마을로 이주해야 하는 비운을 겪었다.

4·3 이후 마을이 복구되었다. 교래리는 남쪽으로 남원읍 수망리와 서쪽으로 제주시 봉개동, 북쪽으로 조천읍 와흘과 인접하는 마을이다. 이 마을들과 포장도로로 이어지면서 교래리는 다른 마을에 비해 접근성이 좋아졌다. 게다가 남조로변에 있으면서도 비자림로(1112번 도로)를 통해 51.6도로(1131번 도로) 및 동부관광도로(1137번 도로)와 바로 연결되면서 교래리는 중산간 지역에서는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니미니랜드 교래사거리에 들어선 관광시설이다.  ⓒ 장태욱
토종닭 교래리 토종닭 요리는 지역의 특산품이 되었다.  ⓒ 장태욱 
    
너른 들판과 오름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 환경에 교통까지 편리해졌으니 이 일대가 관광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산굼부리 분화구를 기반으로 미니미니랜드와 돌문화공원 등이 마을에 들어섰고, 그 주변에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줄을 이어 생겨나고 있다. 이 와중에 지역주민이 만들어내는 교래리 토종닭 요리는 지역 특산품이 되었다.

한편 제주도내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마을인데다 농약 사용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교래리는 도내에서 지하수가 가장 깨끗하게 보존된 곳이다. 교래리에 제주도개발공사 소속 삼다수 공장이 들어선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교래리의 지하수로 생산한 삼다수 생수는 ㈜농심의 유통망을 통해 시장에 유통되는데, 전국 생수시장에서 가장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마을 관광지도 리사무소에 붙어 있었다. 이 마을에서 제작한 광광지도가 관광객들에게 배포되기도 한다.  ⓒ 장태욱  

지금 교래리에는 주민 3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16명의 어린이가 교래분교에 다니고 있다. 24개 음식점이 영업 중이며,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가구는 10가구 정도다. 나머지는 직장인 가장을 두고 있는 가정들이다.

마을회관에 도착해보니 사무실 안에는 마을 일대를 소개하는 관광지도가 붙어 있었다. 마을 곳곳의 관광시설이 표시되어 있는 지도만 봐도 교래리가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김삼범 교래리장 초등학교를 살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 장태욱 

김삼범 교래리장을 만났다. 김 이장은 최근까지 교래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개장된 돌문화공원 내에 입점하여 매점을 운영 중이라고 했다. 교래리는 사통팔달 교통이 편리하고 유명한 관광시설들이 줄을 이어 생겨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크게 늘지 않고 있고, 초등학교도 폐교 위기에 놓여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교통이 너무 편리한 게 인구가 늘지 않는 이유입니다. 삼다수 공장이나 미니미니랜드의 직원들이 대부분 제주시에 거주하면서 출퇴근합니다. 교래에서 시내까지 차로 25분 안팎이면 도착합니다. 이분들이 굳이 이 시골에서 살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교래분교 현재 17명의 어린이가 다니고 있다.  ⓒ 장태욱  

마을에 외부 시설들이 들어와도 지역 인구가 늘지 않고 초등학교가 폐교 위기에 놓여 있다면 장기적으로 주민들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는 것이다. 교래리 개발에 지역 주민들이 배제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인구를 늘리고 학교를 살릴 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지금 단계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제주도개발공사가 운영하는 삼다수의 태도입니다(농심은 유통을 맡고 있다). 제가 듣기로는 프랑스의 에비앙 생수인 경우는 마을 이름을 브랜드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매출의 일부를 꾸준히 지역 발전 기금으로 투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삼다수가 지방 공기업이 운영하는 회사인 만큼 마을 발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삼다수 생수 공장 입구 교래리는 천연 지하수가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어서 삼다수 생수 공장이 이 마을에 들어었다.  ⓒ 장태욱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지 말고 마을과 공생하려 해야

교래리에 들어선 삼다수 공장이 마을 발전에 기여하는 것보다 불편을 야기한 측면이 크다는 것이다. 김 이장은 삼다수 공장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털어 놓았다.

"1998년 삼다수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교래리 억새꽃이 아름답다고 알려져서 우리 마을에서 억새꽃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공장이 들어서자 억새꽃가루가 날리는 것이 생수 생산에 방해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2005년부터 공장을 운영하는 제주도개발공사가 근처의 국공유지를 매입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을이 되면 이 일대 국공유지에 있는 억새를 대부분 베어버립니다. 우리 마을에서 더 이상 억새꽃잔치를 열지 못합니다. 2004년 억새꽃축제가 마지막이었습니다(이후로 제주 억새꽃축제는 애월읍 새별오름에서 열리고 있다).

삼다수가 국공유지에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직원들이 생활할 기숙사만 짓고 이 마을에서 생활한다면 초등학교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지방공기업인 만큼 마을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말고 관심을 갖고 보존해야할 대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김 이장은 학교를 살리기 위해 교육청 관계자들도 만나고 다닐 뿐만 아니라 교래초등학교에 학생을 등록 시킬 학부모들을 만나고 다니기에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마을문고도 만들어 놓고 책 기증도 받고 있다.

관광지로 개발되는 와중에도 주민들은 폐교를 걱정해야 하는 모순이 우리 농촌 개발의 실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교래리 사무소 064-782-1746
아이들을 위해 책을 기증하실 분들은 교래리 사무소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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